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칠지도는 반도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왜왕이 된 그 아들에게 하사한 것이다 - 최초주장
지금 일본의 석상신궁(石上神宮)에는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이 전하고 있는데,
그 칼의 전면에는,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世辟百兵宜供供侯王☆☆☆☆作(태(화)4년5월16일병오정양조백련철칠지도세벽백병의공공후왕****작)" 이라 되어 있는데, 칠지도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와 왕에게 받쳐진 때 그리고 제작자를 금상감으로 새겨 놓았고,
그 칼의 후면에는,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선세이래미유차도백제왕세자기생성음고위왜왕지조전시후세)"라는 명문이 금상감으로 새겨져 있는데, 칼에 글자를 새긴 이유와 받은 사람 그리고 하사한 이유가 적혀 있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 신공황후 섭정 52년 조에 기록되어 있는,
"가을 9월 정묘삭 병자일 (백제의)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와 칠지도(七枝刀) 1구, 칠자경 1면 및 각종 중보를 바치며 '신의 나라 서쪽에 강이 있는데, 곡나의 철산에서 나옵니다. 이곳은 7일을 가도 이르지 못할 만큼 멀지만, 이 물을 마시며 이 산에서 철을 캐어 길이 성조에 바치겠습니다.' 했다."
라는 기록 속의 칠지도(七枝刀)가 바로 지금 석상신궁에 있는 칠지도(七支刀)로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만들어 왜국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학자들은 지금 석상신궁에 있는 그 칠지도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칠지도와 동일한 칼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없고, 명문의 문맥상 상국인 백제가 제후국인 왜국에 하사한 물건이라고 정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렇듯 두 나라가 서로 상반된 해석을 하는 것은, 두 나라간의 자존심에 해당하는 문제로서 당시 어느 나라가 정치적,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는 양직공도 백제국사신의 모습이고, 아래는 양직공도 왜국사신의 모습이다. 어느 나라가 문화적으로 앞섰는지 한눈에 확인이 가능하다. 사신이라는 사람이 맨발에, 둘둘 말아 입은 복장이라? ㅋㅋ]
따라서 이 간단한 명문만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칠지도에 대한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인데, 그에 대한 해석이 그리 간단하지 않고, 날짜를 기록하는 방법이 일반적인 관례에 어긋나게 표기되어 있다.
옛 사람들이 날짜를 기록하는 방법은 10간 12지를 기본으로 하였는데, 연호○년 (년간지) ○월(월 초하루간지) ○일(일간지) ○(시간지) 순으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야만 그 해가 어느 나라 무슨 왕, 몇 년, 무슨 년이며, 몇 월, 몇 일 무슨 날, 몇 시라는 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을 보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년 62세 계묘년 5월 병술삭 7일 임진 붕" 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이 기록을 보고 백제 무령왕(황제)이 서기 523년 계묘년 5월 7일 임진일에 62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칠지도에는 칼을 만든 때를,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정양" 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는데, 태화 4년이라고 하여 년간지를 생략한 것은 그런 대로 이해가 간다 하더라도 월의 초하루 간지가 없고, 병오가 과연 일간지를 말한 것인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대두되는데, 이는 그 명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칠지도 제작시기가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명문을 해석할 때 첫 번째 걸림돌이 되는 것은 태화(泰和)라는 연호이다. 왜냐하면 백제가 존속하던 시기에 "태화(泰和)"라는 연호를 사용한 왕조는 현재까지는 밝혀진 바가 없어 실제로 이 칼이 정확히 언제 만들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사람들 중에는 泰和와 太和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泰와 太의 용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이 죽은 해는 서기 375년 11월인데, 일본서기는 그 해를 신공 섭정 55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 52년이라면 서기 372년이 된다.
따라서 이 때는 백제의 근초고왕(일본서기 원문에는 초고왕 때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일본서기의 찬자들은 백제 5대 초고왕과 13대 근초고왕도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서 연대로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칠지도를 만들어 왜국에 바쳤다는 말이 된다.
☆ 서기 372년은 근초고왕 27년으로서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요서진평현을 빼앗아 차지해 강대국이 된 후 동진(東晋)에 사신을 보내 진동장군 영낙랑태수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받은 때였으므로 가까운 왜국에도 사신을 보내 칠지도를 선물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 전해지고 있는 석상신궁의 칠지도는 근초고왕이 왜국에 선물로 보낸 칠지도는 아니다.
그런데 이 칠지도의 명문이 백제의 장자파와 차자파 간의 왕위다툼과 관련이 있음을 드디어 필자가 밝혀내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 장자파인 근초고왕과 왕위를 놓고 다투었던 차자파의 무광왕이 있는 것이다.
백제 12대 계왕의 태자였던 무광왕은 그 아버지인 계왕이 서기 346년 9월에 죽었을 때 당연히 다음 왕위에 올랐어야 했을 인물인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계왕의 뒤를 이은 왕이 13대 근초고왕으로 기록되어 있고, 무광왕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 무광왕이란 "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密地 新營精舍(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절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의 주인공 무광왕(武廣王)을 말하는 것으로서 30대 무왕과는 별개의 인물이다.
그렇다면 무광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근초고왕에게 왕위를 빼앗겼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자.
무광왕이 그 아버지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면 12대 계왕이 죽은 해 즉 서기 346년 9월쯤일 텐데, 이해가 바로 병오년(丙午年)으로서 칠지도를 만들었다고 하는 병오(丙午)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 해가 병오년이고 태화 4년이라면 그 원년은 서기 343년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해는 백제 11대 비류왕 40년에 해당하는 해이고, 장자파인 비류왕(차자파인 고이왕에게 왕위를 찬탈 당했던 7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은 다음해인 재위 41년 10월에 죽는다.
