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일본천황은 요동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7. 20. 12:08

윤여동설 - 일본천황은 요동반도에서 살다가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이다 - 최초주장

 

 

  지금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천황들이 원래부터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수천 년 간 대를 이어 천황노릇을 했으며, 왜국의 건국시조라는 신무천황으로부터 평성천황까지 125대이고, 기원전 660년부터 2008년 현재까지 2,669년 간 이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유지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왕조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의 왜국이 지금의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중국 요녕성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고, 서기 670년에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뒤에도 수백년 간 요동반도에 그대로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대의 왜국은 섬나라가 아니었으나, 지금의 일본은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언젠가 요동반도를 떠나 지금의 일본열도로 옮겨갔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일본의 위정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숨겨버리고는 신무천황이 왜국을 처음 세운 이래 천황들이 대를 이어 일본열도에 살았다고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아마 천황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천황이 요동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옮겨온 도래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일반 백성들이 천황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우리 조선 왕조 역시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한양(현 서울)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왕조실록에 고조선으로부터 삼한, 삼국, 고려의 역사를 모두 한반도를 중심으로 기술함으로써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는데, 일본과 같은 방법이었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가서 그러한 역사왜곡 방법을 전수해 주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서기는 지금의 일본열도를 중심으로 역사를 조작한 왜곡된 역사서인 것이다.

  한국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처럼..............  

 

  구당서 권199상 열전 제149상 동이 일본국 전을 보면,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又云 其國界東西南北各 數千里 西界南界 咸至大海 東界北界 有大山爲限 山外卽 毛人之國(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해 뜨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일본이라 했다고도 하고, 혹은 왜국이라는 국호가 좋지 않고 우아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으로 바꾸었다고도 한다...............또 이르기를 그 나라의 경계는 동서남북이 각각 수천리 씩인데 서쪽과 남쪽 경계는 대해에 닿았고, 동쪽과 북쪽은 큰산으로 한정되어 있는데, 산 너머는 곧 모인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서쪽과 남쪽만 바다이고, 동쪽과 북쪽은 산으로서 모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동이 왜국 전에는 그 위치에 대하여,
  "倭國者 古倭奴國也 去京師一萬四千里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경사에서 1만4천리 떨어져 있는데, 신라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산과 섬에 의지해 산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왜국이 신라의 동남쪽에 위치했으며,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장안 즉 지금의 서안에서 1만4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구당서에는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와 이웃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별종으로서 마한의 옛 땅에 있다. 경사에서 동쪽으로 6,200리에 있으며,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쪽은 신라까지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까지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까지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북사 권94 열전 제82 왜국 전에는,
  "倭國在百濟新羅東南 水陸三千里 於大海中 依山島而居(왜국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 수륙 3천리 떨어진 대해 중에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해 산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왜국이 신라와 백제로부터 동남쪽으로 3천리를 가야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통전 권185 변방1 동이상 왜 전에는,
  "倭自後漢通焉 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居 凡百餘國(왜는 후한 때부터 통호했다. 대방동남 대해 중에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해 살고 1백여 국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 왜 전에는,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산과 섬을 의지하여 국읍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왜 전에는,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島爲居 凡百餘國(왜국은 한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해 살고 1백여 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 현토·낙랑 조에는,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낙랑해 가운데 왜인이 있는데, 1백여 국으로 나누어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  고대의 왜국이 필자의 주장대로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했던 것일까? 
  옛 사서들은 왜국의 위치에 대하여 낙랑해 가운데 있다고도 했고, 한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고도 했으며,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고도 했고,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수서나 당서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수나라, 당나라 때 낙랑 땅의 일부를 차지했다는 말로써 이는 신라가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 금주(錦州)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고, 그 서남쪽인 하북성 난하 중, 하류 일원에 백제, 그 북쪽에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곧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고 좌우궁인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쳐 다시 세운 우리의 한(韓)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바로 북경, 천진, 당산, 진황도, 조양, 호로도, 금주 부근에 사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고, 그 북쪽에 다시 사방 수천 리에 이르는 위만조선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므로 왕검조선 역시 한반도의 평양에 도읍했던 것이 아니라 북경, 천진, 하북성 당산, 진황도의 북쪽  부근인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도읍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의 난하 중, 하류 일원이 백제였고, 호로도, 금주 일원이 신라였다면 그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위치했다는 고대의 왜국은 당연히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를 확인해 보기 위하여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생각되는 양직공도 왜국사(梁職貢圖 倭國使)조의 기록에 따라 왜국의 위치를 찾아보자.
"倭國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居
왜국은 대방의 동남쪽 대해 중에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하고 산다. 
自帶方循海水 乍南乍東到 其北岸
대방으로부터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해안이다.
歷三十餘國☆萬餘里
30여국으로서...만여리(떨어져 있다)
倭王所在☆大抵☆在會稽東
왜왕이 있는 곳은 ...대저...회계의 동쪽에 있는 (땅과 비교된다.)
氣暖地溫
기후가 온난하고 땅이 따스하다.
出眞珠靑玉
진주와 푸른 옥,[요녕성 수암에서 출토되는 수암옥이 매우 유명하다]

