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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비밀을 밝혀줄 고려도경 - 최초공개

윤여동 2007. 10. 25. 09:09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비밀을 밝혀줄 고려도경 - 최초공개

 

[이글은 윤여동 밝힘 "고려와 조선 역사의 특급비밀" 책에서 발췌한 것임]

 

  송나라 휘종 때 사람인 서긍이 서기 1123년 사신 일행으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서 쓴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의 위치에 대하여,
 “고려는 남쪽은 요해, 서쪽은 요수까지이고, 북쪽(사실은 서북쪽)은 거란 옛 땅, 동쪽(사실은 동북쪽)은 금나라와 접했다. 그리고 일본, 유구, 담라, 흑수, 모인 등의 나라와 개의 이빨과 같이 서로 맞물려 있다.
  신라와 백제가 자신들의 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병합이 되었으니 현재의 나주와 광주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고려는 우리 송나라 수도(당시 송나라의 도읍은 개봉이었다)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에서 육로를 거치고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고려 국경까지 가는데 총 3,790리(필자주 : 개봉에서 고려 개경까지의 거리를 말한다)이다.
  바닷길로는 하북, 경동, 회남, 양절, 광남, 복건 등이 있는데 모두 왕래가 가능하다. 지금 나라를 세운 곳은 등주(登州), 내주(萊州), 빈주(濱州), 체주와 정확하게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도경이 말해주는 고려의 위치]

 

                거란 옛 땅                                금나라
                                        

 

 

         요수                        고려                       

 

 

                          일본 유구 담라 흑수 모인


  그런데 나라끼리 개의 이빨같이 맞물려 있다는 것은 육지로 연결되어 있을 때 쓰는 말이다. 최소한 산맥이나 강 등으로 국경 지어져 있을 때 쓰는 말이지 한반도와 일본 또는 한반도와 오키나와 같이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를 개의 이빨같이 서로 맞물려 있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고, 고려가 등주, 내주, 빈주와 정확히 마주보는 곳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등주란 지금의 산동반도 끝 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내주는 산동성 내주시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발해의 내주만에 접해 있고, 빈주는 산동성 빈주시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 지금의 황하구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등주, 내주, 빈주와 정확히 마주보는 위치에 있었다는 고려는 과연 어디에 있었다는 말일까?
  지금 등주와 마주볼 수 있는 곳은 한반도 개성 부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등주, 내주, 빈주 이 세 지역과 동시에 정확히 마주볼 수 있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북쪽으로 발해건너편 창려 부근의 만리장성이 시작되고 있는 산해관 부근이다.  

 

☆ 원사 고려 전에는,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해졌던 땅이다. 그리고 부여의 별종으로서 일찍부터 살았던 땅이기도 하다. 그 땅이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백제에 이르는데 모두 큰 바다를 건너야 한다. 서북쪽(서쪽의 오기?)으로는 요수를 지나 영주에 인접하고 말갈이 그 북쪽에 있다.
  그 나라의 도읍지는 평양성으로 곧 한나라 낙랑군이다. 말갈의 백산에서 시원하는 강을 압록강이라 부르는데, 평양은 그 동남쪽(동북쪽의 오기?)에 위치하여 이를 믿고 의지하면서 요해지로 삼았다. 뒤에 땅을 더욱 넓혀 옛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세 나라를 통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 임금의 성은 고씨로 처음 나라를 세워 당나라 건봉 초기에 이르러 나라가 망했다. 수공 이후 자손들이 다시 그 땅에 봉작되어 차츰 자립했다. 5대 시대 때에 이르러 고씨를 대신하여 그 나라의 임금이 되어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사람의 성은 왕씨이며, 이름은 건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명사 조선 전에는,
  “조선은 기자에게 봉한 나라였다. 한나라 이전에는 조선이라 하였다. 앞서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점거되어 있었으나 한 무제가 이를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토의 4군을 설치하였다.
  한 나라 말기에 부여 사람 고씨가 그 땅을 차지하여 국호를 고려로 고쳤다. 고구려라고도 하고, 평양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곧 낙랑 땅이었다. 그 후 당나라에 격파되어 동쪽으로 옮겨갔다.
  후당 때 왕건이 고씨를 대신하여 신라, 백제의 땅을 겸병하고 송악으로 옮겨 (금성을) 동경이라 불렀고, 평양은 서경이라 하였다. 그 나라는 북쪽(서북쪽)으로 거란과 인접하였고, 서쪽(동북쪽의 오기?)에는 여직, 남쪽(동남쪽)에는 일본이 있었다. 원나라 지원 연간에 서경이 내속되자 동녕로총관부를 설치하고 자령(慈嶺: 자비령)까지를 경계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고려도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이나 유구, 담라, 흑수, 모인 등도 모두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고려와 가까이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고려도경은 서긍이 사신 일행으로 고려로 올 때의 실제 준비과정, 고려로 올 때의 항로와 일자별 항해기록, 고려 도착 후 보고들은 것들, 귀국시의 일자별 항해기록 등을 기록하고 자기가 본 것을 그림으로 그려 송나라로 돌아간 후 책으로 엮어 황제에게 바쳤다는 것으로서 당시 사람들이 아주 잘 만들어진 책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를 보면 당시 사람이 직접 고려까지 와서 보고들은 것을 기록한 고려도경의 기록은 고려에 대하여 기록한 후대의 어느 기록보다도 정확할 것이므로 고려도경 속의 기록은 의심 없이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고려도경이 고려가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고 등주, 내주, 빈주와 정확히 마주보는 위치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면 실제 고려가 낙랑 땅을 차지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지금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의 서북쪽 승덕시에는 청나라 때 청나라 황제들이 여름철에만 북경의 무더위를 피하여 임시 행궁으로 사용했다는 열하행궁(피서산장이라고도 한다)이라 부르는 아주 큰 성이 있다.
  그 성은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았고, 정문은 여정문(麗正門)이라 하고 그 반대편에는 서북문(西北門)이라 부르는 문이 있다. 그리고 그 성 옆을 바로 흐르는 강의 이름은 지금 난하의 지류인 무열하(武烈河)이며, 성 밖에는 외팔묘(外八廟)라 부르는 절들이 있다.
  옛날 한 무제의 명령을 받고 위만조선을 침공했던 육군의 순체는 요동(현 북경 부근)에서부터 군사들을 이끌고 압록강(밀운수고)을 건너고 살수(현 고북구를 지나는 조하), 패수(현 난하)를 건너 왕검성(현 승덕시 부근)의 서북쪽을 포위했고, 해군인 양복은 지금의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발해를 건너 패수(현 난하)를 타고 올라가 왕검성의 남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양복이 산동반도에서 우리가 지금 왕검성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반도의 평양으로 오기 위해서는 발해를 건널 게 아니라 서해(황해)를 건너 대동강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양복은 분명히 발해에 배를 띄웠다고 사기나 전한서에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A.D.247) 조에는,
  “봄 2월 왕이 환도성은 병란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다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집이라고도 하고 혹은 왕이 도읍을 했다 하여 왕검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옛 왕검성이 곧 고구려의 평양성임을 알게 하는데,
  신당서는 평양성에 대하여,
  “그 나라의 왕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인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 경사(현 서안)에서 5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에 닿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당서 역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왕검성도, 평양성도 그리고 고려도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의 열하행궁(피서산장)이 있는 승덕시 부근이 바로 우리 고조선의 왕검성, 낙랑군의 치소,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성이며, 성 밖의 외팔묘는 광개토대왕 때 지었던 아홉 개 절의 흔적으로 보이는 절들이다.

