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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해명태자가 죽어야 했던 진짜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9. 27. 21:16

윤여동설 - 고구려 해명태자가 죽어야 했던 진짜 이유 - 최초주장

 

 

  연속극 "바람의 나라"를 보면 비록 재미를 위해서라지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많은 내용이 삽입되어 있어 역사적 사실만을 밝히고자 하는 역사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감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사극을 모두 원전대로만 그릴 수는 없는 일이니 스스로 역사적 사실을 알고 픽션과 논픽션을 구별하며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구려 유리왕에게는 원래 다섯명의 친아들과 한명의 양아들이 있었다.
  도절, 해명, 무휼, 해색주, 여진 등은 유리왕의 친아들들이고, 재사라는 또 한 명의 양아들이 있었다.
  도절은 요절했고,

  해명은 유리왕의 명을 받고 목숨을 끊어야 했으며,

  무휼은 3대 대무신왕이고,

  해색주는 4대 민중왕이며,

  여진은 어렸을 때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양아들 재사는 여진이 죽은 후 유리왕이 죽은 막내아들 여진 또래의 아이[필자주 : 이름은 고재사로서 유리왕의 배다른 여동생(졸본부여 공주)이 구려호족 고여달에게 시집가서 낳은 아들의 후손으로 밝혀졌다]를 양자로 들인 것으로서 6대 태조대왕의 아버지이다.  

 

  첫째아들 도절은 유리왕의 장자로서 유리왕이 다물후 송양의 큰딸과 기원전 18년 7월에 혼인하여 1년 후인 기원전 17년에 태어났는데, 그 어머니인 송양의 큰딸은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에 죽고 말았다.
  아마 출산 후에 무언가 병을 얻어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첫 아들 도절도 서기 1년에 18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으로 보아 원래 건강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아들은 해명인데, 유리왕과 골천호족의 딸 화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희는 유리왕이 첫 왕비인 송양의 큰딸이 첫 아들인 도절을 낳아 놓고 죽자 다시 얻은 계비였는데, 기원전 12년에 유리왕의 둘째 아들인 해명을 낳았다.
  그런데 유리왕은 서기 3년에 이르러 다시 송양의 작은 딸을 또 왕비로 맞아들이고 도읍을 졸본(홀본이라고도 한다)에서 국내로 옮기게 되는데, 이로부터 해명의 불운이 시작된다.
  해명의 외가는 졸본 부근에 위치한 골천호족이었는데, 국내로의 도읍이전을 반대했고, 해명도 외가편에 서서 도읍이전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렇지만 유리왕의 입장에서는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국내로의 도읍이전이 꼭 필요했으므로 자신의 의지대로 서기 3년에 이르러 국내로 도읍을 옮겼고, 서기 4년에는 송양의 작은 딸에게서 셋째 아들인 무휼을 낳는다. 
  그런데도 둘째아들 해명은 여전히 국내로의 도읍이전을 반대하고 졸본에 머무르며 국내로 오지 않자 유리왕은 서기 4년 봄 2월에 16세인 해명을 태자로 봉해 해명과 골천호족을 달래려고 하였으나 해명은 이때에도 국내로 오지 않는다.
  유리왕으로서는 괘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서기 8년 해명의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에 졸본에 머무르고 있던 해명태자에게 인접국인 황룡국왕이 강궁(강한 활)을 선물했는데, 해명이 사신이 보는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뜨리고는 활이 약해 부러졌다고 하여 사신이 무안해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태자가 도읍이전을 반대하며 옛 도읍에 머물러 있으면서 국가 간의 예의에 어긋난 짓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리왕은 대노했고, 황룡국왕에게 해명을 죽여버리라고 하게 된다.

 

☆ 일반적인 경우라면 유리왕은 태자의 호기스런 행동에 대하여 대견하게 생각하고 껄껄 웃고 말 일이었고, 실제 해명태자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웃나라가 고구려를 업신여길까 하여 일부러 활을 꺾음으로서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활 하나를 부러뜨렸다고 하여 자신의 아들을 죽여달라고 했다는 것은 해명이 유리왕의 뜻을 심하게 거스르고 있어 죽이고 싶을 만큼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구려 유리왕의 청이지만 황룡국왕이 고구려의 태자인 해명을 죽여 줄 수는 없는 일이었고, 급기야 유리왕은 서기 9년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킴으로써 나라의 위업을 공고히 하려 함인데 네가 감히 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는 이웃나라에 원한을 샀으니 자식된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느냐?" 하면서 칼을 주어 자살하라 명령하여 태자인 해명은 창을 땅에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와 그 창에 꽂혀서 죽고 말았는데, 이때 해명의 나이 21세였다.
  해명은 외가인 골천호족편에 서서 국내로의 도읍 이전을 반대하다가 죽은 것이고, 이때 유리왕은 자신의 아들 하나를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책에 반기를 든 골천호족도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 내면에는 계비 화희를 지원하는 골천호족과  왕비로 다시 맞아들인 작은 송씨(송양의 작은 딸)를 지원하는 다물호족간의 주도권 싸움이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 위 유리왕의 말 중에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킴으로써 나라의 위업을 공고히 하려함인데 네가 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라고 한 것은 태자인 해명이 도읍 이전을 반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연속극을 보면 무휼이 저주받고 태어난 인물로 그려지고 왕궁에서 쫓겨나 자신의 신분도 모르고 성장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실제 무휼이 태어난 서기 4년은 고구려가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긴 후 고구려의 국운이 욱일승천하던 좋은 때였고, 무휼은 주몽에게 비류국을 들어바침으로써 고구려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등공신인 다물국왕 송양의 외손자로서 왕실과 온 국민의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였다. 
  그리고 해명태자의 모습이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동부여의 대소왕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책임을 지고 죽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21세의 청년이 그렇게 수염이 덥수룩하지 않을 것이며, 고구려의 해명태자가 동부여의 대소왕을 죽이려고 시도했다는 기록 역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해명태자가 죽을 때 무휼이 다 자란 청년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사실 해명태자가 21세의 나이로 죽은 서기 9년에 무휼은 겨우 6세에 지나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역사적 사실을 알고 연속극을 보면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픽션인지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며, 보는 재미가 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