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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 장안성(長安城) 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8. 4. 00:23

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 장안성(長安城)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황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25대인 평원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는 또 다시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삼국사기 평원왕 28년(A.D.586) 조를 보면, "移都長安城(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때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옮긴 427년부터 586년까지 160년간 평양성에 도읍한 후 다시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평양성과 장안성은 바로 이웃해 있었다고 보여지므로 평원왕은 같은 평양시내에 또 하나의 왕궁인 장안성을 쌓고 그곳으로 옮겨 살았을 것이다.  

 
  하여튼 이때의 국제정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해 가던 시기였으므로 고구려 평원왕은 수나라의 침공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평양성보다 튼튼하게 장안성을 쌓고 그곳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장안성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데,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당서에는 '평양성을 장안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고기에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니 두 성이 같은지 다른지,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가까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시대에 이미 장안성의 위치를 잃어버린 듯하다.

 

☆ 고려는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필자주 : 도읍 개경이다)을 중심으로 존재하던 나라였다. 따라서 김부식과 고려의 학자들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1145년경에는 평양에 평양성은 남아 있었으나 황성이나 장안성은 흔적이 사라져버려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중국 사서들에도 평양성과 장안성에 대하여 매우 이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수서에는 "고구려의 선조는 부여로부터 나왔다..............그 나라는 동서가 2천리이고, 남북이 1천리이다.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에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신당서도 "그 나라의 왕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인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 경사에서 5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까지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수서나 북사, 신당서의 기록대로라면 고구려의 평양성과 장안성은 동일한 곳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서 경사에서 5천여리 떨어진 곳은 평양성으로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장안성은 24대 양원왕 8년(A.D.552)부터 쌓기 시작한 성이었다.

 

☆ 장안성은 서기 552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594년까지 무려 42년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서들은 평양성과 장안성을 혼동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평원왕이 평양성으로부터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평원왕 28년인 서기 586년이었는데, 평원왕은 590년 10월에 죽었다. 도읍을 옮기고 겨우 4년 만에 죽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 아들은 26대 영양왕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영양왕 때 고구려와 수나라는 국운을 건 대규모 전쟁을 하게 되고,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어 멸망하고 말았는데, 전투 기록들을 보면 이때 수나라군은 고구려의 장안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성을 공격하고 있다.
  이를 보면 평원왕이 죽자 그 아들인 영양왕이 왕위에 오른 후 장안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도읍을 또 다시 옮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혹시 실제로는 수나라군이 고구려의 장안성을 공격했으나 그 성이 같은 평양 시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평양성이라고 기록했는지도 알 수 없다. 

 

☆ 삼국사기에는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을 끝으로 고구려의 도읍 이전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중국 사서들에는 평양성과 장안성이 같은 곳을 말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눈을 들어 대륙을 바라보면 삼국사기 기록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고, 삼국유사 속의 장소들을 찾을 수 있으며, 고려사 속의 지명들도 금방 찾아낼 수 있는데,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대륙을 보지 못하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은 한반도에 모든 역사 기록을 대입시켜 해석함으로써, 역사의 현장을 한반도 안에서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현장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고대역사의 중심지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었다.
  발해 북쪽 난하(패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이 바로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