  또한 순체가 포위했던 왕검성의 서북쪽은 바로 지금 열하행궁(피서산장)의 서북문 쪽을 포위했다는 말이며, 양복은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승덕시의 열하행궁을 공격하기 위하여 서해(황해)가 아닌 발해를 건너야 했고, 난하를 타고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서들이 고려가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평양성을 도읍지로 삼았다고 한 것은 고려 역시 옛 왕검성이요 평양성이었던 지금의 승덕시 부근에 도읍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패수는 지금의 난하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서의 기록들은 한결같이 고려의 도읍이 평양성이고, 옛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려도경 역시 고려 국성(도읍)의 위치에 대하여 “고려는 당(唐) 이전부터 대체로 평양에 도읍했다. 평양은 본래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고, 당 고종이 세운 도호부(안동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당나라의 기록을 참고하면 평양성은 압록수의 동남쪽(동쪽의 오기?)에 있는데, 당나라 말기에 고려의 군장들이 누세에 걸친 병란을 염려하여 점점 동쪽으로 옮겼다.
  지금의 왕성은 압록수의 동남쪽 1천여 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옛 평양은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가 직접 평양성에 도읍했던 것이 아니라 평양성 부근에 도읍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도경 해도편을 보면,
  당시 송나라 사신 일행이 출발한 곳은 옛날 명주로 불렀다는 지금의 절강성 영파라고 하는데, 사신 일행이 탄 배가 백수양이라는 곳을 통과하고 황수양을 통과하며 또 흑수양을 통과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황수양은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서 물빛이 혼탁하고 짙다고 기록하고 있고 바다 깊이가 낮아 배의 밑바닥과 닿을까봐 항해하는데 애를 먹을 정도로 낮은 바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중국의 영파에서 한반도를 향하여 항해한다면 황하구를 지날 필요가 없이 그곳에서 동북쪽으로 곧바로 항해하면 제주도나 목포쯤에 도달할 수 있고, 그 후에는 한반도 서해안의 연안항로를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면 개성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서긍은 분명히 자기들이 고려를 가면서 황하구를 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고려도경의 기록은 영파로부터 한반도를 향해서 항해했던 기록이 아니라 평양성이었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했던 고려의 도읍 개경을 향해서 항해했던 기록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서긍은 영파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항해하여 산동반도를 돌아 발해로 진입하여 지금의 당해 남쪽 섬들이 밀집해 있는 군산도를 통과하여 난하를 타고 올라가 승덕시 부근으로 갔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난하를 타고 올라가다가 보면 만리장성이 지나는 곳에 반가구수고가 있고 그 동북쪽에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寬城縣 : 관성만족자치현)이 있는데,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으로 비정되는 곳이고, 관성의 동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은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로 비정되는 곳이며, 북한산으로 비정되는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 부근은 백제의 위례성, 한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며, 관성의 서북쪽 승덕시는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고려는 통일신라 땅을 차지했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고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결국 고려는 옛 고구려, 백제, 신라 땅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서긍 일행은 절강성 영파를 출발하여 한반도로 온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 항해하여 중국 동해안을 타고 올라와 산동반도를 돌아 발해로 진입한 후 발해를 건너 지금의 난하를 타고 올라가 하북성 관성현에 도착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고려도경은 고려의 국성이,
  “성의 주위는 60리이며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모래와 자갈이 섞여 있는데 그 지형에 따라 쌓았다. 성의 바깥쪽에는 참호(해자)가 없고, 성 위에는 담장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낭무처럼 나란히 집들을 두었는데, 적의 동태를 살피는 망루와 비슷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해석하려 했다. 따라서 고려도경이 말하는 고려의 국성이 지금 황해도 개성에 있는 성터를 말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함으로써 고려의 역사 역시 한없이 왜곡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옛 기록들을 억지로 한반도로 끌어들여 해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놓고 보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쉽게 밝혀낼 수 있는데도 그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참고] 
고려도경(高麗圖經) 중 해도(海道) 편