牛馬虎豹羊鵲☆☆☆☆
곰, 소, 말,호랑이,표범,양,까치,... 가 산출된다.
面文身以木綿帖首
얼굴에는 문신을 하고, 면으로 만든 천으로 머리띠를 한다.
☆橫幅無縫☆☆☆
...횡폭 바느질하지 않은 ...(바느질하지 않은 긴 천을 몸에 두른다?)
[이하는 지워져 내용을 알 수 없다]"

 

 

 

                                                                                                [수암옥으로 만든 작품들]

 

  그리고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고 양자강 남쪽에서 고대의 왜국 땅을 찾고 있다면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지금부터라도 필자의 주장에 따라 옛 사서들의 기록을 다시 해석하고 비정해 보라. 우리의 잃어버린 대륙의 옛 땅을 찾다보니 왜국의 위치도 찾아내게 된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잃어버린 고대의 왜국 땅을 처음으로 찾아 준 필자에게 감사해야할 것이다.
  고대의 왜국 땅을 한국 사람인 필자가 찾아주다니 아이러니하기는 하다.
  천황이 도래인 임을 숨기기 위해 대륙의 요동반도 땅을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모든 걸 밝히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일본인 스스로의 몫이다.
  일본 황실 도서관 수장고에 한국에서 탈취해간 옛 기록들이 많지 않은가? 
  일본은 엄연한 대한민국 땅인 독도에 대하여 쓸데없는 헛소리를 할 일이 아니라 지금 중국의 요동반도가 고대의 왜국 땅이었음을 밝히고, 그 땅을 자기네 옛 땅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고, 천황이 옛날 요동반도에서 살다가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 임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이는 왜국은 물론 우리의 고대역사까지도 모두를 새롭게 비정하고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옛 대방이었던 지금의 북경 동쪽 준화부근에서 강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온 후 동쪽으로 발해연안을 따라 진황도를 지나고, 요하하류인 요동만을 지나면 바로 이곳에 고대의 왜국이 위치했다고 양직공도 왜국사 조는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삼국사기 기록 속 신라 백제와 고대 왜국과의 접촉기록인데, 신라의 위치를 요녕성 호로도 일원으로, 백제의 위치를 하북성 당산, 진황도 일원으로 비정하고 읽어보면 기록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 8년(B.C.50) 왜인 군사가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신과 같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 돌아갔다.
38년(B.C.20) 봄2월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방하게 했다...............호공이란 인물은 그 족성이 자세하지 않지만 본래는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었기 때문에 호공이라 불렀다.

 2대 남해차차웅 11년(A.D.14)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므로 6부의 병사로서 이를 방어했다.

3대 유리이사금

4대 탈해이사금 2년(A.D.58) 봄정월 호공을 임명하여 대보로 삼았다.
3년(A.D.59) 여름5월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서로 방문했다.
17년(A.D.73)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했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막도록 했는데 이기지 못하고 우오가 죽었다.

5대 파사이사금

6대 지마이사금 10년(A.D.121) 여름4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
12년(A.D.123) 봄3월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7대 일성이사금

8대 아달라이사금 20년(A.D.173) 여름5월 왜국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 왔다.

9대 벌휴이사금 10년(A.D.193) 6월 왜인이 큰 흉년이 들어 식량을 구하려고 온 자가 1천명도 넘었다.

10대 나해이사금 13년(A.D.208) 여름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을 보내 군사로서 막게 했다.

11대 조분이사금 3년(A.D.232) 여름4월 왜인이 졸지에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 왕이 친히 나아가 싸우니 적이 흩어져 달아나므로 날쌘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였다.
4년(A.D.233) 5월 왜병이 동쪽변경을 노략질했다.
가을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에서 싸웠는데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배를 태우니 적이 물로 뛰어들어 모두 죽여버렸다.

