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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위화도회군과 조선의 개국 그리고 한양천도에 숨겨진 비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27. 00:01

윤여동설 - 위화도회군과 조선의 개국 그리고 한양천도에 숨겨진 비밀 - 최초주장

 

   이성계는 1361년 10월에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홍건적의 침입 때는 사병 2천을 이끌고 개경에 맨 먼저 입성했다.

  또한 고려가 1258년 원나라에게 빼앗겼다가 1356년에 탈환한 쌍성총관부를 1362년 2월에 이르러 원나라가 재탈환하기 위하여 여진장수 나하추로 하여금 수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려를 침입하자 공민왕은 동북면 도지휘사로 하여금 그를 막게 했으나 계속 패배하자, 7월에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를 막게 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침공군을 전멸시켰고 나하추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친 후 원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명나라에 투항해야만 했다.
  이후 이성계는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면서 30여 년 동안 전장을 누비는데 한 번도 패전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벼슬은 나날이 올라가 1362년 동북면 병마사가 된 이후 밀직부사, 동북면도지휘사, 동북면도원수문화찬성사에 오르게 된다. 

 

위화도 회군

 

  세월이 흘러 1368년에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인 서기 1388년에 이르러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이 원래 원나라의 땅이었으므로 요동에 예속시키겠다고 통고해오고 철령위를 설치하자 우왕은 4월 초하루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정벌을 명하게 된다.
   그러자 이성계가 아뢰기를,
  “지금 군사를 일으키는 데에는 4가지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고,
  둘째는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온 나라가 멀리 정벌을 하면 빈틈을 타서 외적이 침입할 것이며,
  넷째는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하고 요동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최영의 요동정벌 주장에 밀려 결국 요동정벌군을 편성한다.
  그리하여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영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는데 좌· 우군의 총수가 38,830명이었고 심부름꾼이 11,600명으로서 약 5만 명이었다. 그리하여 4월18일 조민수와 이성계는 군사들을 이끌고 서경(현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출발했는데 군사는 10만이라 발표했다.
  최영과 우왕은 전투를 독려하기 위하여 그 다음 날 개경(현 승덕시 관성현)으로부터 서경으로 옮겨 머무른다.
  한편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요동정벌군은 5월7일에 압록강의 위화도(威化島)에 진을 쳤는데 도망하는 군사가 길을 이었다.이성계나 조민수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5월13일에 이르자 좌· 우군 도통사인 조민수와 이성계는 이대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회군을 요청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그를 무시하고 진군을 독촉했다.
  5월22일에 이르러 좌· 우군 도통사가 다시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 회군할 것을 청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을 되돌아 건넜는데, 이를 역사는 "위화도회군"이라 한다.
  그런데 이때 군사들이 모두 위화도에서 빠져나오자 장마비에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 위화도가 물에 잠겨 버렸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자 우왕과 최영은 서경(현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서 개경(현 하북성 관성현)으로 급히 되돌아가는데, 이성계 휘하의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요청했으나 이성계는“빨리 가면 반드시 전투를 해야 하니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하고는 사냥도 하면서 일부러 천천히 뒤쫓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군사들에게는 왕을 죽여서는 안 되고, 백성들의 오이 한 개라도 손을 대는 자는 엄히 다스리겠다는 엄명을 내린 후 천천히 행군하여 6월 초하루에 이성계가 개경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성내의 우왕에게 글을 올려 최영을 제거하라 요구하였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는 6월3일에 이르러 황룡을 그린 큰 깃발을 앞세우고 선죽교를 지나 진군하여 최영군을 격파하고, 최영을 잡아 고봉으로 귀양보낸다.      
  그러자 우왕은 6월 6일에 손수 갑옷을 입고 환관 80여명과 이성계, 조민수의 집을 급습했으나 집 앞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그들이 집에 있지 않아 죽이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와 조민수는 다음 날인 6월7일 궁중 안에 비치되어 있던 병장기와 말안장을 모두 회수하고 6월 8일 우왕을 강화로 추방한다.
  그리고는 국보(옥새)를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가져다주고 다음 날인 6월9일 차기 왕을 지명토록 했다.
  이때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인 아홉 살짜리 창을 추대하고, 이성계는 다음 왕을 왕씨의 종친 중에서 골라 추대해야 한다고 하게되어 의견이 갈리게 된다. 
  결국 이색의 지원을 받은 우왕의 아들 창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고, 조민수는 양광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서해도(황해도), 교주도(경기도) 도통사로 임명되고, 이성계는 동북면도(함경도), 삭방도(평안도), 강릉도(강원도) 도통사로 임명되어 이성계는 고려를 남북으로 양분한 북쪽의 병권을 손에 쥐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이성계는 조준 등과 함께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신진관료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리하여 조준은 토지제도를 개혁하자는 상소를 올리는데 조민수는 이에 반대하다가 조준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고 만다.
  그러자 조정은 이성계를 지지하는 신진 세력으로 채워졌고 조준, 정도전, 정몽주 등은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켜 강화로 보내고, 정창군 왕요(공양왕)를 새 왕으로 옹립한 후 우왕과 창왕을 사사하게 하고 다시 공양왕을 폐위시켜 사사함으로써 고려는 34왕 474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이루어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가 되었다.