 

  선화 4년(A.D.1122) 임인년 봄 3월
급사중 오윤적과 중서사인 부묵경을 국신사와 부사로 임명하여 고려에 가도록 명했다.
  가을 9월 고려왕 우(예종)가 죽으니 황제의 뜻을 받아 제전과 조위의 임무를 띠고 가게 했는데, 이는 원풍 연간의 고사에 따른 것이다.

 

  선화 5년(A.D.1123) 봄 2월 18일 임인일
  장비와 배를 재촉하여 갖추었다.

 

  2월 24일 무신일
  조칙으로 예모전에 가서 예물을 살폈다.

 

  3월 11일 갑자일
  동문관에 가서 경계해야 할 일들을 들었다.

 

  3월13일 병인일
  황제가 숭정전의 마루에 친히 나와 몸소 전지를 주며 선유했다.

 

  3월14일 정묘일
  영녕사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이날 배를 타고 변경(?京: 현 개봉)을 출발했다. 

 

  5월3일 을묘일
  배가 사명(四明)에서 머물렀다.
  이에 앞서 황제(송나라 휘종)의 명령으로 건조된 두 척의 신주(神舟)와 여섯 척의 객주(客舟)가 함께 출발했다.

 

  5월13일 을축일
  예물을 받들어 8척의 배에 나누어 실었다.

 

  5월14일 병인일
  공위대부 상주관찰사 직예사전 관필을 보내 조칙을 내리고 명주의 청사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5월16일 무진일
  신주가 명주(明州)를 출발했다.

 

  5월19일 신미일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했다.
  앞서 중사 무공대부 용팽년을 보내 총지원에게 7일 낮과 밤 동안 도량을 열었다.
  이에 어향을 내려 현인조순연성광덕왕사에서 기원하니 신물이 출현했다.
  모양은 도마뱀 같았는데, 실제로는 동해의 용이었다.
  사당 앞 10여 보 쯤에 은강(?江)이 끝나는 곳에 바다 속에서 산 하나가 솟구쳤는데 산 위에 작은 부도가 있다.  
  옛날부터 항해하는 배에서 이 산을 바라보면 그곳이 정해(定海)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초보라 이름 했다.
  이곳이 비로소 바다로 나아가는 입구이다.

 

  5월24일 병자일
  여덟 척의 배가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며 차례로 배를 풀고 출발했다.
  중사 관필은 초보산에 올라 어향을 피우고, 바다를 바라보고 재배했다.
  이날 날씨가 쾌청했다.
  사시(오전 9~11시)에 동남풍을 타고 돛을 펼치고 노를 저으니 물살이 급하여 꾸불꾸불 나아갔다.    
  호두산을 지나니 항구에 있는 칠리산이 물에 잠긴 것 같다. 
  호두산은 그 모양을 본떠 이름 지은 것이다.
  그곳을 헤아려보니 이미 정해에서 20리 거리였다.
  강물 빛이 은강과 다르지 않았는데 다만 맛이 약간 짠 편이었다.
  모든 냇물이 이곳으로 모이므로 항상 맑지 않은 것이다. 
  호두산을 지나 수십 리를 가면 교문에 이른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 두 산이 마주보고 있는데, 그 사이 물길로 배가 통과할 수 있는 곳을 모두 문이라고 한다.
  교문은 교룡과 이무기가 머무는 곳이라고 하는데, 삼교문이라고도 한다.
  이날 신시말(오후 5시경)에 멀리 대사산과 소사산을 바라보며, 송백만을 지나 노포에 도착하여 닻을 내리고 여덟 척의 배가 함께 정박하였다.