12대 점해이사금 3년(A.D.249) 여름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13대 미추이사금

14대 유례이사금 4년(A.D.287) 여름4월 왜인이 일례군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포로 1천명을 사로잡아 갔다.
6년(A.D.289) 여름5월 왜병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와 갑옷, 병기를 수리했다.
9년(A.D.292) 여름6월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일길찬 대곡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구원하여 보전했다.
11년(A.D.294) 여름 왜병이 와서 장봉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했다.
12년(A.D.295)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수가 없으니 내가 백제와 더불어 의논하고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쳐들어가고 싶은데 어떠한가? 했다.
  서불한 흥권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니 원정은 모험으로서 예측하지 못한 위험이 있을까 걱정되며, 더구나 백제는 속임수가 많아 늘 우리나라를 물어뜯어 삼킬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과 함께 도모하는 것이 걱정됩니다" 하니 왕이 "옳다"고 했다.   

15대 기림이사금 3년(A.D.300) 봄 정월 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16대 흘해이사금 3년(A.D.312) 봄3월 왜국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의 혼인을 청하므로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35년(A.D.344) 봄2월 왜국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해왔으나 딸이 이미 출가했다고 하고 거절했다.
36년(A.D.345) 봄2월 왜왕이 글을 보내 국교를 끊었다.
37년(A.D.346) 왜병이 갑자기 풍도로 와서 변경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 다시 금성을 포위하고 급히 치므로 왕이 출병시켜 마주 싸우려하니 강세가 말하기를 "적병이 멀리서 왔으니 그 서슬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시간을 늦추어 그 군대가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고 했다. 왕이 옳게여겨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아니했다. 적병이 식량이 떨어져 막 퇴각하려할 때에 강세를 시켜 강한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이를 쫓았다.

17대 내물이사금 9년(A.D.364) 여름4월 왕이 왜병의 대부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주 대적해서는 안 된다고 염려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병기를 들려 토함산 밑에 벌려 세우고 날랜 군사1천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켰다. 왜인이 수효가 많은 것을 믿고 곧장 들어오다가 뜻밖에 복병이 뛰어나와 치니 왜인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
38년(A.D.393) 여름5월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5일이 되도록 풀지 아니하므로 장병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했다.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와서 죽을 장소에 있으나 그 서슬을 당할 수 없다" 하고 이에 성문을 닫고 지키니 적이 아무런 성과가 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이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 보병 1천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으로 쳐서 크게 이겨 많이 죽이고 잡고 있다.

18대 실성이사금 원년(A.D.402) 3월 왜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4년(A.D.405) 여름4월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막고 두 번 싸워 이기고 3백여 명을 죽였다.
6년(A.D.407) 봄3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
여름6월 왜인이 또 남쪽 변경을 침범하고 1백 명을 납치하여 갔다.
7년(A.D.408) 봄2월 왕이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비축하여 우리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시설을 쳐부수고자 했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병기란 흉한 도구요, 싸움이란 위험한 일이라 하는데, 더구나 큰물을 건너 남의 나라를 치는데, 만일 실패를 한다면 후회한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험한 곳을 의지하여 요새를 설치했다가 적이 오면 이를 막아 침입을 못하도록 했다가 유리할 때 나가서 사로잡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남을 이용할 것이요, 이용을 당하지 말라는 것이니 이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14년(A.D.415) 8월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겼다.

19대 눌지마립간 15년(A.D.431) 여름4월 왜병이 와서 동쪽변경을 침노하여 명활성을 포위했다가 아무 성과도 없이 물러갔다.
24년(A.D.440)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가축을 약탈하여 갔다.
여름6월 또 동쪽변경을 침범했다.
28년(A.D.444) 여름4월 왜병이 금성을 열흘동안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져서 그만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을 하려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병가에 궁한 도적을 추격하지 말라했으니 왕께서는 그들을 쫓지 마십시오"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수천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독산 동쪽에 이르러 마주 접전하다가 적병에게 패하여 죽은 장병이 절반이 넘었다. 왕이 창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니 적이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이때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되니 도적들은 귀신이 돌봐주는 것이라 하여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20대 자비마립간 2년(A.D.459) 여름4월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으로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진격하여 월성을 포위하니 사면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 했다.
  왕성을 수비하고 있으니 도적들이 물러가려 할 때 군사들을 출동시켜 공격하여 이기고 패배한 적을 바다 어구까지 추격하니 과반수의 적이 물에 빠져 죽었다.
5년(A.D.462) 여름5월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포로 1천명을 잡아갔다.
6년(a.D.463) 봄2월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니 왕이 벌지와 덕지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길가에 매복했다가 요격하여 크게 이겼다. 왜인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변경에 성 두 개를 쌓았다.
19년(A.D.476) 여름6월 왜인이 동쪽변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장군 지덕에게 명하여 공격하여 이기고 2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20년(A.D.477) 여름5월 왜인이 군사를 일으켜 다섯 방향으로 침범해왔다가 결국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갔다.

