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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 동해 감포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왕릉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5. 13. 21:56

윤여동설 - 한반도 동해 감포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왕릉이 아니다 - 최초주장

 

 

  서기 681년 6월 문무왕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자신이 죽거든 장례를 호화롭게 치르지 말 것이며, 무덤도 커다랗게 만들지 말고, 서역 법식에 따라 화장하여 간단하게 장례를 치르라고 유언하고는 7월 초하룻날 죽게 된다.
  그리하여 그 아들인 신문왕은 유언에 따라 문무왕의 시신을 불에 태운 후 동해구의 큰 돌 위에 장사 지냈는데,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불렀고, 신문왕은 문무왕이 동해 바닷가에 짓다가 미처 완공하지 못한 감은사를 완공하여 아버지인 문무왕의 능을 수호하고 영혼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조치한다.
  그런데 그 다음해 5월 초하루에 해관인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기를 "동해에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다가 물결에 밀려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일관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켜주고 계십니다" 하였으므로 직접 그곳으로 가서 그 산을 보았고, 그 섬에 있던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는데, 그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날씨가 개이고 바람이 멎고 물결이 잔잔해졌으므로 그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했고, 그 후 사람들은 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었다고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감은사는 원래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처음 창건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게 되자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A.D.682)에 공사를 끝냈는데, 아버지인 문무왕이 용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당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놓아 용이 절에 들어와서 쉴 수 있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신라 30대 문무왕의 능이 한반도 경주 동쪽 동해바닷가 감포에 있는 대왕암이 바로 문무왕의 능이고, 그 부근에 있는 감은사지가 바로 신문왕이 완공한 그 감은사라고 하고 있으며, 왕이 용을 보았다는 곳을 이견대라고 한다.

 

☆ 조선시대에는 한반도 경주 괘릉을 문무왕릉이라 추정했고, 지금 감포의 대왕암을 문무왕릉일 것이라고 하게 된 것은 1967년으로서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신라가 한반도 경주가 아닌 대륙의 요녕성 금주(錦州), 호로도, 하북성 진황도, 당산 일원에서 건국되고 멸망했다면 이러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해석을 달리해야 하고, 지금 한반도의 감포에 있는 대왕암이나 감은사, 이견대는 옛 기록에 따라 어느 사람이 비슷한 위치에 가져다 붙인 이야기에 불과하게 된다.
  몇 년 전에 모 방송사에서 감포의 대왕암이 실제 문무왕의 능인가 하는 것을 밝혀보기 위해 감포 대왕암의 물을 퍼내고 정밀 조사했으나 그곳에서 왕릉으로 추정할 만한 단서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돌을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뚜껑돌 같이 생긴 것도 자연석이 우연히 그렇게 놓여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실제 문무왕이 묻혔다는 대왕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라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錦州) 부근에서 건국되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사킴으로써 강역을 서쪽, 서남쪽으로 조백하 부근까지 넓혔다가 그곳에서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바침으로써 천년 사직을 문 닫았다.

 

☆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은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신라가 낙랑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도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기록들이 있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신라가 한반도 경주에서 건국되었다고 하고,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 북한 평양부근을 말하는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리고 문무왕은 평상시에 말하기를, 자신이 죽은 뒤에는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숭봉해서 나라를 수호하려 한다고 했었고, 그가 죽자 동해 중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지금 중국 요녕성 금주(錦州), 호로도, 하북성 진황도, 당산에서 동해라면 이는 지금의 발해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 역사에서 언급되는 동해란 지금 한반도의 동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해를 말하는 것으로서 문무왕릉은 발해 바닷가의 큰 바위 위에 능을 조성했을 것인데, 비록 문무왕이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 말하고 죽었다 하더라도 아들인 신문왕으로서는 삼국을 통일한 위대한 왕의 치적에 걸맞을 만큼의 환경이 갖추어진 곳을 찾아 격에 맞도록 능을 조성했을 것이다.

 

 [산해관 노룡두 늦가을 풍경]

 

 

  그렇다면 문무왕을 장사지냈다는 대왕석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에서 동쪽으로 가면 산해관에 도착할 수 있고 바닷가로 가면 경치가 아름다운 해변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으로서 노룡두(老龍頭)라 부른다.
  만리장성을 용에 비유하여 산해관 노룡두라는 곳이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신라에서 문무왕의 능을 조성할 장소를 해변가에서 찾았다면 의미있는 이곳을 놓쳤을 리가 없고, 풍광도 아름답다. 
  그리고 문무왕은 스스로 죽어 용이 되고 싶다고 했다.

 

☆ 우리는 강화도 마니산을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두악으로 생각하기도 하나 강화도 마니산은 고조선의 단군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곳이 신성한 곳이라 하여 그곳 제천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기도 하고, 성화를 채화하기도 하니 역사의 착각이 빚어낸 결과이다.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 해신묘 전경]

 

[해신묘 입구]

 

[신라 문무왕 생전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진황도 산해관 해신묘의 해신상] 

 

 

  그런데 지금 노룡두 옆 바닷가에는 "해신묘(海神廟)"라는 사당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신라 30대 문무왕릉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그 곳에는 해신의 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것은 죽어 동해의 용이 되었다는 문무왕의 모습일 것이다.
  물론 지금 세워져 있는 현재의 건물은 청나라 때 중건했다고 하고 전설도 변해있지만 그곳이 바로 신라의 문무왕이 죽자 화장하여 동해 대왕석 위에 장사지냈다는 문무왕릉임에 틀림없다.

 

☆ 독자들께서 산해관 노룡두에 갈 기회가 있거든 바로 옆 해변가에 있는 해신묘에 들러 문무왕의 사당에 인사를 드린다면 아마 그는 우리를 매우 반갑게 맞아줄 것이고, 소원 한가지쯤은 반드시 성취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실 것이다.

      

그런데 그 후예인 우리는 지금 그곳이 신라 문무왕릉인지도 모르고 엉뚱하게도 한반도 동해 감포의 대왕암이 문무왕의 능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우리는 역사를 착각하고 있으나, 착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왜곡된 역사가 왜곡된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왜곡된 역사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하는 것인지 한없이 안타깝고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