 

  5월25일 정축일   
  진시(오전 7~9시)에 사방의 산이 안개로 덮였고, 서풍이 불어 돛을 펼치니 바람의 영향 때문에 꾸불꾸불 가느라 항해가 매우 느렸다.
  뱃사람들은 이를 구풍이라 하였다.
  사시(오전9~11시)에 안개가 흩어지고 희두백봉 착액문 석사안을 나간 후 심가문에 다다라 정박했다. 
  심가문의 산은 교문의 그것과 같은 모양인데 사방의 산이 둥그렇게 안고 있으며 두 문을 마주 열고 있다.
  그 산세가 연이어 걸쳐있는데, 창국현에 속한다.
  그 주변에 어부와 나무꾼 십여 집이 모여 사는데 그 중에서 큰 성씨를 따서 심가문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신시(오후3~5시)에 비바람이 몰아쳐 컴컴해지고 천둥, 번개, 우박이 갑자기 들이치다가 얼마 뒤에 그쳤다.
  이날 밤 산에 올라가 장막을 치고, 땅을 깨끗이 쓸고 제사지냈다. 뱃사람들은 이것을 사사라 한다.
  실제로는 악독(岳瀆)을 다스리는 신이고, 배양하는 신위도 매우 많다. 
  배마다 나무를 깎아 작은 배를 만들어 불경과 양식을 싣고, 배에 탄 사람의 성명을 써서 작은 배 안에 넣어 바다에 흘려보낸다.
  대체로 일종의 푸닥거리로서 마음의 위안을 삼는 방법의 하나이다.

 

  5월 26일 무인일
  서북풍이 매우 심해지자 정사가 삼절인을 거느리고 작은 배를 이용해 연안에 올라 매령(梅岺)으로 갔다.(고려도경에는 매잠(梅岑)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이므로 정정한다)
  옛부터 매자진이 은거하는 곳이라고 전해와 이름을 매령이라고 했다고 한다.
  깊은 산기슭에는 소량이 세운 보타원이 있고, 그곳에는 신령스런 관음이 모셔져 있다. 옛날 신라 상인이 중국의 오대산에 가서 그 상을 조각해 본국으로 실어가고자 바다로 나갔으나 암초를 만나 배가 좌초되어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배에서 관음상을 내려 암초 위에 올려놓았는데, 보타원의 승려 종악이 보타원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이후 항해하는 선박은 반드시 보타원에 들러 복을 빌었는데, 감응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한다.
  오월의 전씨가 그 상을 개원사로 옮겼다.
  그리하여 지금 매령에서 받들어 모시는 것은 후대에 와서 다시 만든 것이다.
  숭녕 연간에 사신이 조정에 알려 그 절에 새로운 편액을 내리고, 해마다 승려 수를 늘려 주었다. 옛 제도에 따르면 사신은 이곳에서 기도를 드린다.
  이날 밤 승려들이 분향하고 매우 엄숙하게 경을 읽고 범패를 행하니 삼절의 관리와 병졸들도 삼가는 마음으로 성심껏 예를 다했다.
  한밤중에 별이 빛나고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니, 이제 바람이 정남풍으로 바뀌었다 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뛸 듯이 기뻐하였다.

 

  5월27일 기묘일
  뱃사람들은 바람의 기세가 안정되지 않아 숙풍이 불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해상의 바람이 바뀌어 그 다음날까지 변하지 않는 것을 숙(孰)이라 하는데, 숙풍이 아닐 때 섣불리 움직인다면 바다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바람 방향이 바뀌면서 어디로 떠밀려 가게 될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먼 바다로 나아갈 때는 바람과 구름과 하늘의 상태를 잘 살핀 후 나아가는 것이다.
  신시가 되어서야 정사와 부사가 삼절인과 함께 여덟 척의 배로 모두 되돌아갔다.
  이때에 이르러 바다색이 조금 맑아지긴 했으나 물결이 약간 일어 배 안에서 위태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5월28일 경진일
  하늘이 맑았다.
  묘시(오전5~7시)에 여덟 척의 배가 동시에 출발하는데, 정사와 부사는 조복을 갖추어 입고 두 명의 도관과 함께 궁궐을 향하여 재배하고 어전에서 내린 신소옥청구양총진부록과 풍사용왕첩, 천조직부인오옥진형 그리고 지풍우 등 13부적을 바다에 던졌다.  
  그런 다음 돛을 펼치고 나아가 적문을 지났다.
  한참을 나아가자 물빛이 점점 푸른색을 띠었다.
  사방의 산과 섬을 바라보니 점점 멀어지는데 구름과 기운 달 같았다.
  후에 해려초를 지났는데, 모양이 엎드린 당나귀 같았다.
  숭년 연간에 뱃사람들이 파도 사이에서 출몰하는 바다짐승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당나귀 같았다고 한다.
  당연히 다른 사물이었을 것이고 초석에 실제 당나귀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봉래산을 바라보면 매우 멀다.
  산의 앞은 높고 뒤는 내려갔으며 가파르게 치솟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든다.
  섬은 아직도 창국현의 경계에 속해 있다. 그곳은 매우 넓어 농사를 지을 수 있으므로 섬사람들이 거주한다.
  선가에서 말하는 세 산중에 봉래산이 있는데, 약수 3만 리를 넘어서야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사방을 둘러보아도 지칭할 만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이 이것을 가리켜 봉래산이라 이름 지었을 것이다.   이곳을 지나면 또 다른 산은 없다.
  파도가 연이어 출렁거리며 내리쳤다 용솟음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배가 흔들리며 요동쳐 배 안의 사람들은 열에 여덟 아홉이 구토와 현기증으로 쓰러져 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배가 봉래산을 지난 후에는 물이 깊어 유리와 같이 푸른빛을 띤다.
  풍랑의 기세는 더욱 사나워졌다.
  먼 바다 가운데 돌이 있었는데 반양초라고 했다.  
  배가 암초에 부딪치면 뒤집혀 물에 빠지므로 뱃사공들은 그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이날 오후에 남풍이 더욱 거세져 작은 돛을 올렸다.
  작은 돛은 풍랑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큰 돛이 그 기세를 견디지 못할까 염려해 큰 돛을 내리고 작은 돛들을 올려 그것들이 배를 이끌고 가게 하기 위함이다.
  이날 밤 바다 가운데 머무를 수 없어 오직 별만을 바라보고 앞으로 가다가 별조차도 보이지 않게 어두워지자 나침반을 써서 남북을 헤아렸다.
  밤이 되어 등불을 밝히자 여덟 척의 배가 모두 호응했다.
  한밤중에 바람이 서북풍으로 바뀌었는데 그 기세가 매우 세져서 돛을 내렸는데도 파도에 흔들려 요동쳤다.
  병과 항아리는 모두 쓰러지고 온 배의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 벌벌 떨었다.
  먼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좀 가라앉아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어 이전처럼 돛을 올리고 나아갔다.

