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윤여동 2008. 5. 3. 00:28

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기원전 37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건국과정에 대하여 매우 아리송하게 기록되어 있어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온 후 그곳의 비류수 가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고 또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서 아내를 삼게 했는데, 왕이 죽으매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라고 주를 달아 놓기도 했는데, 당시 주몽의 처지를 잘 새겨보면 친구 세 사람과 맨주먹으로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온 주몽이 아무 정치적 기반도 없는 졸본에서 갑자기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온 후 졸본부여 왕의 부마가 되었다가 그 졸본부여의 왕위를 물려받아 왕위에 오른 후 적당한 시기에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기원전 58년에 출생하여 기원전 19년 9월에 40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범장의 북부여기에는 주몽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79년으로 기록하고 있어 무려 21년의 차이가 나는데,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었다는 기록과 추모왕(주몽왕)의 어머니인 유화가 기원전 24년 8월에 동부여에서 죽었고, 동부여왕 금와가 그녀를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워주었다는 기록을 참고하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의 진실을 밝혀보자. 

 

  주몽이 기원전 58년에 출생했고 그때 그 어머니인 유화의 나이를 18세로 본다면 유화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75년생이 되고, 주몽이 22세의 나이로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고구려를 건국한 해는 기원전 37년이 되며, 기원전 24년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죽을 때 그녀의 나이는 52세였고, 기원전 19년 주몽이 죽을 때의 나이는 40세였다는 말이 되는데, 삼국사기는 이 설에 따랐다.
  그러나 범장의 북부여기에 따라 주몽이 기원전 79년에 출생했다고 보고, 같은 조건을 적용한다면  그 어머니인 유화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96년 생이 되고, 주몽이 22세의 나이로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졸본부여왕의 부마가 되었다가 왕위를 물려받은 해는 기원전 58년이 되며, 그로부터 21년 후인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했고, 그 어머니 유화가 죽을 때의 나이는 73세였고, 주몽은 61세의 나이에 죽었다는 말이 되는데, 필자는 이 설이 매우 정확하다고 본다.

  
☆ 주몽은 기원전 58년 봄에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친 후 바로 졸본부여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을 함으로써 부마가 되었는데, 그 해 10월 졸본부여 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몽은 졸본부여의 왕위에 21년 간 올라 있다가 졸본부여의 국호를 새로이 고구려로 바꾸었을 것이다. 
  이는 주몽이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후손이 아니라 북부여의 건국시조인 천제 해모수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이로써 졸본부여는 멸망하게 되고, 북부여는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고 할 수 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주몽을 동명성왕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과 고구려의 건국시조 추모왕(주몽왕)을 혼동한 것으로서 이들은 엄연히 혈통이 다른 별개의 인물이다.

 

  해모수는 기원전 239년에 북부여를 세우고 7년 후인 기원전 232년에 주변국을 통합하고 천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기원전 108년에 동명왕이 그 땅을 나누어 졸본에서 다시 졸본부여를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북부여와 졸본부여는 한 동안 병존하다가 기원전 86년에 이르러 졸본부여가 북부여를 침공하여 북부여 4대 해우루왕은 죽고, 북부여는 멸망하게 된다.
  그러자 해우루왕의 동생인 해부루가 유민들을 이끌고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도망쳐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 이가 곧 동부여였다.
  그런데 이미 멸망한 나라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증손자인 해불리지가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겁탈하게 되어 유화는 임신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유화는 자기 집에서 내쫓기게 되고 동부여에 가서 주몽을 낳게되어 주몽은 동부여에서 자라게 된다. 그러다가 주몽이 동부여 건국시조인 해부루왕의 양자였던 금와와의 갈등으로 잡히면 죽게되는 상황에 처하자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에서 급히 도망쳐 졸본으로 가게 된다.

 

☆ 주몽은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해진의 증손자로서 그의 아버지는 해불리지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이다. 고구려 900년 존속설은 주몽이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후예이기 때문에 해모수가 기원전 232년 천제에 오른 때로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의 기간이 꼭 900년이므로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 만에 멸망했다고 인식했다.

