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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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우리 불교 5교 9산의 비밀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5. 8. 06:30

윤여동설 - 우리 불교의 5교 9산에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 최초공개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고대의 우리 불교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교종이란 불경인 부처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수행을 해야만 해탈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으로서 대표적으로 다섯 종파가 있어 이를 소위 5교라 하고,

  선종이란 교리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서 전국에 아홉 개의 선종 중심사찰이 있었는데 이를 소위 9산이라 한다.
  5교는 열반종, 계율종, 화엄종, 법상종, 법성종을 말하는 것이고,
  9산은 가지산문, 실상산문, 동리산문, 봉림산문, 사자산문, 성주산문, 사굴산문, 수미산문, 희양산문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 5교 중 열반종의 중심사찰이었다는 경복사를 전주 완산 고덕산 경복사지라고 하고, 계율종의 중심사찰을 양산 영취산 통도사라 하며, 화엄종의 중심사찰을 영주 태백산 부석사라 하며, 법상종의 중심사찰을 김제 모악산 금산사라 하며, 법성종의 중심사찰을 경주 분황사지라고 한다.
 

 

☆ 경복사지를 발굴해본 결과 만력 40년명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만력은 명나라 13대 신종의 연호로서 40년은 서기 1612년이다. 따라서 고덕산 경복사지는 고구려의 승려 보덕이 완산으로 와서 세운 절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새로 세운 절이었다가 폐사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9산 중 가지산문의 중심사찰을 장흥 가지산 보림사라고 하고, 실상산문의 중심사찰을 남원 방장산 실상사라 하며, 동리산문의 중심사찰을 곡성 동리산 태안사라 하고, 봉림산문의 중심사찰을 창원 봉림산 봉림사지라 하며, 사자산문의 중심사찰을 영월 사자산 흥녕사지라 하고, 성주산문의 중심사찰을 보령 성주산 성주사지라 하며, 사굴산문의 중심사찰을 강릉 사굴산 굴산사지라 하고, 수미산문의 중심사찰을 해주 수미산 광조사지라 하며, 희양산문의 중심사찰을 문경 희양산 봉암사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5교 9산이 원래 한반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삼국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으로서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지역이었다. 
  특히 신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 일부를 차지할 정도로 낙랑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수서에는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부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에는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산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당서에는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와 인접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신라는 변한의 먼 후예이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땅의 크기가)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국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다.   

 

☆ 전한낙랑군의 치소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서 이곳이 바로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다. 따라서 전한낙랑군은 승덕시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낙랑동부도위는 지금의 내몽골 적봉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 비정된다.
  그러다가 전한 말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최리가 그 땅을 차지하고 낙랑국을 세우고 칭왕을 하게 되었는데, 낙랑동부도위는 서기 30년에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빼앗겼고, 낙랑국 역시 서기 37년에 대무신왕에게 멸망하게 되어 옛 왕검성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자 후한 광무제가 서기 44년에 이르러 그 땅을 탈환하고자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전부를 탈환하지 못하고 지금의 하북성 흥륭 일원만을 탈환하여 그곳에 다시 낙랑군을 설치하였는데, 필자는 이를 후한낙랑군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후한낙랑군은 진(晉)나라 때는 서남쪽 지금의 하북성 보정 부근으로 이치하게 된다.(후한낙랑군 부근을 고구려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되었다는 기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의 신라가 한반도 경주 부근이 아니라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요녕성 금주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신라의 북쪽 또는 서북쪽에 있었다는 고구려와 신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백제는 도대체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다는 말일까?
  지금 요녕성 금주시의 서쪽은 하북성 진황도, 당산이고, 서북쪽은 하북성 승덕시이고, 금주시
의 동남쪽은 발해이다.
  기록대로라면 백제의 중심강역이 난하하류 일원이었다는 말이고, 고구려의 중심강역은 승덕시 일원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신라는 660년에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했고, 668년에는 고구려마저도 멸망시킨 후 그 땅의 남쪽 일부를 차지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루었고, 고려는 바로 그 통일신라 땅에서 건국되었으니, 우리 불교의 5교 9산은 바로 그 통일신라 땅과 고려 땅에 처음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통일신라의 중심강역은 원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남부, 진황도시, 당산시, 그리고 요녕성 호로도시 일원이었으므로 우리 불교의 5교 9산은 바로 그곳에 처음 설치되었을 것이고 개산조의 탑비 등도 세워졌을 것인데,  지금 한반도에도 동일한 이름의 절과 절터들이 있고, 개산조의 탑비도 있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서 건국되었고 그 주변의 백제 땅과 고구려 땅을 차지했다가 멸망했다면 그 통일신라 땅을 차지했던 고려 역시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건국되고 그곳에서 멸망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상하게도 조선은 한반도 서울을 중심으로 500년 왕조를 이었다. 
  이는 조선이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이 아닌 대륙의 개경(현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에서 건국되어 한반도 한양(현 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된다.