 

  5월29일 신사일
  하늘은 어둡고 바람의 움직임은 정해지지 않았다.
  진시(오전 7~9시)에 바람이 잦아지고 순해져 작은 돛을 더 올렸다.       
  항해 속도는 매우 느렸다.
  신시 말(오후 5시경)에 바람이 바뀌더니 유시에 구름이 일어 비가 내렸다가 밤이 되어서야 그쳤다.
  다시 남풍이 불어 백수양(白水洋)으로 들어갔다.
  그 근원이 말갈에서 나왔기 때문에 흰빛을 띠었다.
  이날 밤 불을 드니 배 세 척이 서로 호응했다.
  황수양은 모래지대의 끝부분(사미)이다.
  그 물은 혼탁하고 깊이가 얕다.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모래는 서남쪽으로부터 와서 먼 바다 가운데 1천여 리에 가로놓여진 것으로 곧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라고 했다. 배의 항로가 이곳에 이르면 닭과 수수로 모래에 제사지낸다. 이는 앞서 항해 중 모래를 만나 피해를 입은 자들이 많으므로 물에 빠져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제사라 한다.
  중국에서 고려로 가는 해로 중에 명주항로 만이 이곳을 지나간다.
  만약 등주의 판교로부터 고려로 간다면 이곳을 지날 필요가 없다.
  이번 사신이 돌아올 적에 이곳에 이르러 첫 번째 배가 얕은 곳에 거의 좌초 될뻔 하였고, 두 번째 배는 오후에 세 개의 키를 모두 부러뜨렸으나 종묘사직의 위령 덕분으로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므로 뱃사람들은 사미를 지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
  여러 번 납추를 사용하여 수시로 깊고 얕음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흑수양은 북쪽 바다이다.
  점점 깊숙이 들어갈수록 물빛은 진한 먹처럼 검은 색이었다.   
   갑자기 그것을 보면 정신과 담력을 모두 잃게 된다.
  성난 파고가 뿜어내는 것이 우뚝 솟은 만산과 같고, 밤이 되면 파고 사이가 불처럼 밝게 빛난다.
  배가 파도 위로 올라갈 때는 바다가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오직 밝은 해만 볼 수 있고, 배가 파도 아래로 내려가면 앞뒤의 파도가 높이 하늘을 가리니 위장이 뒤집히고 겨우 숨을 쉬며 쓰러져 구토하고 먹은 음식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요 위에 피곤해 누워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사방의 칸막이를 높이 올려 물통같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울어져 이리저리 굴러 몸을 다치게 된다.
  이때 몸이 만 번 죽을 수 있는 고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니 위험하다 할만하다. 
  
