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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서쪽의 요충 대야성(大耶城)은 한반도 합천에 있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21. 12:35

윤여동설 - 신라 서쪽의 요충 대야성은 한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가야산(우두산) 정상의 소머리 형상 : 요녕성 호로도시 대홍라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6년(A.D.555) 조를 보면,

  "10월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하였다.

  11월 왕이 북한산으로부터 돌아와서 교서를 내려 거쳐온 주와 군의 1년간 납세를 면제하여 주고, 죄수들로서 2죄(반역죄와 살인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하여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북한산(필자주 : 지금 진황도 도산) 부근까지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로부터 90여년 후에 백제 의자왕은 아버지인 무왕이 재위 42년인 서기 641년 3월에 죽자 31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다음 해 2월 주와 군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재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는 단합된 힘으로 백제를 일신하고자 하는 사전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 다음 7월에 이르러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손수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 정벌에 나서 하미후성 등 40여 개 성을 항복시키고는 개선하고, 8월에는 장군 윤충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신라 서쪽의 요충 대야성(大耶城)을 쳐 성을 함락시키고 대야성주 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의 목을 베어 사비로 보내고, 남녀 1천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리며 승전한다.
  그러자 의자왕은 윤충에게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주어 그 공로를 치하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성주인 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를 목벤 것이 백제 멸망을 앞당기는 단초로 작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때 죽은 고타소가 바로 김춘추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고타소는 김춘추와 김춘추의 첫 부인이었던  보라부인 사이에서 출생한 김춘추의 첫 딸이었다.

  그리하여 김춘추는 귀염둥이 고타소를 잘 키워  김품석에게 시집보냈는데, 고타소의 남편인 품석이 신라의 서쪽 변경의 요충인 대야성(大耶城) 성주로 임명되자 따라가 그곳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642년 8월에 이르러 대야성이 백제 장군 윤충이 이끄는 1만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성이 포위되자 성주인 품석은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대야성 안에서 식량 창고가 모두 불타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신라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백제로 도망갔던 모척과 성안의 검일이 공모하여 신라가 전투에서 패하도록 식량을 모두 불태워 버린 것이었는데, 검일이 조국인 신라를 배신하고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던 것은 앞서 성주인 품석이 얼굴이 예쁜 검일의 아내를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검일은 아내를 빼앗아간 성주 품석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먹을 것이 불에 타버린 대야성의 신라군은 쫄쫄 굶어가면서 전쟁을 해야 했으니 며칠이나 견딜 수 있었겠는가?
  결국 대야성은 구원군이 오기도 전에 함락 당하여 성주인 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는 백제군 앞에 끌려나와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때 백제 장군 윤충은 성주인 품석과 그 아내 고타소의 목을 잘라 목은 전리품으로 사비의 의자왕에게 보내고 몸뚱이만 신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신라의 도읍 서라벌에 살고 있었던 고타소의 아버지 김춘추에게도 대야성이 백제군에게 함락 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딸 고타소가 죽고 목이 잘려 사비로 보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그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하루종일 기둥에 기대어 눈도 깜짝하지 않고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모를 정도였다 한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김춘추는 딸의 원수를 반드시 갚겠노라 맹세하고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고구려로, 왜국으로, 당나라로 가서 백제를 칠 군사를 청하게 되고, 결국 660년 당나라군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게 되는 것이다.


  서기 660년 7월 13일 사비성에서 의자왕의 아들 융이 항복하자 법민(후일의 문무왕으로서 죽은 고타소의 이복동생이다)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말하기를 "전에 네 애비가 내 누이를 무참히 죽여 옥중에 묻어 내가 20년 동안 가슴이 아리고 머리를 아프게 했는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다"고 하게 된다.

  이때는 고타소가 죽은 지 18년이 지난 때였는데도 그 동생이 항복한 백제 왕자에게 맨 처음 고타소의 죽음에 관한 원한 어린 말을 했다는 것은 김춘추나 김법민이 고타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얼마나 와신상담했는지를 짐작하게 하고, 또 7월 18일 의자왕이 공식적으로 항복하고 난 이후 첫번째 조치는 모척을 잡아 목베고, 또 대야성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던 검일을 잡아 사지를 찢어 죽여 강물에 던져버리는 일이었다.

   이때 검일의 죄목을 보면 첫째는 모척과 함께 공모하여 식량창고에 불을 질러 온 성중에 먹을 것이 떨어져 패하게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품석과 그의 처를 강박하여 죽였다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백제와 함께 모국인 신라를 공격한 것이라 했다.
  이는 결국 고타소를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검일 너를 죽여 고타소의 원수를 갚겠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렇듯 백제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대야성(大耶城)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신라의 대야성이 한반도 합천에 있는 옛 성이라고 역사를 해석한다.
  그곳에는 옛 성터도 있고, 대야성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죽은 죽죽을 기리는 "신라충신죽죽비"라 새겨진 비석도 있어 그곳이 신라의 대야성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이는 우리의 착각일 뿐 진짜 대야성은 한반도 합천에 있는 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라는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서 건국했고 그곳이 바로 신라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이었고, 금관가야의 건국지 구지봉[필자주 : 요녕성 흥성시 수산(首山)]은 요녕성 흥성시(興城市)에 있고, 또 금관가야의 도읍성이었을 흥성고성도 있다.

  그러다가 신라는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바침으로서 멸망하고 말았다.
  이는 중국 사서들에 신라가 한나라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기록들은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기록이고,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있었다고 했으니 가야 역시 대륙에 위치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며,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난하, 청룡하 부근을 백제로 비정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그 북서쪽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다.
  그런데 642년은 가야가 이미 소멸한 때이니 신라와 백제가 그 땅을 놓고 다투었을 것이다.

  이때 백제와 신라의 국경은 대개 지금의 호로도시, 흥성시 부근이었을 것이고, 이때 백제가 옛 가야의 강역을 거의 모두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서쪽 난하 하류의 백제가 동북쪽 신라의 서라벌[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을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은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시 부근이다. 
  백제 멸망의 단초로 작용한 대야성(大耶城)은 한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시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발상을 전환하고, 역사를 보라. 
  우리의 잃어버린 옛 땅이 발해 건너 그곳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