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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윤여동 2008. 5. 20. 23:55

윤여동설 - 백제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삼국시대 왕릉 중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이 밝혀진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 내부]

 

  백제 역사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는 비밀의 역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어 낙양 북망산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의자왕 이외에는 그 왕릉들의 조성 위치에 대해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왕릉의 조성위치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절요 현종 8년(A.D.1017) 12월 조를 보면, "교서를 내려 고구려, 신라, 백제왕의 능묘는 모두 소재지의 주와 현으로 하여금 수리하게 하고, 땔감을 베는 것을 금하고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도록 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까지 삼국 왕릉들을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 백제 왕릉들도 최소한 이때까지는 잘 관리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백제왕릉 중 오직 한반도 충남 공주에서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의 주인공만을 정확히 알뿐 나머지 백제왕릉들의 조성 위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데, 필자는 우리가 백제 왕릉들을 찾지 못하는 것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록인 삼국사기를 한반도에서의 기록으로 잘못 알고 한반도에서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 왕릉들을 찾았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백제의 역사는 왕위찬탈, 분국, 통합의 역사였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나라를 건국한 후 7대 사반왕까지는 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며 왕위가 이어졌는데, 8대 고이왕이 조카인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장자파와 차자파 간에 피비린내 나는 왕위찬탈전이 시작된다.

 

☆ 삼국사기에는 8대 고이왕을 4대 개루왕의 둘째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오기이고, 사실은 개루왕의 둘째아들 구태의 손자로서 7대 사반왕의 7촌 재당숙부되는 사람이었다.

 

  고이왕이 왕위를 찬탈하여 그 아들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으로 이어졌으나 7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인 장자파의 11대 비류왕이 왕위를 찬탈하여 왕위를 장자파로 돌리자 다시 차자파인 분서왕의 아들 12대 계왕이 차자파로 왕위를 되돌리고, 장자파인 비류왕의 아들 13대 근초고왕이 다시 장자파로 왕위를 돌리게 된다.
  그러자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과 근초고왕 사이에 왕위를 놓고 다툼이 벌어져 20여년 간 내란으로 번지게 되는데, 결국 장자파의 근초고왕이 승리하여 장자파는 대륙백제의 왕위를 이어가게 되고, 패한 무광왕은 대륙을 떠나 한반도의 지모밀지에 도읍을 정하고 다시 반도백제를 세워 대륙백제와는 별개로 왕위를 이어가게 된다.

 

☆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의 백제 무광왕을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 무왕과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무광왕과 무왕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무광왕은 12대 계왕의 아들이고, 30대 무왕은 24대 동성왕의 고손자로서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그러다가 100여년이 지난 대륙백제 개로왕과 반도백제 모도왕 때에 이르러 두 백제의 통합을 추진하게 되는데, 문주왕, 삼근왕을 지나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인 동성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름으로써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백제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대륙백제의 기록이고, 반도백제의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대륙백제의 도읍을 찾고 왕릉의 위치를 도읍과 연결시켜 찾아보는 방법밖에는 별 도리가 없고, 반도백제의 왕릉은 한반도에서 흔적을 찾아 추정해보는 수밖에 없다. 
  

 

  백제의 건국시조인 온조왕의 능은 온조왕이 기원전 18년 위례성에서 나라를 건국했다가 기원전 5년에 남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죽었으므로 능은 남한성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인데, 위례성이나 남한성은 한반도의 서울, 광주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중류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온조왕의 능은 한반도가 아닌 난하 중류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서울의 석촌동고분을 백제 초기의 왕릉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백제는 4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한반도로 진출했기 때문에 그 이전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백제와 연관시켜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을 백제초기 도읍성으로 보려는 시도도 물론 잘못된 것이다. 