  6월 1일 임오일
  해가 뜰 무렵 안개가 자욱한데 배는 동남풍을 탔다.
  사시에 조금 개였고, 바람이 서남풍으로 바뀌어 작은 돛을 폈다.
  정오에 바람이 사나와져서 맨 앞서가는 배의 큰 돛대가 휘어져 부러지려고 하자 급히 큰 나무를 대어 붙여 온전히 넘어갔다.
  미시 말(오후 3시경)이 되어 동북쪽 하늘 끝을 바라보니 구름같이 은은한 것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 반탁가산이라고 하였으나 그리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었다. 밤이 되자 바람이 약해 배가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6월2일 계미일
  아침 안개가 자욱하고 서남풍이 불다가 미시 말쯤 되어서야 맑게 갰다.
  정동 쪽으로 병풍 같은 산 하나가 보이는데, 그것이 협계산이다.  
 화(중국)와 이(고려)는 이 산으로 경계를 삼는다.
  처음 바라볼 때는 희미했으나 유시 말(오후 7시경)이 다 되어 가까이 다가가니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었다. 이를 쌍계산이라고 부른다. 
  뒤에는 작은 암초 수십 개가 있는데 달리는 말의 형상이다.
  물결이 눈처럼 일어나는데 그것이 산을 만나면 더욱 높이 솟아오른다.
  병야(자시)에 바람이 세어지고 비가 와서 돛을 내려 그 기세를 낮추었다.
  오서는 여러 곳에 있지만 협계산 가까이에 있는 것이 진짜이다.
  정해현 동북쪽 소주 앞 바다의 군산과 마도에도 오서가 있다.
  대개 뱃사공들은 바다에서 작은 산이 있는 섬을 가리켜 서(嶼)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다섯 산이 서로 근접해 있는 것은 모두 오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6월3일 갑신일
  계속 내리는 비는 그치지 않고 동남풍이 불었다.
  오후에 이 오서를 지나갔다.
  오랫동안 바람과 파도가 거세게 솟구치고, 깎아지른 웅장한 절벽은 아주 볼만했다.
  이날 사시에 구름이 흩어지고 비가 그쳐 사방을 둘러보니 맑게 갰다.
  멀리 바라보니 세 개의 산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가운데 산은 담장 같았다.
  뱃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 배도라고 하고, 배타산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성에서 활 쏘는 곳과 같아 그렇게 부른다.
  이날 오후에 동북쪽으로 산 하나가 바라보였다.
  성에 담장이 둘러쳐진 것처럼 매우 컸는데, 햇빛 비치는 곳은 옥처럼 하얗다. (백산) 미시 말이 되자 바람이 불어 배의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흑산은 백산의 동남쪽에 있어 서로 바라볼 정도로 가깝다.
  처음 바라보면 매우 높고 험준하다. 가까이 가면 첩첩이 쌓인 산세를 볼 수 있다.
  앞의 작은 봉우리 가운데가 동굴 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곳이 있는데 배를 감출 수 있을 정도이다.
  옛날 바닷길에 이곳이 사신의 배가 묵었던 곳이어서 관사가 있다.
  이번 여정에서는 여기에서 정박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고려에서 중죄인으로서 죽음을 면한 사람은 대부분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를 때마다 밤에는 산꼭대기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 왕성에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시 말(오후 5시경)이 되어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월서는 둘인데 흑산에서 아주 멀다.
  앞의 것은 대월서라 하는데 달과 같이 둥글게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 양원사가 있었다고 한다.
  뒤의 것을 소월서라고 하는데 문같이 마주보고 있어 작은 배가 지나다닐 수 있다. 
  난산도는 천선도라고도 한다.
  산이 높고 험하며 멀리서 바라보면 벽처럼 서 있다.
  앞의 작은 두 암초는 거북과 자라 모양이다.
  백의도는 세 개의 산이 연이어 잇고 앞에는 작은 암초가 붙어 있다.
  늘어진 회나무와 차조기풀은 푸르고 윤기가 흘러 볼만하다.
  이곳을 백갑점이라고도 한다.
  궤점은 백의도 동북쪽에 있는데, 그 점(?)은 여러 섬들보다 훨씬 크다.
  여러 산이 이어져 있고 둘러싸고 있는 부서진 암초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밤 파도가 세차게 쳐 올라 눈 같은 파도가 부서져 흩어졌으며 달은 지고 밤은 깊은데 물거품은 불길 같이 밝았다.
  춘조점은 역시 궤점 밖에 있는데, 주인들은 그곳을 외서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모두 소나무와 화화나무 등이 자라는데 바라보니 울창하다.
  밤중에는 바람이 고요하여 배의 속도가 매우 느려졌다.
  빈랑초는 종려와 비슷한 모양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대개 바다 가운데의 암초는 멀리서 바라보면 이런 형상을 하고 있지만 뱃사람들은 춘조점과 가까운 것만을 빈랑초라고 한다.
  밤이 깊어 밀물이 빠져서 배가 물을 따라 물러나 다시 먼 바다로 거의 나갈 지경이 되자 모든 배가 두려워서 급히 노를 저어 먼 바다로 밀려나가지 않도록 애썼다.
  그리하여 동이 틀 무렵까지 여전히 춘조점에 있었다.

 

  6월4일 을유일
  날씨는 맑게 개였고 바람은 고요하며 물결은 잔잔했다.
  바닷물을 내려다보니 거울처럼 푸르고 맑아서 밑바닥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크기가 여러 길이나 되는 고래 수백 마리가 배를 따라 오락가락 하는데, 천천히 지느러미를 움직이고, 유유자적하면서 배가 지나가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날 오후에 보살점을 지나갔다.
  고려 사람들이 그곳에서 기이한 일이 나타난 적이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신시 말에 바람이 고요하여 밀물을 따라 조금 전진하였다.    
  이날 유시 말(오후 7시경)에 배가 죽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숲의 나무들은 푸르고 무성했다.
  그곳 역시 주민이 있고 그 중에는 우두머리도 있다.
  산 앞에는 흰 돌로 된 암초 수백 덩어리가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은 것이 마치 쌓아 놓은 옥과 같았다.
  돌아올 때 사신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추석 보름달이 떠올랐다.
  밤은 고요하고 물결은 잔잔한데 붉은 노을과 은은한 달빛이 온 세상을 비추니 섬과 골짜기 그리고 배와 물건들이 온통 금빛으로 물들었다.
  모든 사람이 일어나 춤추고 그림자를 희롱하며 술 따르고 피리 부니 마음과 눈이 즐거워 앞에 먼 바다가 있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6월 5일 병술일
  고점점을 지나가는데 죽도에서 멀지 않았다.
  산들은 모두 엇비슷하였고, 주민들도 있었다.
  고려에서는 찌를 듯한 고슴도치 털의 모양을 고점점이라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이 무성하나 크지 않아 바로 고슴도치 털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이날 이 섬에 정박하자 고려 사람들이 배에 물을 싣고 와 바치므로 쌀로 사례하였다.
  동풍이 세게 불어 전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여기서 묵었다.