 

  그런데 이때 주몽은 예씨라는 여인과 혼인을 하여 예씨는 임신 중이었고, 어머니 유화도 살아 있었으나 그는 생명의 위협을 피해 급히 도망치느라 어머니와 예씨를 동부여에 남겨두고 졸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주몽의 어머니 유화와 부인 예씨는 동부여에 인질로 잡힌 몸이 되었고, 얼마 후 태어난 유리 역시 인질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주몽의 아들 유리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58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기원전 58년 봄 주몽이 졸본으로 도망쳐 가자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아들로서 졸본부여 2대 왕위에 올라있던 부여무서왕이 주몽을 만나보게 되었고, 왕은 주몽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주몽에게 자신의 둘째 공주를 주어 부마로 삼게 되는데, 그 해 10월에 졸본부여왕이 죽으면서 주몽에게 졸본부여의 왕위를 물려주게 되어, 북부여 해모수의 후손인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오르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 이때 졸본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이 딸만 셋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주몽은 그로부터 21년 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다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를 없애버리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게 되고, 기원전 24년에 이르러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게 되고, 기원전 19년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가 동부여를 탈출하여 당시 주몽이 왕위에 올라 있는 고구려의 도읍 졸본으로 도망쳐 오게 된다.
  이를 보면 주몽의 어머니 유화와 부인 예씨 그리고 아들 유리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친 기원전 58년부터 계속 동부여에서 살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를 새겨보면 이들이 동부여에 인질로 잡힌 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들이 인질로 잡힌 몸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태였다면 졸본에서 왕위에 올라있는 주몽을 벌써 찾아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몽의 아들 유리는 그 아버지 주몽이 졸본으로 도망친 해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에서 태어나 아버지 없이 할머니 유화와 어머니 예씨와 함께 살아야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24년에 할머니인 유화가 73세의 나이로 죽어 동부여에 묻히게 되자 5년 후인 기원전 19년에 이르러 그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으로 도망쳐 와 태자로 봉해지게 되고, 그 해 9월 주몽왕이 61세의 나이로 죽자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유리왕의 나이는 40세였다.

 

☆ 삼국사기에는  유리왕이 기원전 37년 생으로서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올 때 19세였고, 서기 18년에 55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유리왕은 왕위에 올라 기원전 18년 7월 다물후 송양의 큰딸과 혼인을 하여 왕후를 삼았는데, 그녀는 다음 해인 기원전 17년 10월 아들인 태자 도절을 낳고는 죽게 된다.
  그리하여 유리왕은 다시 골천호족의 딸인 화희와 한나라 사람의 딸인 치희를 계비로 삼아 화희로부터 기원전 12년에 또 해명이라는 아들을 낳는다.
  그러다가 태자 도절이 서기 1년 봄 정월에 죽게되었고, 서기 3년에는 도읍을 국내로 옮긴 후 다시 다물후 송양의 작은 딸을 왕후로 맞아들이고, 화희의 소생인 해명을 다시 태자로 봉했고, 4년에는 송양의 작은 딸 사이에서 아들 무휼을 낳게 된다.
  그런데 태자로 봉한 아들  해명은 그 외가인 골천호족과 함께 도읍 이전을 반대하며 옛 도읍 졸본에서 새로 이전한 도읍 국내로 오지 않자 유리왕은 서기 9년에 이르러 그 아들 해명에게 스스로 자살하라 명령하여 해명은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자살하여 죽게된다.
  그러자 유리왕은 14년에 이르러 11세인 무휼을 태자로 봉하게 되는데 이때 유리왕은 작은 송씨와의 사이에서 해색주와 여진이라는 두 아들을 더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진이 18년 4월에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게 되고 유리왕 역시 그 해 7월에 두곡 이궁으로 갔다가 10월에 이르러 그곳에서 죽어 두곡 동쪽 언덕에 묻히게 된다.

   그리고 유리왕의 뒤를 이어 대무신왕이 서기 18년에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낙랑동부도위와 전한 낙랑군을 없앰으로써 강역을 넓히고 41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때 대무신왕의 태자인 해우(후일의 모본왕)가 약 13세쯤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대무신왕의 동생인 민중왕 해색주가 왕위에 오르게 되고 민중왕이 재위 5년에 죽자 대무신왕의 아들인 모본왕 해우(또는 해애루라고도 한다)가 왕위를 잇는다.  

  그런데 모본왕이 폭정을 일삼다가 시종에게 시해 당하게 되자 대신들은 모본왕의 태자를 왕위에 올리지 않고, 유리왕의 양자였던 재사(再思)를 왕위에 올리고자 하다가, 재사가 그를 거부하자 재사의 아들인 일곱 살짜리 궁(태조대왕)을 받들어 왕위에 올리고 그 어머니 부여부인으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하게 하였는데, 이로써 태조대왕 궁으로부터 고구려의 왕통이 해씨에서 고씨로 바뀌게 된다.

 

☆ 주몽으로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였고,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 28대 보장왕까지는 고씨로서 고구려는 두 성씨로 왕위가 이어졌는데, 이들 두 성씨가 모두 천제 해모수를 시조로 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해씨는 해모수의 직손이고, 고씨는 해모수의 외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