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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의 세번째 도읍 환도성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7. 27. 22:06

윤여동설 - 고구려의 세 번째 도읍 환도성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서기198년에 이르러 환도성을 쌓았다.   이는 이때 후한이 말기 현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산상왕은 상황에 따라서는 요동 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이 환도성을 활용할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한의 멸망이 거의 기정 사실화되자 209년 10월에 이르러 환도성으로 옮겨살며 요동 쪽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 우리는 지금 집안 북쪽에 위치한 산성자산성을 환도산성일 것이라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이었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중국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 부근이었다.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연경현 영녕고성]

 

 

  앞서 8대 신대왕은 172년에 후한군이 고구려의 국내를 침공하자 명림답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다가 후한군이 굶주려 퇴각하자 기병을 출동시켜 말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기록될 정도로 전멸시켜 버렸고,   또 9대 고국천왕은 184년에 요동태수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왕이 친히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적군의 머리를 벤 것이 산더미 같았다고 할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때 고구려가 환도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고국천왕은 197년 5월에 아들 없이 죽고,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는 왕위에 오른 다음해에 환도성을 쌓았고, 209년에 이르러서는 아예 환도성으로 옮겨 살며 요동 쪽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다가 227년 5월에 죽게 되고,   그 아들 동천왕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는 후한이 멸망하고,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가 삼국으로 정립되어 있을 때였다.
  그러다가 위나라에서는 238년에 이르러 요동지역을 차지하고 칭왕을 하며 위세를 떨치던 공손연(공손도의 손자)을 쳐 멸망시켜 버리는데, 이때 고구려에서 군사 1천을 보내 위나라를 돕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손연이 멸망한 후 고구려와 위나라는 요동군 땅을 나누는 일만 남아 있었을 것인데,
  이때 고구려는 요동 서안평과 대방군 그리고 후한낙랑군 땅을 차지하려 했을 것이고,  위나라에서는 그 요충지를 고구려에 고스란히 내어줄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의견이 충돌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242년에 이르러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선제 습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위나라는 246년에 이르러 유주자사 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는데,
  이때 고구려가 임시도읍이었던 환도성을 함락 당하고 패전하게 되어  후한낙랑군, 대방군 땅이 위나라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고, 동천왕은 급히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으므로 고구려의 원대한 꿈은 뒤로 미루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15대 미천왕 때인 311년에 이르러서야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창평 부근)을 쳐서 빼앗고,   313년에 후한낙랑군(하북성 흥륭현 일원)을 빼앗고,   314년에 대방군(준화 부근) 마저 빼앗게 되어 동천왕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고손자인 미천왕이 이루게 되고,   중국은 서진이 멸망하고 5호 16국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자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이 342년 8월에 이르러 중국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요동으로의 진출을 꿈꾸며 다시 환도성으로 옮겨갔었으나,  그 해 11월 연나라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또 다시 환도성이 함락되어 그 꿈이 좌절되자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 살게 되는 것이다.[필자주 : 이때 평양성도 건재했을 것인데 왜 평양성을 마다하고 황성으로 가야했는지 의아하다]  
  연나라는 지금의 북경 서남쪽에 위치했던 나라였고 도읍은 역현부근으로 비정되므로 환도성은 요동성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북경 가까이에 위치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고구려가 요동 쪽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두 번씩이나 도읍했던 이 환도성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혼란기에만 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을 보면, 환도성은 틀림없이 요동과 가까운 쪽에 위치하고 있어 기회를 보아 요동 쪽으로 진출하기 유리한 요충지에 위치했을 것인데,  필자는 고구려의 국내성이 지금의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 부근이라고 했다.
 

   따라서 고구려가 지금의 연경현 부근에서 요동 쪽에 더욱 가까운 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다면 환도성은 북경과 연경현의 중간쯤인 지금의 팔달령 부근에 위치해야 마땅하다. 
  북사를 보면, "정시 5년(A.D.244) 유주자사 관구검이 장수와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를 나와 위궁(동천왕)을 토벌하면서 비류에서 크게 싸웠는데, (위궁이) 패하여 달아나자 관구검이 추격하여 정현에 이르러 수레를 말이 끌게 하고 환도산(丸都山)에 올라 그 도성을 도륙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의 특산물 중에 "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솜,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가 있고, 과일로는 환도의 오얏, 낙유의 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환도지역의 특산물이 자두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에서 산출되는 자두는 그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발해때부터 재배되던 자두가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구려의 환도성은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