  2대 다루왕, 3대 기루왕, 4대 개루왕, 5대 초고왕, 6대 구수왕, 7대 사반왕, 8대 고이왕,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 11대 비류왕, 12대 계왕의 능 역시 당시 대륙백제의 도읍이 남한성이었으므로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중류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고, 
  13대 근초고왕의 능은 근초고왕이 서기 371년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며 승리하여 요서 진평현(지금의 하북성 탁주시 부근)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후 도읍을 한성(북한성)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죽었으므로 근초고왕의 능은 한성(북한성) 부근에 조성했을 것이다.
  한성(북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그 위치를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도산(都山) 남쪽으로 비정된다.  
  14대 근구수왕,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의 능도 그때까지 대륙백제의 도읍이 한성(북한성)이었고, 17대 아신왕은 한성 별궁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대륙백제의 도읍 한성(북한성)에 정궁과 별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한성(북한성)은 근초고왕이 남한성으로부터 옮긴 곳을 말하고, 한성별궁은 옛 위례성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호태왕 비문에 영락 6년인 396년에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고 포위되어 항복했었다는 대륙백제의 도읍성은 한성(북한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7대 아신왕, 18대 전지왕,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역시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한성 부근에 묻혔을 것이고, 
   21대 개로왕은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왕도한성(王都漢城)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성에서 빠져나가려다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었는데,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22대 문주왕은 때가 비록 도읍을 함락 당하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혼란기였지만 개로왕의 시신만은 거두어 어디엔가 능은 조성했을 것이다.

 

☆ 삼국사기는 22대 문주왕이 21대 개로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오기이고 사실은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다.

 

  다만 능을 한성에 조성했는지, 새로 옮긴 도읍 웅진으로 시신을 운구하여 조성했는지는 잘 알 수 없는데, 이는 수서 고(구)려전에,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도읍지였던 곳으로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르고 신라와 매번 서로 침탈하는 전쟁으로 쉴 틈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보면 고구려는 이때 대륙백제의 도읍인 한성을 빼앗아 일정기간 동안 고구려의 강역에 포함시키고 평양성을 도읍으로 하고 국내성과 한성은 소경으로 활용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22대 문주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개로왕이 죽고 한성이 함락되자 475년 10월에 왕위에 올라 도읍을 웅진으로 급히 옮겨야 했고, 그는 그곳에서 죽었는데, 이는 개로왕이 추진하다가 마무리하지 못한 두 백제의 통합을 다시 추진했기 때문에 그에 반대하는 해씨들은 반도백제의 태자로서 대륙으로 건너와 있던 곤지를 먼저 죽이고 이어 문주왕 마저 시해하게 된다.
  따라서 문주왕의 능은 웅진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중류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23대 삼근왕은 문주왕의 아들로서 해씨들이 문주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렸는데 왕위에 오를 때 13세에 불과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반도백제의 모도왕은 자신의 아들인 곤지가 대륙에서 해씨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외척인 진씨들에게 해씨들의 타도를 명하게 되는데, 이때 삼근왕도 함께 제거되었던 듯 하다. 
 

