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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1)

윤여동 2008. 9. 8. 00:10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1)

 

 

 

  고구려 3대왕인 대무신왕의 성은 해씨요, 이름은 무휼이다.
  서기 4년에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위나암에서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작은 딸이다.
  11세에 태자로 봉해졌고, 15세의 나이로 유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3대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27년째인 서기 44년 10월에 죽어 대수촌 벌판에 묻혔다.
 
   앞서 대무신왕의 아버지 유리왕은 기원전 19년 4월에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와서 고구려의 태자로 봉해졌고, 그 해 9월 고구려 건국 시조 추모왕(주몽왕)이 죽자 뒤를 이어 고구려의 2대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유리왕의 나이는 40세였고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한 노총각이었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른 다음 해인 기원전 18년에 옛날 주몽에게 비류국을 들어바치고 다물후로 봉해졌던 송양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를 삼았는데, 기원전 17년 10월에 유리왕의 장자인 도절을 낳고는 그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왕비 송씨가 죽자 유리왕은 다시 화희라는 골천호족의 딸과 치희라는 신분이 낮은 한나라 사람의 딸을 계비로 들였는데, 둘의 사이가 좋지 않아 유리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두 계비를 따로 거주하게 해야만 했다. 
  어느 날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두 계비가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에게 치희의 낮은 신분을 들먹이며 멸시하자 치희는 억울하고 분하여 자기의 친정집으로 돌아 가버렸다.
  사냥에서 돌아온 유리왕이 그 말을 듣고 말을 달려 쫓아갔으나 치희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유리왕은 쓸쓸히 혼자서 돌아오다가 큰 나무 그늘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었는데, 나무 위에서 황조 한 쌍이 희롱하며 놀고 있는 것을 본  유리왕은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편편황조 자웅상의 염아지독 수기여귀)"라고 노래했다. "훨훨 나르는 황조도 자웅이 서로 의지하는데, 홀로된 나는 그 누구와 함께 돌아가나"라는 뜻으로서 유리왕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노래한 것인데, 유리왕은 치희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기원전 12년 유리왕은 화희와의 사이에서 해명이라는 둘째 아들을 낳는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기원전 6년에 동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볼모교환을 요구해 왔고, 유리왕은 동부여가 강대하므로 태자인 도절을 보내려 했는데, 도절이 겁을 먹고 가지 않았더니 동부여왕 대소가 화를 냈고, 그 해 겨울에 5만의 군사로서 고구려를 침공하려다가 눈이 많이 내리고, 얼어죽는 병사가 많아 곧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이때 고구려가 차기 왕위를 놓고 호족들 간에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다물호족으로서는 외손자이며 태자인 도절을 지키려고 했을 것이고, 골천호족의 입장에서는 태자인 도절을 제거하고 해명을 새로이 태자로 봉하려 했을 것인데, 결국 서기 1년에 태자로 봉해졌던 도절이 19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혹시 도절이 호족들간 권력투쟁의 와중에 희생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서기 2년 3월에는 교제(하늘에 지내는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하자 유리왕은 설지로 하여금 돼지를 쫓아가 잡아 오라 명하게 되는데, 국내 위나암이라는 곳까지 가서야 겨우 도망한 돼지를 잡게 된다.
  돌아온 설지가 유리왕에게 보고하기를 "제가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갔더니 그곳의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매우 풍성함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일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면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하고 또한 전쟁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며 국내로의 도읍 이전을 적극 권유하자 유리왕은 그 해 9월에 직접 국내에 가서 둘러본 후 서기 3년 10월에 도읍을 졸본으로부터 국내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는 화희의 소생인 해명을 태자로 봉하게 되는데, 이때 해명의 나이는 16세였고, 유리왕은 다시 다물국왕(처음에는 다물후였다가 후일 다물국왕으로 봉했던 듯하다) 송양의 작은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셋째 아들 무휼을 낳는다
  송양은 유리왕의 첫 왕비였던 죽은 큰딸과 작은 딸 이렇게 두 명의 딸을 유리왕에게 시집보낸 것인데, 이 송양의 작은 딸이 바로 대무신왕의 어머니이다.
  그런데 이때 태자로 봉한 유리왕의 둘째 아들 해명은 외가인 골천호족과 결탁하여 도읍 이전을 반대하며 옛 졸본으로부터 새로운 도읍인 국내로 오지 않고 졸본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으면서 이웃나라인 황룡국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자 유리왕은 황룡국왕에게 태자인 해명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직접 칼을 보내 자결하라 명하게 되고, 이렇게 하여 둘째 아들인 해명도 서기 9년 3월에 21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마는데, 이때 셋째 아들인 무휼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그런데 그 해 8월 동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동부여와 고구려를 어른과 아이로 비교하면서 상국으로 모실 것을 요구하며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침공하여 멸망시켜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때는 고구려가 동부여보다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할 상황이었는데, 이때 여섯 살짜리 무휼이 동부여 사신 앞에 계란을 쌓아 놓고는 "여기에 누란이 있다. 만약 대왕이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섬길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동부여 왕이 자기의 위태로움을 모르고 다른 사람이 와서 굴복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경고의 말이었다고 하는데, 여섯 살짜리 어린애가 정말로 그러한 말을 했다고 믿을 수는 없지만 무휼이 영특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듯 하다.          
  그런데도 서기 13년 겨울 11월에 이르러 드디어 동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온다. 이때 유리왕은 70세쯤의 나이였으므로 왕자인 무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막게 하였는데, 무휼은 군사수가 적어 전면전을 하면 불리할 수 있다고 보고 군사들을 미리 산골짜기에 매복 시켜 놓았다가 동부여 군사들이 학반령이라는 고개 아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일어나 공격하니 동부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 위로 도망쳤으나 무휼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잡아 죽였는데, 이때 무휼의 나이는 겨우 10세였다.
  이를 지켜본 유리왕은 무휼의 능력을 인정하고 서기 14년 정월에 11세의 무휼을 태자로 봉하고, 군사지휘권을 부여하게 되며, 오이와 마리를 시켜 군사 2만으로서 서쪽으로 양맥을 쳐서 그 나라를 없애고 군사들을 진군시켜 구려현을 습격하여 탈취하게 한다.
  이때 유리왕에게는 태자인 무휼, 둘째인 해색주, 막내인 여진 이렇게 세 명의 아들이 살아 있었는데, 서기 18년 4월에 비류수 강물에서 멱을 감던 막내아들 여진이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유리왕은 죽은 여진 또래인 10세 정도의 구려출신 재사를 양자로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그 해 7월 병이 들어 요양을 위해 두곡으로 갔다가 10월에 이르러 76세의 나이로 두곡의 이궁에서 죽게되고, 고구려에서는 유리왕을 두곡 동쪽 벌판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유리명왕이라 한다.

 

                                              - 2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