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혁거세는 어떻게 천년왕조 신라의 건국시조가 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18. 21:08

윤여동설 - 혁거세는 어떻게 천년왕조 신라의 건국시조가 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파소(사소라고도 한다)라는 이름을 가진 동부여 공주가 어느 남자와 정을 통해 임신이 되자 그를 어찌할 수 없어 동부여에서 도망쳐 눈수, 동옥저를 거쳐 진한 나을촌에 와서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소벌도리가 그를 알고 데려다 길렀고 아이가 자라자 6부의 촌장들이 추대하여 신라의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곧 신라 시조 혁거세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서 양산 아래 나정 우물 부근에서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기 위해 남자들이 엎드려 절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가자 거기에 자줏빛 알 한 개가 있었다는 것은 방금 태어난 어린아이가 있었다는 말이 되며,
  말이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는 것은 아이를 낳은 여자가 그 자리를 피해 숨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한데, 아마 이때 동부여의 파소(사소) 공주는 자신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온 상태였으므로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필자가 혁거세의 어머니인 파소(사소)가 동부여 공주라고 하는 것은 동부여의 건국년도는 기원전 86년이고, 그 위치는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이었다.

  그리고 혁거세가 태어난 시점인 기원전 69년에 동부여의 왕위에는 해부루왕이 올라 있었고, 파소(사소)공주가 도망쳐 눈수, 동옥저를 거쳐 배를 타고 진한으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눈수란 지금 요하 북쪽에 있는 눈강을 말하는 것이고, 동옥저란 지금의 내몽골 적봉 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진한은 지금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파소(사소)공주는 동부여를 출발해 동쪽으로 대흥안령을 넘어 눈수(지금의 눈강)까지 갔는데 날씨가 추워지자 그곳에서 방향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다시 1천리쯤을 내려와 동옥저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배를 타고 다시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의 진한 나을촌에 도착해 혁거세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임신한 몸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시조 혁거세의 어머니 파소(사소)공주는 동부여 건국시조인 해부루왕의 딸이 틀림없다.
    
  그리고 알을 깨고서 사내아이를 얻어 동천에서 목욕시켰다는 것은 갓 태어난 어린애의 탯줄을 자르고 나정 우물물을 길어 씻겨 주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한데, 고허촌장이었던 소벌도리가 이 아이의 신분을 알고는 데려다 기르게 되고 열세 살이 되자 혁거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고구려 왕실은 북부여의 후예이고, 백제의 왕실은 졸본부여의 후예이며, 신라 왕실은 동부여에 혈통이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혁거세가 태어난 때는 기원전 69년이고, 신라가 건국된 때는 기원전 57년으로서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진번군에 맥국이 세워지고, 임둔군은 동예가 차지하게 되자 한나라에서는 진번, 임둔 두 군을 폐지하게 되고, 그 후 다시 현토군 땅에서 옥저가 건국되자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는 등 변화가 있게 되고, 옛 현토군의 나머지 관할지는 낙랑동부도위가 된다.
  그리고 중국 사서들에는 한결같이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기원전 128년 창해군 설치관계로 한 무제와 위만조선 우거왕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 결국 창해군은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위만조선의 우거왕이 진번 등이 한나라와 접촉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이러한 갈등이 원인이 되어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게 되고,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된다.
  그러다가 이러한 혼란을 틈타 기원전 57년에 이르러 진한 6부가 힘을 모아 스스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38년(B.C.20) 조에 "봄 2월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방하게 했더니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진한, 변한이 나의 속국인데 근년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대국을 섬기는 예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했다" 라는 기록이 남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북사 신라전을 보면,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다.
  진한(辰韓) 또는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대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진나라 때 고역을 피해 사람들이 그곳으로 오자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분할하여 주어 그들을 살게 했는데, 그들이 진나라 사람이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들이 쓰는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말과 비슷한데,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 하며, 도둑을 구(寇),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며 서로를 부를 때는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과 같지 않다. 또 진한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세워주어 세습하여 대대로 전해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항상 마한의 통제를 받았을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진나라 말기인 혼란기에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진나라 사람들이 중국 진(秦)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살기 좋은 마한 지역으로 대거 도망쳐 들어오자 한왕이 그들을 한의 동쪽 변두리인 진한(辰韓)에 살게 했는데, 혹은 진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여 진한(秦韓)이라고도 불렀으며, 마한에서는 이 사람들을 철저하게 통제,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한왕이란 기원전 194년 왕검성을 위만에게 빼앗기고 남쪽의 마한으로 도망쳐 와 월지국(목지국이라고도 한다)에 도읍하고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하여 한이라 하고 다시 왕위에 올랐던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을 말하는 듯 하다. 
   
  이는 후한서 한전에도,
  "마한이 가장 커서 그 종족들이 공동으로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모든 삼한 땅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여러 나라 왕의 선조는 모두 마한 종족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를 잘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진한 6개국을 총괄하는 진한왕과 변한 6개국을 총괄하는 변한왕을 마한에서 임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위만조선과 한(漢)과의 전쟁, 위만조선 멸망, 한사군 설치, 마한의 진번 탈환 등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마한에서 임명한 진한왕의 영향력이 약화된 시기를 틈타 진한 6부의 촌장들이 연합해 땅을 쪼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했다고 할 수 있고, 이때 다른 나라들도 경쟁적으로 땅을 쪼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어 진한 여섯 개 나라가 열두 개 나라로 나누어졌을 것이다. 

    

☆ 삼국지 한전에는 한(마한)의 도읍이 월지국(月支國)이라 기록하고 있고, 진한이 원래는 여섯 나라였으나 점점 열두 나라로 나누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한 6부의 촌장들이 나라를 세울 계책을 토의하려고 알천 언덕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을 때 멀리 양산 아래 나정 부근 숲 속에서 혁거세가 태어났는데, 알고 보니 그는 동부여 공주의 아들이었다.
  그리하여 진한 6부의 촌장들은 동부여 해부루왕의 외손자인 혁거세를 선택해 그를 왕위에 올리고 나라이름을 사라 혹은 신라라고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