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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일생

윤여동 2007. 11. 13. 01:16

윤여동자료실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의 일생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불법으로 퍼가서 혹은 출전을 밝히기도 하고, 혹은 필자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어 마치 자신이 쓴 글인 척 하기도 하는데,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일생"의 원전은 바로 이곳 "역사 천재들의 모임"임을 밝혀 둡니다.

 

 

 

                                                     ↓                                                                                                                                                                                                         금관가야

                                          24대 진흥왕=사도부인                                구형왕=계화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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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진흥왕 딸

                               동륜=만내부인             25대진지왕=지도부인             김무력=아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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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숙흘종과 만호부인의 손녀딸

26대진평왕=마야부인 백반  국반=월명부인   용수  용춘=천명  비형랑              김서현=만명부인

                                                                                                                                                          ............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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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   27대선덕여왕    28대진덕여왕          29대태종무열왕=문명부인    김유신   김흠순     김보희     김문희

                                                                                (김문희)                                                   

                                                                   ↓

                                                             30대문무왕

                                                                                         

  김춘추(金春秋)의 출생

 

  김춘추는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25년(A.D.603)에 출생하였다.
  그의 생부는 할아버지인 진지왕과 할머니인 지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용수(龍樹)인데 용수가 선덕여왕과 혼인하게 됨으로써 용수는 자신의 부인이었던 진평왕의 맏공주 천명과 아들 춘추를 동생인 용춘(龍春)에게 주었다.
  그렇게 김춘추는 졸지에 숙부의 양아들이 되어버렸는데, 지금 우리의 윤리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근친혼이 가능했던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대수롭지 않았던 일인 듯 하다. 
  그리하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김춘추를 "용춘(또는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 라고 기록되어 전하게 되었다. 
  김춘추의 할아버지는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이다.
  김춘추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장녀인 천명공주(天明公主)인데 동생인 덕만공주(선덕공주라고도 하고 후일의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양보하였고, 막내인 선화공주(善花公主)는 백제 30대 무왕(武王)과 혼인하였다고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다.

 

☆ 화랑세기에는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천명과 선덕(덕만) 두 공주의 이름만이 나타난다.

  
  따라서 김춘추는 선덕여왕, 진덕여왕과 족보상 6촌간이 되는데, 진평왕의 맏딸인 천명공주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자가 되기도 한다.

 

김춘추의 혼인

 

  김춘추의 첫 혼인시기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 18세 풍월주(風月主) 춘추공(春秋公)조에 김춘추와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와의 혼인시기가 밝혀져 있는데 이때가 서기 626년으로서 김춘추의 나이 24세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김춘추는 이미 결혼을 하여 첫 부인과 딸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첫 부인의 이름은 보라(寶羅)라는 여인이었고, 딸의 이름은 고타소(古陀炤)였다.
  보라의 아버지는 보종공(寶宗公)이고 어머니는 양명공주(良明公主)였다고 한다.

  김춘추에게는 서기 626년에 이미 첫딸인 고타소가 태어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김춘추는 20세쯤인 서기 622년경 보라와 첫 혼인을 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후 보라는 서기 628년경 고타소의 남동생인 문주(문주는 후일 출가하여 중국 구화산에 가서 등신불이 되는 김교각 스님이다)를 낳고는 바로 죽은 것 같다.
  김춘추의 두번째 혼인은 서기 626년이고 이때 김춘추의 나이는 24세였으며 둘째 부인의 이름은 문희(文姬)였는데 문희는 김서현(金舒玄)의 딸이며 김유신(金庾信)의 막내여동생이다.
  김춘추와 문희는 서기 625년 1월 김유신과 김춘추가 공차기를 하다가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지게 되자 김유신이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여동생인 문희에게 김춘추의 옷고름을 달아주게 하면서 알게 되어 약 1년 간 연애를 하다가 서기 626년에 포석사에서 길례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희는 후일 김춘추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이 되자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되었는데, 문희와 언니인 보희(寶姬)사이에 비단을 주고 꿈을 사고 파는 일화가 전한다.
  그리고 문희가 혼전에 임신을 하였다고 하여 오빠인 김유신이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하게 되자, 김춘추가 선덕공주(善德公主)의 명을 받아 아기의 아버지가 자기임을 밝히고 문희를 죽이지 못하게 하고, 문희와 혼인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화랑세기 필사본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 뒤에도 김춘추는 세 명의 부인을 더 두게 되는데, 동생인 문희에게 꿈을 판 것을 후회하고 시집을 가지 않고 있던 문희의 언니인 보희(寶姬)와, 용태(龍泰), 그리고 용보(龍寶)라는 여인이었다.
  그러므로 김춘추는 모두 5명의 부인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김춘추의 자녀들

 