 

☆ 우리는 지금 고려가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을 도읍으로 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고려의 도읍 개경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조선 태조 이성계는 그곳에서 왕위에 오른 후 도읍을 한양(현 서울)으로 옮김으로써 이때에 이르러서야 한반도가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조선초에 왕조의 중심지가 대륙에서 한반도로 바뀌게 되었을 때, 우리 불교의 5교 9산은 조선 왕조가 도읍을 대륙의 개경으로부터 한반도 한양으로 옮기든 말든 대륙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가 있었을까?
  그럴 리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이때 우리 불교의 5교 9산도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그 중심 사찰을 옮겼을 것이다.
  그들은 한반도에 다시 절을 세우고, 중심 사찰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아주 중요한 것들로서 운반이 가능한 것들은 대륙에서 한반도로 운반해 왔을 것이며, 운반이 불가능한 것은 다시 만들어 세웠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A.D.1398) 5월 10일과 12일 조를 보면,
  "5월 10일 왕이 용산강에 거둥하였다. 대장경의 목판을 강화의 선원사로부터 운반하였다.
  5월 12일 군사 2천으로 하여금 대장경의 목판을 지천사로 운반하게 하였다. 검교 참찬문하부사 유광우에게 명하여 향로를 들고 앞서게 하고 5교 양종의 승려들에게 독경하게 하며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지금 팔만대장경판은 합천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이때 대장경판을 옮긴 것은 한반도의 강화도에서 서울로 옮긴 것이 아니라, 대륙의 강화 선원사로부터 발해와 서해를 건너 한반도 한양의 지천사로 옮겼다는 말이 되는 것이며, 국가적인 대사였기 때문에 왕이 직접 용산나루에 거둥했던 것이고, 지금 한반도에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절들이 삼국시대 건축된 건물은 거의 없고, 대개 조선초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많다는 것은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고 하겠다.

 

☆ 대륙의 강화 선원사는 지금의 난하 중 반가구수고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5교 9산의 중심사찰들도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옮겨 한반도에 있던 절을 접수해 절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어야 했을 것인데, 이때 그 절의 창건 내력만은 대륙에서의 처음 창건 당시 기록을 그대로 전했으므로 우리는 지금 한반도에 있는 5교 9산의 중심사찰들이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으나 지금 한반도에 전해지는 사찰의 대부분은 사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새로 지어진 것들일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우리는 대륙의 땅을 명나라 또는 청나라에게 빼앗기게 되었을 것이고, 조선 시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말하거나 전하지 못했고, 지금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어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이고, 대륙 삼국의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한번도의 지형에 맞추어 해석하려 했던 것이다.
  기존의 고정된 역사 인식의 틀 속에서 볼 때 북경(필자주 : 고대의 요동군이다)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다는 것을 선뜻 믿기 어렵겠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일 수밖에 없다.
  이 비밀을 속 시원히 풀어 설명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아리송한 역사도 바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잃어버린 대륙의 옛 땅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불교의 원래 5교9산의 위치도 정확히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