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이곳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이 진짜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이다]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이 지금의 한반도 압록강 북쪽 요녕성 환인(桓仁)이고, 그곳의 험준한 산꼭대기에 있는 오녀산산성을 졸본성일 것이라 믿고 있다.
학자들이 환인의 오녀산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성일 것이라고 추정하게 된 것은, 환인의 동남쪽이며 호태왕비(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가 서있는 길림성 집안(集安)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국내위나암)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집안의 서북쪽 멀지 않은 환인의 험준한 오녀산 정상에 오래된 산성이 있자 그곳을 졸본성일 것이라고 추정했던 것인데, 사실 그곳 오녀산산성에서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성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줄 유물이나 금석문이 출토된 적은 없다.
그냥 집안에 호태왕비가 서 있고, 그 부근에 수만기의 적석총들이 밀집해 있으므로 집안은 틀림없는 고구려 땅이고, 도읍이었을 것이므로 오녀산산성이 아마 졸본성일 가능성이 많다라고 추정하고 있는 것뿐이다.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된 후 국내성(국내위나암)으로, 환도성으로, 평양성으로, 다시 환도성으로,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다시 평양성,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거나 왕이 이거하였다.
국내성(국내위나암)은 2대 유리왕 22년인 서기 3년 10월부터 산상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도읍이었고,
환도성은 10대 산상왕이 서기 209년 10월에 환도성으로 옮겨 중원으로의 진출을 꾀하려고 하다가 죽었고, 11대 동천왕 20년(A.D.246)에 위나라 관구검에게 환도성을 함락 당하여 도읍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자 다음해 봄 2월에 평양성으로 옮겼고, 16대 고국원왕은 재위 12년(A.D.342) 8월에 이르러 다시 환도성으로 이거하게 된다.
이때 중국 북부지역은 서진이 멸망하고 5호16국 시대의 어지러운 시기였다.
땅을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때였기 때문에 고구려 역시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 이거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모용선비 역시 중원으로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북쪽의 고구려 때문에 불안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전에 고구려의 세력을 먼저 약화시켜 놓기 위해 고구려를 선제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 고구려는 연나라의 기만 전술에 속아 환도성이 다시 함락되고 태후와 왕비가 볼모로 잡혀가게 되어 다시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랬다가 16대 고국원왕,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19대 광개토대왕을 지나 20대 장수왕 15년인 427년에 다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졸본은 지금의 북경 서북쪽 적성현 후성진 부근이고, 압록강은 지금의 백하로서 하북성 적성, 후성진을 지나는 강이고, 요동성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다.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된 후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했는데, 졸본은 하북성 적성 후성진 부근이고, 패수는 지금 반가구수고 북쪽의 난하를 말하는 것이고,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승덕시 부근이 곧 옛 고조선의 왕검성이었고, 낙랑군의 치소였고, 고구려의 평양성이었고, 고려의 서경이었다.
그리고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고, 현토군은 그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졸본이 요동군의 경계에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겨질 수 있었고, 고구려가 현토군에 속했었다는 기록이 남겨질 수 있었으며, 고구려와 두 군 즉 요동군과 현토군과의 접촉기록이 수없이 남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환인의 오녀산산성은 졸본성이 아니고, 집안은 국내성이 아니며, 지금의 요동은 옛 요동이 아니고, 지금의 요하는 옛 요수가 아니다.
고구려 역사의 진실은 바로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