 

  그런데 이 기록 속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성계가 회군했던 위화도는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이 위화도가 지금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가르는 압록강 가운데 있는 섬을 말하는 것으로 역사를 해석했다.

  그러다보니 서경을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인식했고 고려의 도읍 개경 역시 황해도 개성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압록강에 대한 옛 기록을 보면 지금의 압록강을 압록강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기록을 보면, 한원(翰苑)에는 압록수에 대하여,
  “후한서와 그 지리지에는 현토군 서개마현 마현의 마자수는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흘러 들어와 서남쪽으로 서안평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두 군을 지나 2,100리를 흐른다’라고 하였고,' 응소(應邵)는 말하기를 마자수는 서쪽에서 흘러와 염택(鹽澤)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하였다. '고(구)려기에도 마자수를 고구려에서는 일명 엄수(淹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이름은 압록수라고 하고 물고기가 떠올랐다’고 하는 이야기가 그 나라에 전해진다.
  동북쪽 말갈국 백수(白水)의 물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비슷하므로 속명으로 압록수라고도 하는데 요동에서 5백리 떨어져 있다. 국내성(國內城) 남쪽을 지나고 서쪽으로 흐르는 또 한 강과 합하여 염난(鹽難)을 이룬다. 두 강이 합해져 서남쪽의 안평성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양제는 탁군(현 하북성 탁주시로서 북경의 서남쪽에 위치)으로부터 육군을 출발시켜 요수를 건너 요동(현 북경 부근)에 도착한 후 동북쪽으로 향하여 압록강(현 밀운수고 부근)을 건너 을지문덕을 쫓아 살수(현 조하)와 패수(현 난하)를 건너 평양성(현 승덕시 부근)까지 왔다가 철수할 때 살수에서 30여만 명을 죽이는 패전을 당했었다.
  그리고 당 태종은 정주(현 하북성 정주시로서 탁주의 서남쪽에 위치)에서 육군을 출발시켜 북쪽으로 행군하여 요택을 지나고 요수(현 영정하)를 건너 요동(현 북경 부근)에 도착했고, 고구려군의 방어에 막혀 압록강(현 백하, 밀운수고)도 건너지 못하고 안시성(현 회유구)에서 철군해야 했다.      
  그리고 소정방은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동남쪽으로 서해(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온 것이 아니라 북서쪽으로 발해를 건너 난하하류에 군사들을 상륙시켜 부근의 기벌포에서 신라군과 연합하여 북쪽으로 진군하여 사비성을 공격, 백제를 멸망시켰다.
  지금의 난하(패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이 바로 우리 고대 삼국역사의 중심지였다.  
  그렇다면 바로 그 삼국의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고려 역시 그 땅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송사 고려전을 보면, 
 고려의 강역이 남북이 1천5백리, 동서가 2천리로 기록하고 있고,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옛날에는 그 영토가 동서 2천 리, 남북 1천5백 리였는데 현재는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동쪽과 북쪽이 약간 넓어졌고 서북쪽은 거란과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는 한반도와 같이 남북이 길고 동서가 좁은 형태가 아니라, 동서가 넓고 남북이 좁은 형태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의 압록강은 지금의 백하, 밀운수고를 말하는 것이고, 내몽골 적봉을 지나는 음하(陰河)를 두만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화도 역시 지금의 백하 하류에 위치한 밀운수고 부근을 말하는 것이지 한반도 북쪽 압록강에 있는 섬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성계는 바로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에서 회군을 했던 것이지 한반도 북쪽 압록강에서 회군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압록강(밀운수고)과 요동(북경) 그리고 위화도(회유)의 위치] 

 

[압록강(밀운수고) 방향에서 바라보는 요동(북경) 부근의 지형]

 

조선의 개국

 

  이렇게 되어 이성계는 1392년 7월 왕위에 올라 국호를 새로이 정하게 된다.
  이때 여러 사람의 논의를 거쳐 선택된 국호가 둘이었는데 하나는 조선(朝鮮)이요, 다른 하나는 화령(和寧)이었다.
  조선은 옛 왕검조선 등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였고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 화령에서 따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화령이라는 의미가 화합하여 안녕을 이룬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본다면 비록 화령이 이성계의 출생지에서 따왔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좋아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1392년 11월 두 개의 국호를 명나라에 보내 국호를 정해 주기를 요청하게 된다.
  이때 국호를 정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주문사로 예문관학사 한상질(한명회의 할아버지)을 보냈는데 명나라에서는 옛 조선의 칭호에 따라 조선을 국호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한상질은 그렇게 정해진 조선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다음해 2월 돌아와 3월부터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공식 사용하게 된다.
  물론 이때 명나라에서는 기자조선(箕子朝鮮)를 염두에 두고 조선이라는 국호가 좋다고 했을 것이다.
  기자는 은나라의 현인으로써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그를 섬길 수 없다며 동쪽으로 갔는데, 주 무왕이 그를 조선에 봉했고 범금 8조로서 백성들을 교화시켰다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조선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선택한 이유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이루어 세운 새로운 나라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단순한 나라가 아니라 수천 년 역사를 이어온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유서 깊은 조선의 맥을 잇는 나라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조선이라는 국호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국호로 선택된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에서 따왔다고 하기도 하는데, 화령은 원래 화주목이었는데, 고려 공민왕 때 화령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이성계의 외가가 바로 이곳 화령이었다. 그리하여 이성계의 어머니 최씨는 산달이 되자 친정에 와서 이성계를 낳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곳 화령을 이성계의 출생지라고 하게 된 것이다. 
 