  시절이 하수상하던 시기였지만 능만은 대륙의 웅진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24대 동성왕은 해씨들에 추대되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삼근왕이 제거되자 그 할아버지 반도백제 모도왕의 명에 따라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반도백제 모도왕의 둘째 손자였고, 죽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었다.
  동성왕은 처음에는 정치를 잘하여 통합된 두 백제의 힘으로 북위와의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에서도 통쾌하게 승리하여 대륙백제의 강역을 옛 근초고왕 때와 같이 넓혔다고 생각되는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강변에 임류각을 호화롭게 짓고 연회를 베풀고,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기르고, 사냥을 즐기는 등 정치를 등한시하게 되어 결국에는 신하에게 시해 당하여 죽게 된다.
  그런데 동성왕의 능을 어디에 조성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산동반도 부근에 동성왕의 능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동성왕이 죽은 대륙에 능을 조성했다면 웅진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중류 부근에 조성했을 것이고, 동성왕의 고향인 한반도에 조성했다면 충남 공주 부근에 조성했을 것이다.         
  25대 무령왕의 능은 한반도의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었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오기이고 사실은 동성왕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동성왕과 무령왕은 다 같이 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은 곤지의 제1부인의 다섯아들 중 둘째아들이었고, 무령왕은 곤지의 제2부인(원래 개로왕의 왕비였는데 곤지와의 사이에 무령왕을 임신하게 되자 개로왕이 이 여인을 곤지에게 주었다)이 낳은 아들로서 위로 제1부인 소생인 5명의 이복형들이 있었다.
  무령왕은 이복형인 동성왕의 뒤를 이어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다가 죽었는데, 그의 능이 대륙이 아닌 한반도 충남공주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무령왕은 죽으면서 고향인 반도백제에 묻히기를 원했던 듯 하다. 그리하여 대륙 웅진에서 무령왕이 죽자 그곳에서 육탈시킨 후 뼈를 간추려 한반도로 가져와 충남 공주에 능을 조성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6대 성왕은 대륙의 웅진에서 그 남쪽 사비로 도읍을 옮겼는데, 사비는 충남 부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난하 중류에 위치했던 웅진의 바로 남쪽에 위치했었다.
  그런데 성왕은 대륙백제의 전선에서 고생하고 있는 태자 위덕을 위문, 격려하러 가다가 그 정보를 입수한 신라군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급습하는 통에 죽게되었고, 목은 잘려 신라로 보내졌다고 하는 비운의 왕이다.
  그의 능이 어디에 조성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는데, 그 아버지인 무령왕의 능이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었고, 성왕의 맏딸이 사리를 공양하고, 성왕의 아들인 창왕(위덕왕)이 세운 것으로 생각되는 탑의 석조사리감과 금동대향로가 충남 부여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혹시 성왕의 능도 충남 부여에 조성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목 없는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절을 세웠을 것이다.     
  27대 위덕왕의 능도 한반도 충남 부여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원래 고향은 한반도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위덕왕은 대륙이 아닌 한반도 충남 부여에 그 아버지 성왕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절을 지었던 것이고, 또 일찍 죽은 아들들을 위해서도 부여에 절을 지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위덕왕의 능 역시 충남 부여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8대 혜왕, 29대 법왕은 무령왕의 후손들이었고, 30대 무왕은 동성왕의 고손자로 보이는데, 이들의 능이 사비에 조성되었다면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중류부근의 난현(난주)에 조성되었을 것이나 그 선왕들의 능이 한반도 충남 공주와 부여에 조성되었다면 이 왕들의 능 역시 한반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 한반도 충남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 등이 그 흔적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31대 의자왕은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의 장안으로 끌려가 죽어 손호, 진숙보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들과 나란히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낙양의 북망산에 묻혔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반도백제의 왕릉들도 한반도 어디엔가 조성되었을 것인데, 반도백제의 건국시조인 무광왕의 능은 그가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찬탈전에서 패하고 한반도로 와서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다시 나라를 세웠다가 그곳에서 죽었을 것인데, 지모밀지가 전북 익산 금마 왕궁리로 비정되므로 무광왕의 능은 익산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지금 익산 쌍릉이 바로 무광왕과 그 왕비의 능이 아닌가 싶고, 논산시 연무대에 있는 견훤왕릉이라는 곳도 후백제 견훤왕의 능이 아니라 사실은 반도백제 어느 왕의 능이 후백제 견훤왕릉이라고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이 많다.

 

☆ 견훤은 한반도에서 후백제를 건국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 진황도 일원을 차지하고 후백제를 세웠다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부한 후 황산의 어느 절에서 죽었으므로 그의 능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중,하류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백제를 통합하고 사실상 황제의 위치에 있었으며, 곤지의 아버지이고, 동성왕과 무령왕의 할아버지였던 반도백제 모도왕의 능과 무령왕의 큰형이었던 반도백제 남제왕의 능은 과연 어디에 조성되었을까?
  지금 충남 공주 남쪽 ○○리에는 백제 왕릉이 있었고, 그 앞에 비석도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그 동네 사람들이 동네가 관광지로 개발되는 것을 싫어해 비석을 빼내어 땅 속에 묻어버렸다고 하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니 눈여겨 볼 일이다.
  필자가 직접 그곳에 가서 백제왕릉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위치와 비석이 묻혔다는 장소를 알아보았는데, 지금 그 동네에 사시는 분의 집에 당시 땅 속에 묻어버렸다고 하는 망주석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국에서는 그 진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그 백제왕릉 앞에 세워졌던 비석이 지금도 땅 속에 묻혀 있다면 이는 반도백제의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발굴을 위해 정확한 위치를 알고자 한다면 필자에게 연락하면 된다.(문화재 보호를 위해 공개적으로 그 위치를  말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