 

  6월 6일 정해일
  아침에 밀물을 타고 항해하여 진시(오전 7시~9시)에 군산도에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열두 봉우리가 서로 이어져 성처럼 원형으로 둘러져 있다.
  여섯 척의 배가 와서 맞이했는데 무장한 병사를 싣고 징을 울리고 고동나팔을 불며 호위하였다.
  또 다른 작은 배에는 녹색 도포를 입은 관리를 실었는데, 그는 홀을 바로 잡고 배 안에서 읍을 하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물러갔는데 군산도의 주사라고 한다.
  이어 역관인 합문통사사인 심기가 와서 동접반 김부식과 합류하였다.
  지전주 오준화가 사자를 보내와 먼길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글을 보내와 그것을 받았다.(중략)
  횡서는 군산도의 남쪽에 있는데, 산 하나가 매우 크며 안점이라고도 한다.
  앞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둘러져 있다.
   바위 아래쪽의 동굴 하나는 그 깊이가 여러 길이 되는데 높고 넓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파도가 들이치면 마치 천둥소리가 나는 것 같다.

 

  6월 7일 무자일
  날씨는 쾌청했다.
  아침 일찍 전주를 다스리는 관리가 글과 함께 술과 음식을 가져와 사신 일행이 머물기를 청했으나 사신이 글로서 고사하자 그는 그만 두었다.
  그렇지만 그가 보내온 채소와 생선 등은 받고 특산물로 보답했다.
  정오에 닻을 내리고 횡서에서 하루를 묵었다.

 

  6월 8일 기축일
  일찍 출발했다.
  남쪽으로 자운점이라는 산 하나가 보였는데, 여러 봉우리가 뾰족뾰족 하였다.
  그 뒤편에 산 두 개가 있었는데, 마치 눈썹이 나란히 붙은 모습이었다.
  오후에 부용창산을 지나갔는데, 뱃사람들이 부용산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산은 홍주 경내에 있는데, 산 위에 곡식을 많이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있다.
  변방의 비상시 수요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어서 부용이라고 명명했다 한다. 
  홍주산 역시 자운점에서 동남쪽으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홍주는 그 산 아래에 세워졌다.
  또 동쪽으로는 금이 나는 산이 하나 있어 범이 웅크린 형상인데 동원산이라고 부른다.
  조그만 수십 개의 산이 성처럼 빙 둘러싸고 있다.
  그 산 위에는 깊은 연못이 하나 있다. 모습을 비출 수 있을 정도로 맑고 깊이를 모를 만큼 깊다. 이날 신시(오후 3~5시)에 배가 이곳을 지났다.
  아자점은 알자점이라고도 한다. 고려 사람들은 삿갓을 알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산 모양이 삿갓과 비슷하다 하여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다. 유시(오후 5~7시)에 배가 이곳을 통과했다.
  유시 말(오후 7시쯤)에 바람이 아주 빨라져 배가 나는 듯이 항해하였다.
  알자점에서부터 잠깐 사이에 마도로 와서 정박하였다.
  이곳은 청주 경내인 듯하다.
  샘물은 달고 초목은 무성하여 고려 관마를 평상시에 이곳에서 무리 지어 방목하므로 마도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주봉은 크고 깊은데, 왼쪽 팔로 둥그렇게 감싸 안은 형국이다.
  앞에는 바위 하나가 바다로 잠겨 들어 있어 격렬한 파도가 소용돌이치고 들이치고 세찬 것이 매우 기괴한 모습이어서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아래를 지나가는 배들이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암초에 부딪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안흥정이라는 객관이 있다.
  지청주 홍약이가 소개서와 통역관 진의를 함께 보내왔는데 전주에서의 예법과 같았다.
  언덕을 따라 깃발을 든 환영 군졸들이 도열하였는데 군산도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중략)

 

