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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백제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8. 20. 07:58

윤여동설 - 백제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백제의 위치 - 최초주장

 

 

 

 

[거란지리지도인데, 등주, 래주 등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북쪽으로  발해를 건넌 곳 즉 지금의 산해관 부근에 고려, 백제, 신라계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그 위치가 아리송한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위치를 제대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
진동장군 영낙랑태수((A.D.372) : 동진

 

 

※ 진서(晉書) 권9 제기 제9 간문제 함안 2년(A.D.372) 조에, "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라고 기록되어 있어 근초고왕의 이름이 부여구(扶餘句) 임을 알 수 있고, 이때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받은 작위가 백제 최초의 작위로 보이는데, "영낙랑태수"라는 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이때 백제가 낙랑 땅의 일부를 차지했다는 말이다.
  근초고왕은 371년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며 승리한 후 낙랑 땅의 일부라도 빼앗아 백제 땅으로 편입시킨 것을 확인해 주는 기록이고, 이어서 요서 진평현 지역으로도 진출하게 된다.  

  따라서 이때 백제가 차지한 낙랑 땅은 한반도의 평양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부근을 말하는 듯 하고, 요서 진평현 역시 그 부근지역을  말하는 듯 하다.

[필자주 : 전한낙랑, 후한낙랑, 진낙랑 등으로 이어졌던 낙랑군은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서기 313년에 우리의 역사강역에서 축출되어 요서 갈석산 부근으로 옮겨 명목상이나마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14대 근구수왕(재위 375-384)
※ 근구수왕 역시 동진(316-420)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으므로 동진으로부터 작위를 받았을 것이나 이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이후의 왕들도 동진과 국교를 맺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작위에 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이들 왕들의 작위에 대한 기록을 찾으신 분은 댓글을 달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5대 침류왕(재위 384-385) 

 

16대 진사왕(재위 385-392) 

 

17대 아신왕(재위 392-405)   진서(晉書) 권9 제기 제9 효무제 태원 11년(A.D.386) 4월 조를 보면,

  “백제왕세자 "여휘(餘暉)"를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으로 삼았다(以百濟王世子餘暉爲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신왕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18대 전지왕(재위 405-420)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A.D.416) : 동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A.D.420) : 송

 

19대 구이신왕(재위 420-427) 

 

20대 비유왕(재위 427-455)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A.D.430) : 송

 

※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 조에는, 송나라 문황제가 비유왕에게 선대 임금인 영(전지왕)의 작위와 같은 작위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전지왕 12년인 416년에 동진으로부터 받았던 작위인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을 주로 달아 놓았으나 송나라에서는 420년에 전지왕을 진동대장군으로 올려 봉했었으므로 비유왕이 송나라로부터 그 아버지인 전지왕과 동일한 작위를 받았다면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작위를 받았다고 해야 옳은 기록이다.
  송서 고구려국 전에 송나라에서 장수왕을 정동대장군으로, 전지왕을 진동대장군으로 올려 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21대 개로왕(재위 455-475)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A.D.457) : 송

 

※ 송서 백제국전에는,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와 작위를 요구해 조칙으로 허락했다는 기록만 있어 구체적인 작위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그 아버지인 비유왕의 작위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22대 문주왕(재위 475-477)

 

※ 작위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만약 작위를 받았다면 문주왕과 삼근왕은 송(420-479)나라에서 받았을 것이다.

 

23대 삼근왕(재위 477-479) 

 

24대 동성왕(재위 479-501)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A.D.490) : 남제

 

※ 양서나 남사에 천감 원년인 502년에 모태(모대)의 작위를 정동장군으로 올려 봉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동성왕은 501년 12월에 죽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죽은 것을 모른 상태에서 작위를 수여했거나 추증한 기록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이때는 웅진에 도읍했을 때인데, 작위에 대방군공이라는 문안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웅진은 옛 대방군에 속하지 않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성왕 때 백제가 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의 진실 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데, 이때 백제가 북경 부근과 당산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위와 전쟁을 했던 것이지 북위가 서해바다를 건너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백제를 침공했다가 패한 것이 아니다.

      

25대 무령왕(재위 501-523)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A.D.501 혹은 502) : 남제 또는 양

 

※ 502년에 남제가 멸망하고 양나라가 건국되었는데, 무령왕이 남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는지 양나라로부터 작위를 받았는지 정확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 백제왕(A.D.521) : 양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는 양나라에서 받은 영동대장군의 작위가 쓰여 있었다.

 

26대 성왕(재위 523-554)
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A.D.524) : 양

 

27대 위덕왕(554- 598)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A.D.570) : 북제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A.D.571) : 북제
상개부 의동삼사 대방군공 백제왕(A.D.581) : 수

 

※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때는 성왕 16년인 538년이었는데, 그 이전 성왕의 작위는 "수동장군 백제왕"이었고, 그 이후 위덕왕의 작위는 "대방군공 백제왕"이다. 이는 이때 옮긴 도읍 사비가 옛 대방군에 위치했다는 말이다.
  또한 위덕왕의 작위가 동청주자사라는 것은 이때 백제(대륙백제)가 동청주 지역을 차지했다는 말인데, 동청주란 산동반도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백제(대륙백제)가 원래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북경 동쪽 하북성 난하 부근에서 건국되었음을 알아야 백제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8대 혜왕(재위 598-599)

 

※ 혜왕과 법왕의 작위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재위기간이 짧아 작위를 받지 못했는지 기록이 누락되었는지 알 수 없다.
  만약 작위를 받았다면 "대방군공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받았을 것이다.

 

29대 법왕(재위 599-600) 

 

30대 무왕(재위 600-641)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A.D.624) : 당
증 광록대부(A.D.641) : 당

 

31대 의자왕(재위 641-660)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A.D.641) : 당

 

※ 대방군은 한반도의 황해도나 전북 남원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준화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백제 의자왕은 대륙사비(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난현[난주]으로 비정된다)에 도읍하고 있다가 그곳에서 멸망한 것이다. 한반도의  충남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