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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려 남경(한양)의 위치 찾기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1. 5. 08:04

윤여동설 - 고려 남경(한양)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 고려 남경 : 고려 남경의 궁궐은 면악(面嶽)을 뒤로 하고, 동남 방향(임좌병향)으로 건축되었다고 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태봉왕 궁예를 몰아내고 서기 918년 6월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고는 919년 정월 송악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개경이라 하게 되는데, 개경은 지금의 황해도 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사절요에는 왕건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눈은) 용안과 같이 반짝이고, 턱이 풍만하며 이마가 넓었다. 기개와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컸으며, 너그럽고 후하여 세상을 구제할 만한 도량이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서기 918년 3월 고려 태조 왕건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왕창근이라는 장사꾼이 시장에서 어느 거사로부터 거울을 하나 사서 가게에 걸어 두었는데, 햇빛이 비치자 그 거울 속에 아래와 같은 글씨가 나타났다. 

  [삼수중 사유하에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보내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몰게 될 것이다. 이미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 가운데에 몸을 감추었고, 한 용은 흑금의 동쪽에 형상을 나타내 혹은 성하기도 하고, 혹은 쇠하기도 하는데, 성하고 쇠한 것이 사라지게 되면 나쁜 진재는 사라질 것이다]

  거울을 판 거사는 용모가 수려하고, 수염과 머리털이 희고, 옛 관을 쓰고, 거사의 옷을 입었으며, 왼손에는 바리를 들고, 오른손에는 헌 거울을 들고 왔었다.
  그리하여 왕창근은 그 거울이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당시 왕위에 올라있던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가 그 거울을 판 거사를 찾아 보라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는데, 동주 발삽사라는 절에 오래된 상이 하나 있었는데, 거울을 팔러 왔던 그 거사의 모양과 같았으며, 왼손과 오른 손에 역시 바리와 거울을 들고 있어 그를 궁예에게 보고했더니 궁예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문인 송함홍, 백탁, 허원 등을 시켜 그 글씨를 해석하게 하였다.
  송함홍 등이 모여 해석해 보니,
  삼수중 사유하에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보낸다는 것은 진한, 마한을 말하는 것이었고, 어느 해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 가운데에 몸을 숨기고, 한 용은 흑금 동쪽에 형상을 나타낸다 한 것은 청목은 소나무를 말하는 것이니 송악군 사람으로 용(龍)자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왕 시중이 왕후의 상이 있으니 이 분을 두고 한 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흑금은 철(쇠)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을 이르는 것이 틀림없어 지금의 임금 궁예가 처음 이곳에서 일어났는데, 결국 이곳에서 멸망할 모양이라 생각되었다.
  또한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몬다는 것은 왕 시중이 나라를 다스리게 된 뒤에 먼저 계림(신라)을 얻고 뒤에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뜻일 것이라고 해석이 되었다.
  그러자 세 사람이 의논하기를, "왕이 시기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약 사실대로 아뢰면 왕 시중이 반드시 해를 입게 될 것이며, 우리들 역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는 이윽고 거짓으로 꾸며서 보고했는데, 그 해 6월에 이르러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이 왕건을 추대하고 궁예를 쫓아내 고려를 건국하게 되고, 궁예는 도망쳐 배가 고파 보리를 뜯어먹다가 부양(斧壤) 백성들에게 잡혀 죽었다고 한다.  
  신라의 최치원도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왕건에게 글을 보내 "有鷄林黃葉 鵠嶺靑松之(계림은 낙엽이요, 곡령은 푸른 솔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고 하는데, 결국 935년 12월에 이르러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바치게 되어 신라를 합하게 되자 고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공으로 봉하고, 옛 신라 땅을 경주라고 고쳐 정승공에게 식읍으로 주고, 936년 9월에 이르러서는 후백제를 쳐 견훤의 아들인 신검의 항복을 받아 명실공히 통일제국 고려를 역사에 등장시키게 된다.

 

  고려는 개국초기에는 도읍인 개경을 중경이라 하고 옛 고구려의 도읍 평양을 서경이라 했으며, 옛 신라의 도읍 서라벌(금성)을 동경이라 했다.
  그러다가 동경을 주(경주)로 격하시키게 되어 중경과 서경 만이 남게 되자 후일에 이르러 새로이 남경을 건설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려의 도읍 개경이 지금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 서경이 북한 평양, 남경은 서울, 경상북도 경주가 동경이었다고 알고 있어, 고려사에 대한 모든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해석하려 한다. 
  그런데 필자는 그 모든 것이 잘못 되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고려는 한반도가 중심 강역이 아니었고, 도읍 개경은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이기 때문이다.
  고려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 중심 강역이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고려 역사를 정확히 밝힐 수 있는 비밀의 열쇠인데,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한반도에 살고 있는 것 때문에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서울에서 고려 남경의 흔적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고려가 개국하고 세월이 흘러 고려 숙종 원년(A.D.1096) 8월에 이르자 위위승 동정 김위제가 글을 올려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하게 된다.
  그리고는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하는 당위성을,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국에 도읍할 곳이 세 곳 있으니 송악(松岳)이 중경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이 되며, 평양이 서경이 되는데, 11, 12, 정월, 2월은 중경에 머물고, 3, 4, 5, 6월은 남경에 머물며, 7, 8, 9, 10월은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와서 조회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개국한 뒤 160여 년에 목멱양에 도읍한다' 했는데, 신은 지금이 바로 새 서울에 순주할 시기라고 여깁니다.
  지금 나라에 중경(개경)과 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없으니 삼각산 남쪽 목멱산 북쪽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때때로 순주 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하게 되고 이에 일관 문상도 김위제의 말에 찬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숙종 4년(A.D.1099) 9월에 이르러 왕이 왕비와 원자를 데리고 양주에 도착해 도읍할 땅을 둘러보게 되고,
  숙종 6년(A.D.1101) 9월에는 남경 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추, 어사대부 임의, 지주사 윤관 등에게 명하여 돕도록 한다.
  그런데 10월에 최사추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노원역, 해촌, 용산 등 여러 곳에 나아가서 산수를 살펴보았으나 도성을 건설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은 산형과 수세가 옛 문서와 부합되니 주산줄기의 중심 큰 맥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지형에 따라서 도성을 건설하기를 청합니다"

