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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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조선과 삼한은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7. 3. 21:17

윤여동설 - 고조선(古朝鮮)과 삼한(三韓)은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중국의 주나라가 평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낙양으로 옮김으로써 동주시대가 시작되는데, 이 시기를 역사에서는 춘추전국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때는 주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던 때였으므로 제후국이 강성해져 패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는데, 이 시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라 하며,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54년 사이의 기간을 말한다.
  이때 소위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여 한때라도 패자의 자리를 차지했던 다섯 나라인 진(晉), 제(齊), 초(楚), 오(吳), 월(越)이 있었지만 그 외에도 연(燕), 진(秦), 위(衛), 송(宋), 정(鄭), 노(魯), 조(曹), 진(陳), 채(蔡), 기(杞) 등의 나라가 있었다. 
  그리고 춘추시대가 지나자 중원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변화하게 되어 천하의 패자 자리를 놓고 각 국이 무력으로 다투게 되는데, 이 시기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하며 기원전 453년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시기인 기원전 221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전국시대에는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한 일곱 개 나라 즉 진(秦), 초(楚), 연(燕), 제(齊), 조(趙), 한(韓), 위(魏)가 천하를 나누어 차지하고 자웅을 겨루었다.
  이를 역사가들은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부르는데, 이 중에서 아직까지 그 위치를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고, 그 중의 하나가 "한(韓)"이다. 
  그런데 필자는 블로그에 글을 써 올리면서 우리 역사의 진실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수십만 명이 필자의 블로그를 방문하여 글을 읽고 가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퍼가기도 했다.
  모두들 필자의 새로운 주장에 조금이라도 공감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고, 이러한 관심들이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고대역사의 진실 찾기에 나서게 할 것이고, 결국에는 우리 고대 역사도 명쾌하게 밝혀질 것이라 기대해 본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전국칠웅의 "한(韓)"은 우리의 신라, 백제, 가야의 전신이었던 "한(韓: 삼한)"과는 전혀 별개의 나라로서, 전국시대의 한(韓)은 중국 대륙에 있던 나라였고, 우리의 한(韓)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나라였는데 우연하게도 나라 이름이 같았을 뿐이라고 이해함으로써 중국 춘추전국시대 역사 속의 전국칠웅의 "한(韓)"은 우리 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나라였다고 인식했다.
  그런데 우리의 "한(韓)"이 사실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을 중심으로 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무려 78개의 소국을 거느렸던 나라였다. 
  삼국지 한전을 보면,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하니 면적이 방 4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우리의 한(韓)에 대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지 한전의 기록 속에는 또 위략의 기록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를 보면,『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고는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은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 2천여리(1천여리라고도 한다)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만반한이라고도 한다)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아 마침내 조선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 진개는 연나라 소왕 때의 인물로서 이때가 연나라의 최전성기였다.
따라서 진개가 조선을 침공했던 것은 소왕 말기인 기원전 280년경으로 보인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에 조선왕 부(否)가 왕위에 올랐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 상 진나라에 복속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나 진항(진승과 항우)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제·조의 백성들이 고역을 견디다 못해 점점 준에게 망명해 가므로 준은 이들을 서부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 연나라는 지금의 북경 서남쪽 하북성 보정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고, 제나라는 산동반도 일원에위치했던 나라이며, 조나라는 지금의 산서성 북부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다. 그런데 이들 나라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폭정을 피하여 고조선으로 망명해 올 수 있었다면 고조선이 바로 이 세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은 요수[필자주 : 사서의 기록에는 패수라고 되어 있으나 오기이므로 고친다)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관(노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치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에게 투항하고는 서쪽 변방에 살게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임명하고 규(圭)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해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필자주 : 이때 위만이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서 살며 자신에게 주어진 영지 사방 백리 땅을 다스리던 곳이 험독이다]
  만(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보내 속여서 말하기를, "한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 길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뒤돌아 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필자주 : 이때 위만이 공격하여 빼앗은 곳이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으로서 준왕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험독과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은 전혀 별개의 장소로서 서로 1000리쯤 떨어진 곳이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이때 왕검성을 위만에게 빼앗긴 준왕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건너 한의 지역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했고, (한)은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이 기록을 준왕이 지금의 북한 평양을 위만에게 빼앗기고 좌우근신들을 이끌고 대동강 하류쯤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전북 익산 금마로 와서 다시 한왕에 올랐다고 역사를 해석했으나 이는 우리의 엄청난 착각이었다.
  한(韓)은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대륙에 위치해 있던 방 4천리 강역을 가진 커다란 나라였던 것이다.
  이는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 낙랑군 수성현이었다는 중국 사서들의 기록과 "한은 삼종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모두 78국이며 백제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이다.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인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한다. 그 땅을 합하면 방 4천여 리이다"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 고대의 왜는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낙랑은 한반도에 있던 것이 아니라 하북성 승덕시를 중심으로 위치했기 때문에 삼국의 전신인 한(삼한) 역시 그 부근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한(韓)도 결국에는 진시황에게 무릎을 꿇고 잠시동안 진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의 새로운 질서 속에 편입되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한(韓)나라 사람인 장량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전 재산을 털어 진시황을 죽여줄 자객을 구했는데, 이때 선발된 사람이 바로 예국 사람 창해역사 여홍성이었다.

