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김수충 그는 신라 어느 왕의 왕자인가? - 최초주장
삼국사기에 그 이름과 신라왕자라고 신분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과연 어느 왕의 왕자인가에 대하여 논란을 빚고 있는 사람이 바로 김수충이다.
그가 성덕왕 13년인 서기 714년에 당나라로 들어가 숙위했다는 기록이 있어 김수충이 성덕왕의 장자였다고 주장하는 성덕왕장자설이 있으나, 모든 상황을 정밀하게 검토해 본 결과 필자는 그가 효소왕의 유복자였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신라 32대 효소왕은 31대 신문왕의 맏아들 이홍(理洪)으로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7년(A.D.687)조에, "봄 2월에 맏아들이 태어났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효소왕은 서기 687년에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또 신문왕 11년(A.D.691)조에, "봄 3월 1일 왕자 이홍을 태자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32대 효소왕 원년(A.D.692) 조에는,"효소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이요. 신문왕의 태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33대 성덕왕 원년(A.D.702)조에, "성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이요 신문왕의 둘째아들이다. 효소왕의 동복동생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라는 기록을 검토해 볼 때 효소왕이 죽었을 때 아들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효소왕이 죽었을 때까지도 김수충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면 김수충은 효소왕의 동생이었던 33대 성덕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있을까?
그러나 동복 형인 효소왕이 687년 2월에 태어났으므로 성덕왕은 아무리 빨라도 서기 688년에야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고, 성덕왕이 15세쯤은 된 702-703년 쯤이 되어야 아들을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덕왕은 704년에 이르러서야 첫 혼인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성덕왕에게는 두 명의 왕비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 1 비인 엄정왕후(嚴貞王后 또는 陪昭王后[배소왕후]라고도 한다)
제 2 비인 소덕왕후(炤德王后)가 그들이다.
제1비인 엄정왕후는 성덕왕 3년(A.D.704) 5월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아 장자인 중경을 낳아 왕 14년(A.D.715)에 태자로 봉했으나 왕 16년(A.D.717)에 이르러 태자가 요절하고 만다.
제2비인 소덕왕후는 성덕왕 19년(A.D.720) 3월에 이찬 순원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으며, 성덕왕의 2자 승경(承慶, 34代 孝成王), 3자 헌영(憲英, 35代 景德王)그리고 이름미상의 4자인 왕자 1명 등 3명의 아들을 낳고는 성덕왕 23년(A.D.724) 12월에 죽는다.
따라서 이 내용을 도표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성 덕 왕 (재위:A.D.702-7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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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비 제2비
엄정왕후 소덕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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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승경 헌영 ?
(요절) (34대 효성왕) (35대 경덕왕) (실명)
A.D.717년 6월
그런데 성덕왕 15년(A.D.716) 3월 조를 보면 느닷없이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데 비단 500필, 밭200결 벼1만석 집 한 구역을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옛 집을 사서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를 매우 헷갈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성정왕후는 과연 어느왕의 왕비였던 것이며, 그녀는 무슨 이유로 궁에서 나가야 했던 것일까?
어느 사람은 성정왕후가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혼인했던 첫 부인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무언가 죄를 짓게 되어 폐출되었고 그녀의 아들인 김수충도 그러한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죄를 짓고 출궁을 당했다면 그 많은 재물을 주어 궁에서 내 보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어 그녀가 성덕왕의 형이었던 효소왕의 왕비였고, 효소왕이 죽었을 때 임신 중에 있었고 그후 왕자인 김수충을 낳았다면 신라 왕실에서는 그녀에 대한 예우를 어떻게 해야했을까?
일반적으로 효소왕이 죽었을 때 효소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효소왕의 동생이 왕위에 임시로 올랐다가 효소왕의 아들이 성장한 후 그를 태자로 봉했다가 그에게 왕위를 돌려 주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효소왕의 동생이었던 성덕왕은 왕위에 올라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봉해 왕위를 물려주려고 기도하게 된다.
형의 아들인 김수충이 걸림돌이 되자 성덕왕은 그를 714년에 당나라로 숙위보내고 715년 12월에 이르러 자신의 장자인 중경을 태자로 책봉하고, 716년 3월에 형수인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때 성정왕후는 아마 그러한 조치에 심하게 반발했을 것이나 어쩔 수 없이 궁에서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김수충에게 한번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이는 717년 6월에 이르러 태자로 책봉되었던 중경이 요절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신라에는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그러자 김수충의 어머니인 성정왕후는 그때까지도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아들인 김수충을 9월에 이르러 급히 귀국시키게 된다.
자신의 아들인 김수충을 태자로 책봉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김수충은 702년에 태어나 13세인 714년에 당나라에 숙위로 가게 되었고,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16세의 어엿한 청년이 되어 귀국했다.
그러나 성덕왕은 태자 자리가 비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장조카인 김수충을 태자로 봉하지 않고, 720년에 이르러 다시 소덕왕비를 맞아들여 아들을 낳은 후 자신의 나이 어린 아들 승경을 태자로 봉하는 것이다.
기록을 확인해 보면,
성덕왕 16년(A.D.717년) 6월, "태자 중경이 죽었다. 시호는 효상이다"라는 기록과
9월 조의, "가을 9월 당나라에 들어갔던 대감 김수충이 돌아왔는데 문선왕(공자)과 10철 72제자의 초상화를 바치매 즉시 대학에 비치하였다(秋九月 入唐 大監 守忠 廻 獻 文宣王 十哲 七十二弟子圖 卽置於大學)" 라는 기록,
그리고 성덕왕 23년(A.D.724년) 조의, "봄 왕자 승경을 태자로 삼았다" 라는 기록과
효성왕 원년 조의, "효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경이요. 성덕왕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이다" 라는 기록은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김수충은 성덕왕의 아들이 아니라 사실은 효소왕의 유복자 아들이었던 것이다.
즉 수충은 효소왕과 성정왕후 사이에서 입태되었으나 효소왕이 죽었을 때 아직 태어나지 못했다가 효소왕의 동복동생인 성덕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야 태어났다.
따라서 김수충은 서기 702년쯤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수충이 성장한 후에도 성덕왕은 왕위 계승서열 1위였을 형(효소왕)의 아들인 수충을 태자로 봉하지 않은 채 당나라에 숙위를 보낸 후 자신의 장자였던 중경을 태자로 봉하자 효소왕비였던 성정왕후는 어쩔 수 없이 출궁하게 되었고, 성덕왕은 형수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 내보냈던 것이다.
뒤에 성덕왕의 태자로 봉해졌던 중경이 요절했고, 당나라에 갔던 수충이 귀국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에도 성덕왕은 자신의 혈손으로 왕위를 잇겠다는 집념으로 다시 소덕왕비를 맞아들여 아들을 낳아 그 소생으로 태자를 봉했는데, 그가 바로 34대 효성왕 승경이었다.
김수충은 그 아버지 효소왕이 몇년만 더 살았더라면 신라의 왕위에 오를 인물이었으나 불운하게도 그가 태어나기 몇달전에 그 아버지 효소왕이 일찍 죽는 통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비운의 신라왕자였다.
김수충의 행적은 이후의 기록에서는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던 것일까?
# 김수충이 중국 안휘성 구화산 화성사에서 등신불이 된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지장왕보살 김교각 스님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지 김수충이 아니다.
아마 김수충은 그 후 금성에서 멀리 떠나 신분을 숨기고 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