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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유리왕의 막내아들 여진(如津) 왕자는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0. 16. 19:31

윤여동설 - 고구려 유리왕의 막내아들 여진(如津) 왕자는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었다 - 최초주장

 

 

  연속극 "바람의 나라"가 점점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역사적 사실이 아닌 부분이 많지만 재미를 위해 설정한 것이려니 이해하고 역사를 알고 새겨가면서 볼 수밖에 없다.
  연속극에서는 무휼이 여진왕자를 인질로 잡고 해명태자를 죽게 한 유리왕을 유인하여 죽이려 하다가 유리왕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원래 유리왕은 40세에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와서 주몽왕(추모왕)의 태자로 봉해졌다가 아버지인 주몽왕이 죽자 고구려의 2대 왕위에 올랐다.
  동부여에 있을 때 결혼을 했었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졸본으로 도망쳐 올 때까지 노총각 신세였던 듯 하다.
  그리하여 그는 왕위에 오른 후 다물후 송양의 큰딸을 왕후로 맞아들여 도절이라는 장자를 낳게 되는데, 이 첫 왕후는 출산 후 바로 죽게 되고, 장자인 도절도 1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러자 유리왕은 다시 화희와 치희라는 두 여인을 계비로 맞아들였는데, 화희에게서 해명이라는 둘째 아들을 얻었고, 치희라는 여인은 화희와의 갈등으로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고, 해명태자는 21세의 나이에 국내로의 도읍이전을 반대하다가 유리왕의 명을 받고 자살하여 죽게 된다.  
  그러자 유리왕은 다시 다물후 송양의 작은 딸을 왕후로 맞아들여 후일의 대무신왕 무휼과 민중왕 해색주 그리고 여진왕자 이렇게 삼형제를 얻게 된다.
  그런데 이 막내둥이 여진왕자가 10여세의 나이에 비류수(필자주 :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 홍하이다)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7년(A.D.18) 조를 보면,
 "여름 4월 왕의 아들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애통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는데, 뒤에 비류사람 제수가 여진의 시신을 찾았다. 그 소식을 듣고 곧 예를 갖추어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전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리왕은 귀염둥이 막내아들이 물에 빠져 죽자 매우 상심했던 듯 하다.
  그리하여 가을 7월에 이르러서는 태자였던 무휼에게 정사를 맡기고 도읍인 국내성을 떠나 두곡의 이궁으로 가게 되고, 10월에 이르러 죽게 된다.
  유리왕은 평생에 다섯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장자인 도절은 요절했고, 둘째인 해명은 유리왕 자신이 죽게 만들었고, 막내아들 여진은 강물에 빠져 죽었으니 자식운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무휼과 해색주 두 아들이 살아남아 모두 고구려의 3대(대무신왕). 4대(민중왕) 왕위에 올랐으나 결국 그 손자인 5대 모본왕 때 이르러 그 왕통이 끊어지고 만다.

  

☆ 유리왕에게는 또 한 명의 아들인 재사가 나타나는데, 이 재사는 여진왕자가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은 후 유리왕이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양자로 받아들였던 사람이었다.(필자주 : 재사는 유리왕의 배다른 여동생의 후손으로써 고씨였고, 6대 태조대왕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후일 이 재사의 아들인 태조대왕 궁으로 고구려의 왕위가 이어지게 되어, 고구려는 주몽의 친손으로 이어진 해씨고구려는 5대 모본왕까지로 끝나게 되고,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는 고씨고구려가 되는데,
고씨고구려는 주몽왕의 딸이 고씨에게 시집가 낳은 후손으로서 주몽왕의 외손들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주몽왕의 친손인 해씨와 외손인 고씨 이렇게 두 성씨로 왕위가 이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