 

☆ 원래의 예국은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고, 그 가까이에 창해가 있었다. 그러다가 그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기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진한의 북쪽에 위치한 임둔군 땅을 차지하고 다시 예를 세웠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동예라 한다.  

 

  그리하여 여홍성은 기원전 218년에 120근 짜리 철퇴를 만들어 진시황이 순행하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박랑사라는 곳에서 진시황을 저격했으나 죽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물론 여홍성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죽게 되었고, 장량은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수배되는 신세가 되자 한(漢) 고조 유방의 휘하로 들어갔고, 그의 장자방이 되어 결국 진나라를 없애 조국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고, 한(漢)나라의 창업공신이 된다.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장자방(장량)이 바로 우리의 선조였고, 진시황을 저격한 창해역사 여홍성도 바로 우리의 선조였던 것이다.
  그 후 진시황도 기원전 210년에 죽고, 얼마 후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중원을 차지하자 고조선도 변혁을 맞게 되는데, 기원전 194년에 왕검성을 위만에게 빼앗기고 좌우근신과 궁인들만을 거느린 준왕이 급히 한(韓)의 땅으로 도망쳐 다시 한왕에 올랐는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 진황도, 요녕성 호로도, 흥성, 수중을 중심으로 하는 그 일원이었다.
  그곳은 원래 준왕이 차지하고 있던 나라의 나머지 반쪽의 땅이었다.
  비록 장성 북쪽은 위만에게 빼앗겼으나 장성 남쪽의 땅 즉 지금의 산해관에서부터 북경북쪽을 지나는 장성의 남쪽 땅으로 도망쳐 다시 한왕에 올랐던 것이다.
 

 

☆ 위만조선의 강역도 방 수천리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한의 강역도 방 4천리였다고 하니 원래 준왕이 다스리던 고조선(기자조선)의 강역은 최소한 방 7-8천리정도가 되는 대제국이었을 것인데, 다만 상고시대에는 지금보다 거리단위가 짧았다. 예를 들어 10리가 지금과 같이 약4km가 아니라 약 2.3km였다고 한다.

 
  지금의 당산 풍윤 부근이 바로 한(韓)의 도읍 월지국(목지국이라고도 한다)이었을 것이고, 한(韓)은 중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패권을 다투었던 전국 칠웅의 한 개 나라였던 것이다.
  우리의 옛 땅은 최소한 태행산맥까지였고, 그 북쪽, 동쪽은 모두 우리의 역사강역인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대륙의 한편을 나누어 차지하고 천하의 패권을 다투던 민족이었지 한반도에 웅크리고 외세의 침략을 받기나 한 약소한 민족이 아니었다.
  한민족은 웅대한 꿈을 이룰 수 있는 저력이 있는 민족이다.
  한민족이여!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