그렇다면 이 태화라는 연호는 차자파였던 백제의 12대 계왕(10대 분서왕의 장자)이 비류왕이 죽기 전해인 서기 343년에 스스로 칭왕을 하고 연호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비류왕이 죽자 왕위를 찬탈하여 백제의 왕위에 올랐고 346년 병오년 9월에 죽었다고 할 수 있는데, 계왕이 죽기 전인 이 해 5월에 칠지도가 만들어졌고, 9월에 이르러 무광왕이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 바쳐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칠지도가 완성된 날이 5월 16일이라고 했는데, 346년 음력 5월 16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보면 "병오년 6월 21일"이 되므로 칠지도는 서기 346년 병오년 음력 5월 16일(양력 6월 21일) 하지날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칠지도에 새겨진 "병오정양"이라는 의미는 "병오년 하지날"이라는 의미였던 것이고, 옛 사람들은 해가 정남쪽으로 바로서는 하지를 길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서기 346년은 병오년이고, 이해의 음력 5월 16일은 기묘일이며, 양력으로는 6월 21일이었으므로 하지날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칠지도가 완성된 때를 새긴 명문은 "태화 4년 병오 5월 갑자삭 16일 기묘 정양" 이라고 새겼어야 완전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칠지도에는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라고도 새겨져 있는데,
이를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로 끊어서 해석해 보면,
"선세이래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백제왕세자가 응아하고 성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기이하게 태어나/왜왕이 되었으므로/칙지로서 글자를 새겨/후세에 전하여 볼 수 있게 하노라" 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칠지도의 명문은 백제의 왕이 왜왕이 된 백제의 왕세자에게 내려주고자 새겼으며, 이를 자손 대대로 전해 보여주라고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를 무광왕과 연결시켜보면, 아버지인 무광왕은 응아하고 태어났던 자신의 아들이 어느덧 자라서 왜국을 정복하고 왜왕이 되자 무척이나 대견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광왕은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낸 자랑스런 아들에게 무언가 귀중한 것을 선물로 주어 그 공을 치하해 주고, 후손들에게도 그 공을 잊지 않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전에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 공후왕이 당시 최고의 장인을 시켜 정성들여 만들어 바쳤던 칠지도 바로 그 칼에 금으로 글자를 새겨 아들에게 주어 대대손손 전해 보게 한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백제의 왕세자가 성스러운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기이하게 태어나 자라서 왜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신임의 징표로, 무광왕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 공후왕이 정성들여 만들어 바쳤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의미 있는 바로 그 칼에 변하지 않는 금으로 명문을 새겨, 후세까지도 전해 보여줄 수 있도록 하사품으로 내려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을 감안하여 칠지도 명문을 해석해 보면,
泰和 四年 五月 十六日 丙午 正陽
태화 4년(A.D.346) 병오년 5월 16일 하지날에
造百鍊鐵 七支刀
백번을 제련한 쇠로 칠지도를 완성하였다.
世辟百兵
왕이 백병을 거느리고 왕위에 올랐을 때
宜供供侯王☆☆☆☆作
공후왕이 ....를 시켜 만들어 바쳤던 것인데
先世以來未有此刀
선세이래 이러한 칼은 없었다.
百濟王世子奇生聖音
(그런데 그후) 백제 왕세자가 성음을 터트리며 기이하게 태어나
故爲倭王
왜왕이 되었으므로
旨造
칙지로서 글자를 새겨
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노라
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칠지도는 대륙백제의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은 아니며, 반도백제의 무광왕이 왜왕이 된 그 아들에게 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록 속의 왜왕이 곧 왜국의 천황을 말하는지 아니면 왜국의 여러 제후국 중의 한 개 나라 왕이라는 의미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때 백제 무광왕의 아들이 왜국으로 건너가 왕위에 오른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처음 칼이 만들어져 무광왕에게 바쳐졌던 시기와 칠지도에 명문을 새겨 왜왕이 된 백제 왕세자에게 하사한 시기는 어느 정도의 시차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왜국을 정복하고 왜왕이 되었던 백제의 왕세자가 과연 누구를 말하는 지는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일본 성씨 중 많은 성씨들이 백제의 왕 또는 왕족 그리고 귀족들의 후예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는 백제와 왜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비밀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인데, 일본서기 천지천황 2년 9월 7일 조에는, "백제의 주유성(주류성)이 마침내 당나라에 항복했다. 이때에 나라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주유가 항복했다. 이일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서 끊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묘소에 어찌 다시 가볼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한다.
무광왕은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해 365년경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다시 반도백제를 세워 잃어버린 대륙의 백제 땅을 회복하기를 염원하다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당시 반도백제의 도읍이었던 지모밀지 부근에 묻혔을 것인데, 백제 무왕의 능과 선화공주의 능이라 추정하고 있는 익산 쌍능이 사실은 반도백제 무광왕과 그 왕비의 능일 것이다.
그런데 무광왕이 한반도로 건너온 365년경으로부터 무려 110년쯤이 지난 479년에 이르러서야 무광왕의 염원이 이루어져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고 그의 후손들이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동성왕으로부터 그 후의 백제왕들이 바로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들이다.
백제가 장자파와 차자파 간의 왕위 다툼, 분국, 통합의 과정을 거쳤음을 알아야 하고, 대륙백제와 반도백제가 북경 부근과 한반도에 멀리 떨어져 존재했음을 인식해야 하며,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바로 대륙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만이 비로소 비밀로 가득 찬 백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칠지도는 서기 346년 병오년 하지날에 완성되어 무광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 받쳐졌던 칼이었고, 무광왕은 다시 그 칼에 글자를 새겨 왜왕이 된 그 아들에게 신임의 증표로 하사한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