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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신라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8. 22. 05:18

윤여동설 - 신라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신라의 위치 - 최초주장

 

 

 

 

 

24대 진흥왕(재위 540-576)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A.D.565) : 북제
※ 기록에 나타나는 신라 최초의 작위인데, 진흥왕은 555년 10월에 북한산(필자주 : 진황도 도산)을 순수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했고, 556년에는 비열홀주(필자주 : 함경도 안변)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국원(필자주 : 충주)을 소경으로 만들었으며, 562년에는 대가야(필자주 : 호로도시 수중현 부근)를 쳐 없앴고, 564년에 이르러 해외로 눈을 돌려 북제에 사신을 보내자 북제에서 사신을 보내 진흥왕에게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작위를 주게 되는 것이다.
  신라의 왕에게 엉뚱하게도 "진한군공"이 아닌 "낙랑군공"이라는 작위를 주었다는 것은 이때 신라가 발해 북쪽 낙랑 땅의 일부를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수서, 북사, 신·구당서 등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기록대로라면 우리의 신라가 한반도의 경주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발해북쪽에 위치했다는 말이 된다.
  

  

25대 진지왕(재위 576-579)
※ 정상적이라면 진지왕도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작위를 받았을 것이나 이 시기는 북제가 577년에 북주에게 멸망하는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작위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26대 진평왕(재위 579-632)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A.D.594) : 수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A.D.624) : 당
증 좌광록대부(A.D.632) : 당

※ 수나라는 581년에 북주를 멸망시키고 건국되었다가 618년에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으므로 진평왕은 수나라로부터 작위를 받았다가 다시 당나라로부터 작위를 받게된 것이다.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주국 낙랑군왕 신라왕(A.D.635) : 당
증 광록대부(A.D.647) : 당

 

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
주국 낙랑군왕 신라왕(A.D.647) : 당
증 개부의동삼사(A.D.654) : 당

 

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
개부의동삼사 낙랑군왕 신라왕(A.D.654) : 당

 

30대 문무왕(재위 661-681)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A.D.662) : 당
계림주대도독 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신라왕(A.D.663) : 당

※ 문무왕 3년(A.D.663) 4월 조를 보면 "당나라가 우리나라로서 계림대도독부를 삼고 왕으로써 계림주대도독을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나라는 이때부터 신라를 "계림주"로 바꾸어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대 신문왕(재위 681-692)
계림주대도독 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신라왕(A.D.681) : 당
※ 당나라 고종이 사신을 보내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이어 선대 임금의 관작을 세습하게 했다고 했으므로 문무왕의 관작과 같은 작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구당서 신라전에는 "천수 3년(A.D.692) 정명(신문왕)이 죽으니 측천이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의 아들 이홍을 세워 신라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작위인 보국대장군 행표도위대장군 계림주 도독을 세습하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문왕의 작위가 삼국사기 기록과는 다르다. 

 

32대 효소왕(재위 692-702)
신라왕 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 도독(A.D.692) : 당

 

33대 성덕왕(재위 702-737)
신라왕 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 도독(A.D.702) : 당
※ 당나라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그 형의 장군, 도독의 칭호를 세습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면 효소왕의 작위와 같았을 것이다.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A.D.733) : 당
증 태자태보(A.D.738) : 당

 
34대 효성왕(재위 737-742)

개부의동삼사 사지절 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영해군사 신라왕(A.D.738) : 당

 

35대 경덕왕(재위 742-765)
신라왕 개부의동삼사 사지절 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겸 충지절 영해군사(A.D.743) : 당 

 

36대 혜공왕(재위 765-780)
개부의동삼사 신라왕(A.D.768) : 당


※ 이후 신라의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에는 모두 "계림주(鷄林州)"라는 문안이 반드시 들어가게 된다.
  이 혜공왕까지가 김춘추의 직계혈손으로서 더 이상 김춘추의 혈손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37대 선덕왕부터는 가계가 다른 내물왕의 후손으로 바뀌게 되는데, 특히 내물왕의 12세손이라는 38대 원성왕과 그의 후손들로 신라 하대를 이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53대 신덕왕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박씨가 왕위에 올라 그 아들인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으로 이어졌는데, 이때 신덕왕은 반정의 성공으로 김씨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던 듯 하고, 다시 경애왕 때 후백제 견훤의 침공을 받고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잡혀 죽게 되고, 그 뒤를 이어 다시 김씨인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다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고 천년 왕조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데, 이때 이를 반대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갔던 마의태자의 후손들이 수백 년 후에 청나라를 세워 중국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중국은 고대 역사를 가지고 큰소리칠 입장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라와 백제가 북경 부근에 위치했었고, 북경이 우리의 옛  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곤란해지므로 신라와 백제 역사는 쏙 빼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변방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북경이 고대에는 요동이었고, 우리의 옛 땅이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가 요하 동쪽에 위치했다고 하는 것이고, 신라, 백제, 고려의 역사를 어떻게 하든 한반도 안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만들고자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심지가 북경 부근이었음이 밝혀져 그 땅을 언젠가는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 탐원공정의 진짜 목적은 요하 서쪽이 고대에도 중국 땅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역사 학자들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가 옛 요동이었던 북경 부근까지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장단을 맞추어 한반도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북경이 고대의 요동이었고, 우리의 옛 땅이었음을 알지 못하고, 그 땅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북경부근이 고대의 요동군이었음을 빨리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