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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6. 5. 01:25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 최초주장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일연의 삼국유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삼국유사가 쓰여진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자인 일연이 죽은 때가 84세 때인 1289년이었으므로 그 이전 언젠가 삼국유사를 집필했을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삼국이전의 우리 상고사에 대하여 다루지 않고, 오직 삼국시대 만을 다룬데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조선, 왕검조선을 시작으로, 부여, 삼한, 한사군, 삼국과 가야, 후백제와 발해까지를 언급하고 있고, 불교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훨씬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삼국유사가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발해 북쪽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에 관한 기록이다.

 

☆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에는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와 인접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신라는 변한의 먼 후예이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그 강역이)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장인국)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구당서에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었다는 기록은 신라가 당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커져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설치되었던 낙랑 땅의 일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고, 백제는 그 서쪽인 하북성 당산시와 진황도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며, 신라, 백제의 북쪽에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은 진황도, 당산, 북경 북쪽인 만리장성 너머 하북성 승덕시, 내몽골 일원에 고구려가 넓게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삼국의 땅을 이어받은 고려는 패수였던 지금의 난하를 중심으로 존속했다는 말이고, 일연이 살았던 고려 역시 난하를 중심으로 한 대륙에 위치했던 것이지 한반도 황해도 개성이 고려의 500년 도읍 개경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일연 역시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살다 죽었다는 말이 되고,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 역시 대륙이라는 말이 된다.
  신라의 천년도읍 옛 서라벌(금성)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이고, 백제의 도읍 한성은 진황도 도산 남쪽이며, 고구려의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이다.
  신라는 백제 땅과 고구려 땅의 남쪽 일부를 차지함으로써 부분적으로나마 삼국통일을 이루었고, 후일 그 땅은 고스란히 고려가 차지했으므로 고려 역시 대륙이 중심강역일 수밖에 없는데, 고려의 개경은 황해도 개성이 아니라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 부근으로 비정된다.
  발해에서 난하를 타고 올라 가다보면 만리장성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난하를 가로질러 지나는 곳에 반가구수고가 있는데, 관성은 그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반가구수고에서 지금의 폭하(瀑河)를 타고 올라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서 옛날에는 이 관성이 개경이었을 것이고, 폭하를 예성강이라 불렀을 것이다.
  

  삼국유사 탑상편에는 가섭불연좌석에 관한 기사가 들어 있는데, 일연이 황룡사지에 직접 가서 이 연좌석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신라 월성 동쪽 용궁 남쪽에 가섭불연좌석이 있는데, 이곳은 곧 전불 때의 절터이며 지금 황룡사터는 곧 일곱 절 중의 하나이다..........연좌석은 불전의 후면에 있다. 일찍이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돌의 높이가 5- 6척이나 되었으나 그 둘레는 겨우 서너발 밖에 되지 않았으며, 우뚝하게 서 있고 그 위는 평평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이후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중이 여기에 쇠를 붙여 보호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 삼국유사의 기록이 한반도 경주의 황룡사지에 관한 기록이라고 생각하고는 경주의 황룡사지를 발굴했으나 그곳에서는 삼국유사 기록 속에 나타나는 가섭불연좌석이라 할 만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그리고 요동성 육왕탑에 관한 기사 역시 지금의 요하 동쪽 요동에 7층 목탑을 세웠다는 말이 아니다.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으며 한나라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나라의 유주란 지금의 하북성 보정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압록강은 북경 북쪽 대마군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밀운수고로 들어가는 백하(白河)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옛 요동성을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으므로 요동성 육왕탑은 지금의 북경 부근에 세웠던 탑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금관성 파사석탑에 관한 기사는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는 신라의 남쪽에 위치하였다고 했는데,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 흥성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금관성 파사석탑 조의 삼국유사 기록은 바로 요녕성 흥성 부근에 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 영탑사 기사를 보면 고구려의 승려 보덕과 평양성이 언급되고, 평양성 서쪽 대보산 바위굴 아래에서 참선을 하는데, 신인이 나타나 그 아래를 파면 8면 7층석탑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어 파보니 과연 그러했으므로 그곳에 절을 세우고 영탑사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기록을 북한의 평양성 서쪽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평양성은 북한 평양이 아니라 중국 사서들에 경사(장안)에서 5천여리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을 말하는 것이므로 보덕이 세웠다는 영탑사는 바로 승덕시 피서산장 서쪽에 있는 대보산에 세웠다는 말인 것이다. 


  이렇듯 삼국유사의 모든 기록은 한반도에서 발생했던 일의 기록이 아니라 사실은 지금의 난하를 기준으로 한 그 부근 지역에 관한 기록이었으나 조선 시대부터 우리 스스로가 그 기록을 한반도에 관한 기록으로 착각하고는 그 기록 모두를 한반도에 꿰맞추어 해석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의 기록이라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한 채 지금도 한반도에서 그 삼국유사 기록 속의 흔적들을 찾으려 하고 있을 것이니 매우 답답한 일이다.
  인식을 전환하지 못하고 한반도 내를 맴도는 한 삼국유사 기록 속의 실제 장소들은 아마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에 관한 기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