☆ 우리는 지금 이성계의 출생지에서 유래했다는 화령이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 부근의 영흥이라 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영흥대도호부 조에는 영흥이 곧 화주요 쌍성총관부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태조 2년에 영흥진이 이성계의 외할아버지 최씨의 동네라 하여 영흥대도호부로 고쳤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건치 연혁은 한반도 지명의 건치 연혁이 아니라 대륙지명의 건치 연혁으로서 내몽골 적봉, 오한기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의 동북 9성은 옛 두만강이었던 지금의 음하 북쪽에  위치했다. 

   

한양천도

   
  국호가 조선(朝鮮)으로 정해지자 신하들은 개경의 지세가 이미 쇠하였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이 건국되었으므로 민심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청한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도읍지를 물색하게 하였는데 계룡산 아래가 도읍지로 선택되어 궁궐 건축을 위한 주춧돌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룡산 아래가 비록 명당이기는 하지만 도읍지로서는 너무 좁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하륜의 주장이 제기 되었고, 무학과 정도전, 하륜 등이 한양이 도읍지로서 적당하다고 하여 결국 지금의 한반도 서울이 새로운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393년 9월부터 궁궐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성계는 궁궐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인 1394년 10월에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다.
  이성계가 왜 이렇게 도읍 이전을 급히 서둘렀는지 그 자세한 내막은 지금 알 수 없는데, 이때 조선은 어디로부터 지금의 서울로 도읍을 옮긴 것일까?
  지금까지 필자가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지라고 주장한 곳은 지금 중국 하북성에 있는 난하 부근이었고, 고려의 도읍 개경은 하북성 관성현이었는데, 조선이 건국되면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서울에는 조선시대의 궁궐과 성곽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부터 마지막 왕 순종의 능까지 실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 조선은 우리의 일반 상식과 같이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에서 서울로 도읍을 옮긴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으로부터 발해와 황해를 건너 한반도의 서울로 도읍을 옮겼고, 이때부터 한반도가 역사의 중심지가 되어 기록이 남겨지기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이성계의 조선까지도 대륙에 계속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까지 고려로부터 그 이전의 고대 역사 기록과 현 한반도의 지리적 상황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던 이유가 중심지 이동에 있었음을 이제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환인, 환웅에서부터 고조선, 부여, 삼한, 삼국, 고려를 지나 조선건국까지를 논한 것은 바로 우리의 고대역사가 반도역사가 아닌 대륙역사 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로 고정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 바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었다. 조선 세조,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전국의 고서적을 집요하게 수거하려 했던 것은 일반 백성이 대륙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경주에 옛 고총들은 많고, 유물도 왕릉에 견줄 만한 것들이 출토되었으나 정작 신라 어느 왕의 능이라는 것을 알려줄 당시에 세워진 비석 하나가 없고, 또한 확실한 근거가 출토된 적도 없다.[지금 한반도 경주, 김해 부근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한결같이 유목민족의 문화와 관련 있는 것들이 출토되는데, 이는 흉노족이었던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후한 광무제에게 쫓한반도로 도망쳐와서 다시 왕국을 세웠던 흔적들이다]
  백제의 오백년 도읍 한성이었다는 서울에서도 백제 왕릉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오직 충남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만이 주인을 확실히 알뿐이고, 한반도의 고려왕릉이라 하는 곳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초라한 비석 하나만이 외롭게 서 있는 것 등은 그곳이 진짜 고려 왕릉이 아니라 엉뚱한 사람의 무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부터 조선왕릉들은 그야말로 왕릉답게 조성되어 있는데, 바로 앞 시대인 고려의 왕릉들에는 업적을 새겨 당대에 세운 신도비 하나가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고려까지는 대륙이 역사의 중심이었는데, 지금 우리는 한반도를 역사의 중심이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대륙에서 말달리며, 침공을 하기도 하고, 침공 당하기도 하며  대륙세력들과 어깨를 겨루며 1만년을 살다가 근세에 이르러서야 한반도로 밀려 들어왔고, 대륙의 땅은 명나라 또는 청나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는데, 우리는 지금 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의 모든 고대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해석하고, 비정하여 우리의 옛 역사를 바르게 복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1만년 역사가 펼쳐진 대륙의 잃어버린 우리 옛 땅을 찾아야 한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