21대 소지마립간 4년(A.D.482) 5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했다.
8년(A.D.486) 여름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했다.
15년(A.D.493) 가을7월 임해진, 장령진을 설치하여 왜적을 방비했다.
19년(A.D.497) 여름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했다.
22년(A.D.500) 봄3월 왜인이 장봉진을 쳐서 함락시켰다.

22대 지증마립간

23대 법흥왕

24대 진흥왕

25대 진지왕      

26대 진평왕

27대 선덕여왕

28대 진덕여왕

29대 태종무열왕

30대 문무왕 10년(A.D.670) 12월 왜국이 나라이름을 일본으로 고치고 스스로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서 가까우므로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31대 신문왕

32대 효소왕 7년(A.D.698) 3월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왕이 숭례전에서 불러보았다.

33대 성덕왕 21년(A.D.722) 모벌군에 성을 쌓아서 일본이 침입하는 길을 막았다.
30년(A.D.731) 여름4월 일본국 병선 3백 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동쪽 변경을 습격하므로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34대 효성왕

35대 경덕왕 원년(A.D.742) 겨울10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들이지 않았다.
12년(A.D.753) 가을8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오만하고 무례하므로 왕이 그를 만나지 않으니 그만 돌아갔다.

36대 혜공왕

37대 선덕왕

38대 원성왕

39대 소성왕

40대 애장왕 4년(A.D.803) 가을7월 일본국과 외교를 통하고 우호를 맺었다.
5년(A.D.804) 여름5월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량을 바쳤다.
7년(A.D.806) 봄3월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9년(A.D.808) 봄2월 일본 사신이 왔는데 왕이 후대하였다.

41대 헌덕왕  

42대 흥덕왕

43대 희강왕

44대 민애왕

45대 신무왕

46대 문성왕

47대 헌안왕

48대 경문왕 4년(A.D.864) 여름4월 일본국 사신이 왔다.

49대 헌강왕 4년(A.D.878)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오니 왕이 조원전에서 그를 접견하였다.
8년(A.D.882) 여름4월에 일본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황금 3백 량과 구슬 열 개를 바쳤다.  

50대 정강왕

51대 진성여왕

52대 효공왕

53대 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

56대 경순왕 

 

백제본기

 

17대 아신왕 6년(A.D.397) 여름5월 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12년(A.D.403) 봄2월 왜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왕이 이를 맞아들여 특별히 후하게 대접했다.

18대 전지왕 원년(A.D.405) 전지왕(혹은 직지라고도 한다)의 이름을 양서에는 영이라 했는데 아신왕의 장자이다. 아신왕 재위 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6년에 왜국에 볼모로 가 있었다. 14년에 아신왕이 죽으니 아신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왕의 막내아우 첩례가 훈해를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돌아가기를 청하니 왜왕이 군사 1백명으로서 호송토록 했다.
  전지가 국경에 들어서자 한성사람 해충이 와서 고하기를 "대왕께서 세상을 떠난 뒤 왕의 아우 첩례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원컨대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십시오" 했다. 전지가 왜인을 머물게 하여 자기를 호위케 하면서 바다섬에 의지하여 기다리고 있었더니 나라 사람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영접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5년(A.D.409) 왜국에서 사신을 시켜 야명주를 보내오니 왕이 특별한 예로서 대우했다.
14년(A.D.418) 여름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흰 포목 열 필을 보냈다.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1대 개로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

25대 무령왕

26대 성왕

27대 위덕왕

28대 혜왕

29대 법왕

30대 무왕 9년(A.D.608) 봄3월 수나라 문림랑 배청이 왜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우리나라(백제) 남쪽 길을 통과했다.

31대 의자왕 20년(A.D.660) 무왕의 조카 복신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때에 중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에 웅거하여 당나라를 반대하고 전 임금의 아들로서 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부여 풍을 맞아다가 왕을 삼으니 서북면에서 모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있는 유인원을 포위했다....................유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모여 동시에 주류성으로 가다가 백강구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찌르고 바닷물이 붉어졌다. 이때 부여풍은 탈출하여 달아난 뒤에 그의 있는 곳을 알지 못했는데, 혹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