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과 미추홀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기원전 42년 기묘년에 소서노는 어린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졸본의 압록강 나루에서 배에 몸을 실었다. 이때 소서노의 나이 25세였고, 비류는 4-5세정도, 온조는 2-3세 정도였다.[필자주 : 혹은 비류와 온조가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도 있다]
원래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호족 연타발의 딸로서 졸본부여 왕족인 우태에게 시집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 온조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인 우태가 갑자기 죽어 젊은 나이에 아들 둘 딸린 과부가 되어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졸본에서 주몽왕과 재혼한 후 자신이 우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졸본부여의 태자로 봉하려 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졸본을 떠나 압록강을 타고 내려와 대수와 패수를 건너 진번 땅 한산 부근으로 떠나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정황을 감안하여 판단해 보면 "우태와 소서노 사이 출생설"이 정확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그 어머니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을 하게 되어 한 때 의붓아버지와 의붓아들의 관계를 맺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기원전 58년에 태어났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온 때를 기원전 37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기원전 24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비류와 온조가 그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졸본을 떠나 남쪽지방으로 간 때를 주몽의 장자인 유리가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으로 와서 태자로 봉해진 기원전 19년 4월에서 9월 사이 또는 유리왕이 왕위에 오른 기원전 19년 9월 이후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 다음해인 기원전 18년에 비류의 백제와 온조의 십제가 건국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지금까지 이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범장의 부여기를 보면, 주몽의 출생년도가 기원전 58년이 아닌 기원전 79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간 때가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이었으며, 그곳에서 아들없이 딸만 셋이 있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어 왕의 부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해 10월에 이르러 졸본부여왕이 죽으면서 왕위를 주몽에게 물려주게 되어 주몽이 졸지에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 주몽왕이 연타발의 딸로서 두 아들을 둔 과부 소서노와도 재혼을 하였으나, 소서노는 기원전 42년 기묘년에 두 아들을 데리고 졸본을 떠나 진번 땅으로 가서 농사를 지어 갑부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졸본부여 주몽왕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게 되며, 기원전 19년에 이르러 주몽왕이 죽고 유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 다음해인 기원전 18년에 진번 땅 한산부근에 백제를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부여기의 기록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면 삼국사기와는 전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고,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명쾌하게 설명된다.
즉 소서노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주몽왕과 재혼했었는지를 알 수 있고, 재혼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인 기원전 42년에 왜 소서노가 두 아들을 데리고 졸본을 떠났는지도 알 수 있으며, 주몽과 그 아들 유리의 출생년도를 정확히 알 수 있고, 주몽왕의 어머니인 유화부인, 주몽의 첫 부인 예씨 그리고 새로 태어난 유리가 주몽이 졸본으로 도망친 후 인질로 잡혀 있었음도 알 수 있어, 결국 유화부인은 왕이 된 아들 주몽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기원전 24년에 동부여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고, 주몽의 장자인 유리는 인질생활 40년 만에 그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으로 주몽왕을 찾아와 태자로 봉해졌다가 주몽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몽왕이 40세가 아닌 61세에 죽었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 주몽은 북부여 건국시조 천제 해모수의 고손자이고, 비류와 온조는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손자 또는 증손자로서 이들의 혈통은 다른데, 백제 왕실의 성씨를 부여씨라고 했던 것을 보면 동명왕은 먼 옛날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이었던 부여의 묘예였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소서노는 연타발의 딸로서 기원전 66년생이었다.
그리고 성장하여 졸본부여의 왕족인 우태와 혼인을 하여 장자인 비류와 둘째인 온조를 낳았다.
그녀의 나이 20세쯤에 장자인 비류를 낳았다면 비류는 기원전 46-45년생이 되고, 그 후 다시 둘째 아들인 온조를 낳았다면 온조는 기원전 44-43년 생쯤일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인 온조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서노의 남편인 우태가 갑자기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 삼국사기에는 우태가 동부여 건국시조 해부루의 서손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오기로서 우태는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이 늦게 낳은 아들이거나 손자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태의 아들인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고 맨 처음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는 것이다.
동명왕은 주몽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으로서 이름은 부여두막 또는 부여두막루라 한다. 주몽을 동명성왕이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하여 소서노는 졸지에 애 둘 딸린 젊은 과부가 되었을 것인데, 얼마 후 그녀는 졸본부여 주몽왕과 혼인을 한다.
이때 소서노는 졸본부여 왕가의 혈손인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주몽은 졸본으로 온 이후 졸본부여 둘째공주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소서노는 이때 주몽왕과 재혼한 후 자신의 아들을 졸본부여의 태자로 봉했다가 주몽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렇지만 주몽왕은 아직은 동부여에 인질로 잡혀 있어 올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곳을 탈출하여 자신을 찾아오리라 믿고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친아들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므로 소서노는 졸본에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졸본을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부근이라 했는데, 그곳에는 백하(白河)라는 강이 지난다.
이 백하는 사서들에 말갈국 백수(白水)의 강물 색깔이 오리의 머리색과 비슷해 압록수라고도 불렀다는 강이다.
그렇다면 소서노는 기원전 42년에 두 아들을 데리고 지금의 후성진 부근을 출발하여 백하(옛 압록강)를 타고 내려왔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때 소서노는 지금의 밀운수고까지 내려왔고, 또 조백하를 타고 내려와 북경 동쪽 통주 부근까지 내려온 후 그 동쪽 한산 부근에 자리잡았던 듯 한데, 그곳은 옛 진번군 땅이었고, 마한의 동북쪽 변경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18년에 이르러 한산의 부아악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는 비류는 서쪽으로 가서 미추홀에 도읍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고, 온조는 부아악 부근의 한수 남쪽 위례성에 도읍하고 국호를 십제라 하는데, 이때 비류와 온조의 나이는 나이는 30세쯤이었다.[필자주 : 그리하여 온조왕이 왕위에 올라 재위 46년째 죽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沸流欲居於海濱(비류는 바닷가에 살고자 했다)",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비류의 미추는 땅이 습하고 물이 찝찔하여 편안히 살수가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류는 저습한 지역에 자리잡았다고 보여지는데, 이때 비류는 한산의 서쪽 방향으로 가서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이고, 온조는 한산의 동쪽으로 가서 진번고지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추홀과 위례성은 동서로 위치했을 것이다.
☆ 백제의 한수는 서울의 한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엉뚱하게도 백제의 위례성을 한반도의 서울부근에서 찾고 있고, 미추홀을 인천 부근에서 찾고 있으니 어찌 백제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