  6월 9일 경인일
  날씨가 청명했다.
  남풍이 아주 강했으므로 진시(오전 7~9시)에 마도를 출발하여 사시(오전 9~11시)에 구두산을 지났다.
  그 산에는 봉우리가 9개가 있다고 하는데 멀리서 보아 분명하지 않았다. 숲이 무성하고 맑고 윤택한 것이 볼만하였다
  당인도는 그 이름이 확실하지 않으나 그 섬과 구두산은 가깝다.
  오시(오전 11~오후 1시)에 배가 이 섬 옆을 지나갔다.
 쌍녀초는 그 산이 매우 커서 도서와 다름없다. 앞산에 초목이 있지만 그리 많지 않다. 뒷산은 좀 작다. 두 산 가운데가 끊어져 문처럼 되어 있으나 아래에 암초가 있어 배가 지나가지는 못한다.
  이날 사시(오전 9~11시)에 배가 당인도를 거쳐 이 암초를 지나갔는데 바람이 매우 강해져 배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진한 눈썹과 같다고 해서 고려 사람들이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날 오시에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화상도는 산세가 중첩되어 있어 골짜기와 숲이 깊다.
  산 속에는 호랑이와 이리가 많다.
  옛날 불도를 닦는 자가 그곳에 살았는데 짐승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엽로사가 그 유적이다. 이런 이유로 고려인들은 그곳을 화상도라고 했다 한다. 미시(오후 1~3시)에 배가 그곳을 지났다.  
  우심서는 조그만 바다 가운데 있다. 봉우리 하나가 특별히 솟았는데 그 모양이 사발을 엎어놓은 것과 비슷했는데 가운데가 좀 뾰족하다.
  고려 사람들은 그것을 우심이라 하는데 다른 곳에서도 이 같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또 모양이 이 산과 비슷하나 약간 작은 것은 계심서라고 한다.
  미시에 이 섬을 지나갔는데 남풍이 불며 비가 조금 내렸다.
  섭공서는 성씨로 인하여 이러한 이름을 얻은 것이다.
  멀리서 보면 아주 뾰족한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담장과 같다.
  대체로 납작한 그 모습은 종횡에 따라 각각 달리 보인다.
  미시에 배가 그 옆을 지나갔다.
  소청서는 대청서의 형상과 같다.
  다만 산이 약간 작고 주변에는 암초가 많다.
  신시 초(오후 3시쯤)에 배가 지나가는데 비가 조금 세게 쏟아졌다. 
  자연도에 신시쯤 도착했는데 이곳이 바로 광주 경내이다.
  산에 의지하여 관사를 지었는데 경원정이라는 방 붙이는 곳이 있다.
  경원정 곁으로는 임시막사 수십 칸이 있으며, 주민들의 초가집도 많다.
  그 산 동쪽에 섬 하나가 있는데 제비가 많이 날아다니기 때문에 자연도라 했다 한다.
  접반 윤언식(윤관장군의 아들)과 지광주 진숙이 소개서와 역관 탁안에게 서신을 가지고 와서 영접하도록 했는데 의장대의 의례가 매우 두터웠다.
  신시가 되어 비가 그쳐 정사, 부사가 삼절과 함께 육지에 올라 관사에 이르렀다.
  그 음식과 상견례는 전주에서의 예와 같았다. 2각을 지나 배로 돌아왔다.

 

  6월 10일 신묘일
  진시(오전7~9시)에 서북풍이 불어 8척의 배가 움직이지 못했다.
  도할관 오덕휴와 제할관 서긍은 상절을 모시고 다시 채주를 타고 관사에 갔다가 제물사에 들렀다. 그곳에서 원풍 연간(A.D.1078~1085)의 사신 고 좌반전직 송밀을 위해 절에서 제사를 지내고 배로 돌아갔다. 사시에 조류를 타고 올라갔다.
  이날 미시(오후 1~3시)에 급수문에 도착했다.
  그 관문은 해도(바다섬)와 다른 것이 흡사 무협의 강 흐름 같았다.
  산으로 둘러싸여 굴곡을 이루면서 꾸불꾸불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사이로 강물이 흐른다. 물의 형세가 산골짜기에 따라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랑을 뚫는데, 천둥소리처럼 요란하고 쇠뇌의 화살이나 바람을 쫓을 수 있는 말이라 해도 그 급한 물살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 이르면 돛을 펼쳐서는 안 되고 다만 노를 저어 조류를 따라 전진해야 한다.
  신시(오후 3~5시)가 다되어 합굴에 정박했다.
  그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았으므로 주민도 많았다.
  산등성이에 용의 사당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제사를 지낸다.
  바닷물이 여기까지 들어오는데, 급수문의 물색과 비교하면 황백색으로 변했다.
  분수령은 곧 두 산이 마주보고 있는 소해인데 여기서부터 물이 나뉘어 흐른다.
  물빛은 다시 매잠을 지날 때처럼 혼탁해졌다.     

 

  6월 11일 임진일
  아침에 비가 내리고 오시에 물이 빠지며 비가 더욱 심해졌다.
  국왕이 유문지를 시켜 글을 보내왔는데 정사가 예를 갖추어 받았다.
  유시에 전진하여 용골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6월 12일 계사일
  아침에 비가 그쳤다.
  정사, 부사가 신주로 옮겨 타고 강물을 따라 예성항에 이르렀다.
  오시에 정사, 부사가 도할관, 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주로 조서를 봉안했다.
  1만 명이나 되는 고려 군사들이 병기, 갑옷 입힌 말, 기치, 의장물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꾼들이 담장같이 둘러섰다.
  채주가 해안에 이르자 도할, 제할관이 조서를 채색 가마에 봉안했다.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고 정사, 부사는 뒤에서 따라갔으며 상절, 중절은 그 다음으로 따라갔다.
  벽란정으로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고 그 일이 끝나자 지위에 따라 나뉘어 휴식을 취했다.

 

  6월13일 갑오일
  길을 따라 왕성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