하게 된다.

   그러자 숙종 7년(A.D.1102) 3월에 이르러 중서문하에서 아뢰기를 "새로 남경을 건설하려면 반드시 땅을 넓게 차지하게 되어 백성들이 토지를 많이 빼앗기게 될 것이니 산을 따라서 지세대로 하시거나 혹은 물을 한계로 하여 지형을 정하여 먼저 안으로는 산수의 형세를 따라

동쪽으로는 대봉(大峰)까지, 남쪽으로는 사리(沙里)까지, 서쪽으로는 기봉(岐峰)까지, 북쪽으로는 면악(面嶽)까지를 경계로 하기를 청합니다

" 하게 되어 그렇게 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궁궐 건축을 시작하게 된다.  

 

  면악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면 고려 남경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려 남경의 위치]              
                               (삼각산) 
                                 면악

 

             기봉               남경               대봉

 

                                사리


숙종 9년(A.D.1104) 4월에 드디어 남경의 궁궐이 완성되어 7월에 이르러 왕이 남경의 궁궐을 둘러보기도 하나 실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지는 않는데, 이때 건설된 남경의 위치를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에 이르러 현 경복궁 터가 옛 고려 남경의 궁궐 터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리고 다시 고려 인종 6년(A.D.1128) 8월에 이르러 또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상경(개경)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타서 남은 것이 없고, 서경에는 왕기가 있으니 마땅히 임금께서 옮겨가서 상경으로 삼아야 된다." 하였고,
  묘청 등이 인종에게 아뢰기를,
  "신 등이 서경 임원역(林原驛)의 지세를 살펴보니 이것이 소위 풍수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花勢)입니다. 만약 여기에 궁궐을 지어서 거처하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으며,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와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바로 공사에 들어가 다음해 정월 서경에 새 궁궐이 완성되고, 2월에 왕이 직접 서경의 새 궁궐을 둘러보게 되는데, 결국 고려는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지 못했고, 이는 묘청의 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신라의 서라벌(금성)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이며, 백제의 도읍 한성은 진황도 도산(都山)남쪽 부근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땅과 백제 땅 그리고 신라 땅을 차지한 고려는 당연히 옛 삼국 땅에 위치했을 것이다.
  고려의 개경은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寬城, 관성만족자치현)으로 비정되고, 서경은 옛 고조선의 왕검성으로서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의 남경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고려의 도읍 개경은 지금 북경 동쪽의 난하 부근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에 위치하고 있었고, 서경은 그 북서쪽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였는데, 남경은 그로부터 수천리 멀리 떨어진 한반도의 서울에 설치했을까?

  그랬을 리는 없을 것이고, 고려는 남경을 개경(현 하북성 관성)의 남쪽 멀지 않은 곳에 설치했을 것이다.  
  처음에 김위제는 남경 천도를 주청하면서 그 위치를 북쪽으로는 감악, 남쪽으로는 관악, 동쪽으로는 양주 남행산, 서쪽으로는 수주 북악이 둘러싸고 있는 그 가운데를 추천했으나, 최사추, 임의, 윤관 등이 직접 가서 그 부근의 지형을 실사해 보고는 결국 북으로는 면악, 남으로는 사리, 동쪽으로는 대봉, 서쪽으로는 기봉이 있는 그 가운데 땅에 남경을 건설하게 되는데, 고려사 열전 김위제 전을 보면 김위제는 처음에 남경으로의 도읍 이전을 건의하면서 풍수 상 한수를 건너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때 고려에서는 도읍인 개경에서 볼 때 한수를 건너지는 않은 곳에 남경을 건설했을 것이다.

  한수란 지금 한반도 서울의 한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진황도 도산 부근에 위치한 어느 강을 말하는 것이므로 고려의 남경은 대략 대륙의 관성현 남쪽과 난하 동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필자의 연구대로라면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도산 남쪽 부근에 고려의 남경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려의 역사가 대륙역사인 것을 알지 못하고 한반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고대 역사를 한반도에서 찾는 한 천년이 가도 진실은 밝힐 수 없을 것이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발상을 전환하고 역사서를 보면 중국의 북경을 지나 그 서남쪽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음이 환히 보이는데 왜 그를 보지 못하고 좁은 한반도 만을 고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