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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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패수(浿水)는 한반도 대동강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1. 8. 09:17

윤여동설 - 패수(浿水)는 한반도 대동강이 아니다 - 최초주장

 

  패수(浿水)는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 강이다.
  패수를 제대로 찾아야만 우리는 수수께끼 같이 전해진 우리 옛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의 대동강이 옛 기록 속의 패수라고 하고,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하고 있는데, 우리 역사를 조금만 깊이 연구해보면 우리 역사에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 역사의 중심점이 대륙인 것을 모르고, 모든 역사 기록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해석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는데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1년(A.D.247) 조에는,
  "평양이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집이다. 혹은 왕이 도읍 했다 하여 왕검이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평양이 옛 왕검성이었음을 알게 하는데,
  북애자의 규원사화에도,  
  "단군께서 나라안 여러 주의 지세를 살펴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벌판에 정하니 곧 왕검성(필자주 : 아사달왕검성)이다. 단군이 도읍으로 정한 왕검성에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지었다. 우수하 가에 산지 10년 만에 백산의 남쪽, 패수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평양이며 두 번째 왕검성(필저주 : 평양왕검성)이다" 라고 평양 왕검성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 그곳이 패수 강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도,
  한 무제가 육군인 순체와 수군인 양복을 보내 위만조선을 공격할 때 왕검성이 패수 가에 위치하고 있어 수군을 지휘한 양복은 제(현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워 패수를 타고 올라가게 되고,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도 수군을 지휘한 내호아가 패수를 타고 올라가 평양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평양성이 패수 강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고,
  수서 고구려전에도,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북사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구당서 고(구)려전에도,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현 서안)에서 동쪽으로 5천1백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수경에는,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於臨浿縣 東入於海)" 라고 기록하고 있어 지금 대동강과는 물길이 반대로 흐르기 때문에 북한 평양을 지나는 대동강을 옛 기록 속의 패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낙랑군은 만리장성이 시작되고 갈석산이 있는 그 부근을 낙랑군이라 했으므로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북경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패수는 한반도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북경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진황도 서쪽 갈석산 부근을 흐르는 강은 난하라는 강인데, 난하는 섬전하(閃電河)와 이손하(伊遜河)가 합해져 난하가 되어 흘러 승덕시의 서쪽과 남쪽을 지나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승덕현에서 노우하(老牛河)와 합해지고 다시 대장자에서 유하(柳河)를 합류한 후 계속 흐르다가 폭하(瀑河)를 합류한 후 반가구수고로 들어가 만리장성을 통과하고 다시 남쪽으로 대흑정수고를 지나고 천서를 지나 장하(長河)를 합류하면서 동쪽으로 잠깐 흐른다. 그리고 다시 청하(淸河)와 합류해 방향을 동남쪽으로 돌려 천안을 지난 후 노룡에서 청룡하(靑龍河)와 합류한 후 서남쪽으로 잠깐 흐르다가 낙정 동쪽에서 물길을 동쪽으로 돌려 발해로 들어가는 강으로서 수경에서 말하고 있는 패수에 대한 기록은 바로 이 강 즉 지금의 난하 강물의 흐름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난하를 요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데, 이는 잘못 비정한 것으로서 요수는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를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옛 역사 강역은 북경부근까지였다. 우리는 지금의 요하로부터 최소한 북경 부근까지의 옛 역사 강역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 땅이 옛날부터 중국 땅이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필자는 앞글들에서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한다고 했는데, 지금 승덕시는 난하의 동쪽,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한 무제 때 양복은 발해를 건너 열구(난하구 또는 반가구수고를 말하는 듯 하다)에서 패수 즉 지금의 난하를 타고 올라가 왕검성 남쪽에 도착했던 것이고, 순체는 요동인 지금의 북경부근을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진군하여 백하(밀운수고)를 건넌 다음 고북구를 통과하여 승덕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을 왕검성의 서북문 쪽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수나라의 내호아가 타고 올라온 강도 바로 이 강 즉 난하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백제의 온조왕이 도읍을 옮기고 국경을 다시 획정하여 북쪽으로는 패수에 이르렀고, 동쪽은 주양, 서쪽은 대해, 남쪽은 웅천까지였다고 한 기록 중의 그 패수가 바로 지금의 난하를 말하는 것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기도 한다.
  평양성은 지금의 승덕시 부근이었고, 한성은 지금의 진황도 도산 부근으로 비정되는데, 도산에서 승덕시까지는 약 3백여 리 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백제에서 고구려의 평양성을 쉽게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고, 거꾸로 백제의 한성 역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게 두 번이나 함락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백제와 고구려간의 전쟁이 한반도의 서울과 북한의 평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옛날 왕검조선은 이 패수(현 난하)를 중심으로 번성했고, 위만조선 역시 이 패수를 중심으로 나라를 이루었으며, 낙랑군도 이 패수를 장악하고 상당기간 존속할 수 있었다.
  고구려 역시 초기에는 압록강(현 백하) 중류인 적성현 후성진 부근에서 나라를 세우고 발전했으나 나라를 넓혀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후일에 이르러서는 패수에 연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겨 패수(현 난하)를 중심으로 강역을 넓혀가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하여 김부식은 삼국사기 지리편에서 고구려가 중국의 북쪽으로부터 점점 동쪽 패수 옆으로 옮겨왔다고 기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고구려를 이어 일어났던 발해가 이 패수를 차지하고 사방 5천리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고, 고려 역시 패수가에서 500년 왕조를 이룰 수 있었다.

 

우리는 발해국이 한반도 두만강 북쪽에서 건국되어 번성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발해국의 건국지인 태백산 동북쪽 동모산과 발해의 중경현덕부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파림우기로 비정되고, 상경용천부는 파림좌기이며, 고려의 개경은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이었다.

   
  패수를 찾은 것은 우리 역사를 반쯤 찾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우리는 아리송하기만 했던 고대사를 혼란없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옛 강역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난하가 천년도 넘게 찾아 헤맨 패수(浿水)였는데 우리는 그 많은 세월동안 지금의 북한 대동강을 패수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