   김춘추에게는 많은 자녀들이 있었음이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아들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기록이 정확히 나타나 있고, 딸들에 관해서는 기록상으로 서기 642년 대야성(大耶城)에서 죽은 맏딸 고타소(古陀炤)와 서기 655년에 김유신에게 시집보낸 지조(智照)에 대한 기록이 있고, 그 외에 또 한 명의  딸(원효대사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라고 한다)이 있었다고도 한다.
  첫째부인 보라의 소생으로는 맏딸 고타소와 아들 문주(文注)가 있었는데, 맏딸 고타소는 품석(品釋)에게 시집보냈으나 서기 642년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때 성주인 남편 품석과 같이 죽었다.
  아들 문주는 중국 안휘성 구화산(九華山)으로 가서 스님이 되어 75년 간 불도에 정진하다가 99세에 죽었고, 죽은 후에는 등신불이 된 김교각 스님인데, 지금도 그곳에는 지장보살의 현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等身佛)이 육신보전탑(肉身寶殿塔)에 모셔 져 있다.
  그의 등신불 앞에서 소원을 빌면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화산 화성사를 찾는다. 
  둘째부인 문희의 소생으로는 후일에 문무왕(文武王)이 되는 법민(法敏)과 인문(仁問), 문왕(文王), 노단(老旦 또는 노차라고도 한다), 지경(智鏡), 개원(愷元)이 있었다.
  이들은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킬 때, 그리고 문무왕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셋째부인 보희(문희의 언니)의 소생으로는 지원(知元), 개지문(皆知文)이 있다.
  넷째부인 용태의 소생으로는 인태(仁泰)가 있다.
  다섯째부인 용보의 소생으로는 거득(車得 또는 차득이라고도 읽는다), 마득(馬得)이 있다.
  이를 종합하면 김춘추에게는 총 12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춘추의 성격과 식성

 

  삼국사기에「왕은 풍채가 영특하고 늠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화랑세기에는「김춘추는 얼굴이 백옥과 같이 희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하였으며, 커다란 뜻이 있었으나 말이 적었고,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조에는「김춘추는 하루에 쌀 세말 밥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 경신년(A.D.660)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는 점심을 먹지 않고 아침·저녁만 먹었다.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키도 크고 잘 생겼으며 말도 조용히 잘하고 또 대식가였음을 알게 한다.

 

김춘추의 업적

 

  김춘추는 젊은 시절 화랑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 24세 때(A.D.626)에 화랑조직의 최고 책임자인 풍월주(風月主)가 되어 4년 간 재임하다가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金欽純)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에 대한 기록은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11년(A.D.642 김춘추의 나이 40세)조에 「8월 이 달에 백제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니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 사지 용석 등이 이 전투에서 죽었다.
  대야성이  함락되자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으니 이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김춘추가 이 소식을 듣고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종일 눈도 깜짝하지 않고 사람과 물건이 지나가도 모르더니, 얼마 후에 말하기를 "어허! 대장부가 아무런들 백제하나 삼키지 못하랴!" 하고는 즉시 왕에게 나아가 "바라옵건대 사명을 받들고 고구려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겠나이다"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고 백제를 쳐서 대야성 전투의 보복을 하고자 그 해 겨울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고구려왕 고장(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본래 춘추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군사로서 호위를 튼튼히 한 뒤에 그를 만났다. 춘추가 말하기를 "백제가 무도하여 뱀과 돼지처럼 탐욕스럽고, 흉포하게도 우리 국토를 침범하므로 우리 임금(善德女王)이 고구려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이렇게 저를 보내어 대왕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고구려왕이 말하기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다. 네가 만일 죽령 서북쪽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어 주겠다" 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제가 우리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군사를 빌리려 하는 터에 대왕(寶藏王)은 환란을 구원하여 이웃 나라와 친선할 뜻은 없고, 남의 나라 밀사를 위협하여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니 저는 죽음을 각오할 뿐, 다른 것은 나의 권한 밖입니다" 하였다.
  보장왕이 그의 말이 공손하지 않은 데에 화가 나서 김춘추를 별관에 가두자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신라의 선덕여왕에게 알리니, 왕이 대장군 김유신을 시켜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가니 고구려왕이 듣고 김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고 되어 있어 고구려에게 군사를 빌려 백제를 공격하려고 한 계획은 실패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 효덕천황(孝德天皇) 3년(A.D.647)조를 보면,
「신라가 상신 대아찬 김춘추등을 사신으로 보내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김춘추가 고구려로 갔다가 돌아온 몇 년 후 같은 목적으로 왜국까지 갔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해인 진덕여왕 2년(A.D.648)에 다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 태종(唐 太宗)으로부터 군사를 내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서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맞았으나, 온군해(溫君解)라는 부하가 김춘추 행세를 하고 대신 죽었다.
  서기654년 3월에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할 것을 청하니 알천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로는 춘추공 만한 사람이 없다. 실로 세상을 구제할 만하다"고 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니 춘추가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춘추를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 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된 김춘추는 이방부령 양수(理方府令 良首)등을 시켜 이방부법 60여조를 만들었다.
  서기659년 여름 4월 백제를 치기 위하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청했다.
  서기660년 봄 3월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수·륙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게 하였다.
  김춘추는 태자인 법민과 대장군 김유신 등에게 정병 5만을 주어 당나라군과 힘을 합하여 백제 의자왕의 도성을 쳐서 함락시키게 하고 서기 660년 7월 18일 결국 백제를 멸망시켜 대야성에서 죽은 맏딸 고타소의 원수를 갚는다.

  그는 무려 18년간 억울하게 죽은 딸의 원수를 갚기위해 복수의 화신이 되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김춘추의 죽음과 왕위 계승

 

  김춘추는 백제가 멸망한 다음해인 서기 661년 6월 59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영경사 북쪽(또는 애공사 동쪽이라고도 한다)에 장사 지냈다. 
  그의 뒤를 이어 신라 30대 문무왕 김법민이 왕위에 올라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마저 멸망시키게 되어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