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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옥저는 어디에 위치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6. 26. 23:46

윤여동설 - 옥저는 어디에 위치했을까? - 최초주장

 

 

 

 

                                    

  옥저에는 북옥저, 남옥저, 동옥저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고 있다.
  다만 삼국지와 후한서 동옥저전의 기록 즉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 맥과 접했다는 기록을 한반도에 적용하여 동쪽의 바다는 동해로, 개마대산은 개마고원으로, 읍루는 두만강 북쪽 연해주로, 부여는 백두산 북쪽으로, 예, 맥은 강원도로 비정하여 함경남도 함흥 부근을 동옥저로 비정하기도 하고, 또 어느 사람은 함경북도 길주 부근이 동옥저였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서의 기록을 한반도 함경도에 비정한 것일 뿐 실제 그 곳에서 동옥저의 왕궁이나 무덤 그리고 유물이나 금석문 등이 출토된 일은 없다.
  그리고 삼국지 동옥저전에는 동옥저의 묘제에 대하여,
  "장사를 지낼 때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장이나 되고 한쪽을 열어놓아 입구를 만든다. 새로 사람이 죽으면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시신이 묻힐 만큼만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 뼈만 간추려 곽 안에 안치한다. 온 집안 식구를 모두 한 곽 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에 모양을 새긴다.
또 질그릇 속에 쌀을 담아 곽의 입구 곁에 걸어둔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함경도 지역에서 이러한 형태의 묘제가 발견된 예가 없다고 한다.   묘제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닌데도.............  

 

                [위 사진은 바이칼호수부근 브리야트 무덤 목각상인데, 아마 옛날 북옥저인들이 그곳까지 옮겨가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함경도 지역이 정말로 옛 동옥저였는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추모왕(주몽왕) 10년(B.C.28) 조를 보면,
  "겨울 11월 부위염을 시켜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그 지역을 고을로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북옥저가 있었는데, 고구려 건국초기에 고구려에 복속되어 소멸했음을 알 수 있고,
  또 태조대왕 4년(A.D.56) 조를 보면,
  "가을 7월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동쪽으로는 창해까지,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넓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동옥저도 이때 고구려에 병합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의 조하(潮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강물이 구불구불 흐르며 형성된 지형이 마치 스님들의 머리모양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지형은 고려 때가 되면 거북이 머리모양과 같다고 하여 그 부근이 귀주(龜州)로 바뀌게 된다. 고려 때 귀주대첩의 현장이 바로 지금의 고북구 부근이다.   

 

  후한서 동옥저전을 보면,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없애고 후에 모두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 
  그 땅이 작아 큰 나라의 사이에 끼어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국경의 남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이다)으로 읍루와 접했다.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바위굴 속에서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내려와 읍락에서 산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위만조선이 한 무제에게 멸망당하고 한사군이 설치될 때 옥저성이 현토군의 치소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기원전 75년에 현토군이 구려의 서북쪽으로 관할지를 옮기자 그 나머지 땅은 낙랑동부도위에 속했다가 결국 고구려에 편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옥저는 위만조선의 동쪽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예(동예)의 북쪽에 위치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왕검성)의 위치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되고, 예(동예)는 내몽골 고륜기 일원으로 비정되므로 동옥저는 내몽골 교두진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옥저의 위치를 정확히 밝혀주는 옛 기록은 찾기 어렵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A.D.32) 조에, "여름 4월 왕의 아들 호동이 옥저에 놀러 갔더니 낙랑왕 최리가 나와 다니다가 호동을 보고는 '그대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대가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함께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의 딸로서 아내를 삼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옥저의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게 한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현 북경 연경현 영녕진)이었고, 최리의 낙랑국의 도읍은 옛 왕험성(왕검성)인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을 것인데, 이때 호동왕자는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칠로도산(단단대령)을 넘어 남옥저까지 갔었다고 보여진다.

 

☆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서기 30년에 낙랑동부도위를 쳐 빼앗아 고구려에 편입시켰으므로 그 아들인 호동왕자가 옥저(남옥저)에 놀러 갈 수 있었을 것이고, 서기 37년에는 최리의 낙랑국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편입시키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7년 후인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살수 이남의 낙랑 땅 일부를 탈환하여 다시 낙랑군을 설치하게 된다. 이 후한낙랑군이 서기 313년까지 존속하다가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소멸하게 되는데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이다.    

  그렇다면 남옥저는 내몽골 적봉, 객라심기 부근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남옥저로부터 800리 떨어져 있었다는 북옥저는 지금의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지금의 내몽골 소랑하 북쪽, 서랍목륜하 남쪽지역이 옛 북옥저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고구려의 개마대산이란 한반도의 개마고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대광정자산 북쪽 대흥안령산맥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단단대령은 지금의 칠로도산산맥을 말하는 것이다.
          
[세 옥저의 위치]
                                   

 

              부여                  읍루                       대해         
                                 (속말말갈)   
                   개
                   마              북옥저
        고구려  대                      동옥저              대해
                   산             남옥저
                      
                                    맥         예(동예)

             
  이렇듯 대흥안령산맥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옥저를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함경도 부근에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니 어찌 함경도에서 옥저의 흔적 하난들 발견할 수 있었으랴.
  우리 역사가 얼마나 엉터리로 해석되고 교육되고 있는 것인지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역사의 현장은 대륙인데, 우리는 그 기록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솔직히 역사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대륙에서 일어났던 역사기록 모두를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의 적당한 장소에 그 기록을 적용하여 억지로 때려 맞추고 있으니 그게 어찌 역사일수 있을까?
  그리고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어쩌니, 탐원공정이 어쩌니 하고 있으니 아마 중국의 역사 학자들은 쾌재를 부르며 그래 너희들은 대륙에 너희 옛 땅이 있었던 것을 알 필요 없이 영원히 한반도 부근만이 너희 옛 땅인 줄 알고 살아라 하면서 마음놓고 역사를 왜곡해도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말해줘도 많은 사람들은 필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필자의 주장이 말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신라의 흔적들이 한반도 경주에 많이 있고, 백제 무령왕릉이 한반도 공주에 있으며,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사서들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가 북위의 수십만 기병의 침공을 물리쳤다고 했으며, 예(동예)는 진한(신라)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평양성은 옛 왕검성이요,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왕검성의 서쪽과 남쪽으로 패수가 흐른다고 했는데, 지금 난하는 바로 승덕시의 서쪽과 남쪽을 흐른다. 지금의 난하가 바로 옛 패수인 것이며, 승덕시 부근이 바로 옛 고조선, 위만조선의 왕검성이었고, 한나라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이었고, 당나라의 초기 안동도호부였고, 고려의 서경이었다.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은 한반도가 아니라 북경(이곳이 옛 요동이었다)의 북쪽, 동북쪽, 동쪽 부근이었다.
  한반도보다도 더 큰 우리의 옛 땅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 후세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대륙 우리의 역사 강역 모두를 영원히 잃어버리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