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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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후백제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1. 25. 23:10

윤여동설 - 후백제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백제가 멸망한지 230여 년이 지난 서기 892년에 이르러 견훤이 백제의 부활을 기치로 내걸고 후백제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 의심없이 후백제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고, 백제가 신라의 서쪽인 옛 진번군 남쪽 땅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신라, 백제의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 평양성이 옛 왕검성이었다면 우리 역사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중국 사서들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되어 있고,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장성이 있는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기 때문에,  통일신라 땅에서 건국된 후백제 역시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신라 진성여왕 때는 정치가 어지러워져 주와 군에서 세금을 내지 않아 국고가 텅 비어 왕이 사람을 지방에 보내 세금을 독촉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도처에서 반란군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견훤은 체격과 용모가 영웅스럽고 기이했으며, 의지와 기개가 있었으며 비범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서라벌(금성)로 가서 군대에 들어가 나라의 서남쪽 해변으로 배치되어 국경 방어를 하게 되었는데, 그의 용감한 기풍이 항상 군사들의 선봉이 되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비장으로 진급했다.   
  그런데 나라가 더욱 어지러워지자 견훤은 야심을 품고 무리들을 불러모아 나라 서남쪽 주와 현들을 공격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리가 5천이나 모이게 되었고,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국개국공이라 했다고 한다. 
  몇년 후 견훤은 완산주로 도읍을 옮겨 국호를 후백제라 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가 신라 효공왕 4년(A.D.900)이었다.

  그러자 후당에서는 견훤에게 검교태위겸 시중 판백제제군사 도독 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의 작위를 주기도 했다.
  927년 11월에 이르러서는 세력이 강해져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금성)을 침공하게 된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거침없이 서라벌(금성)에 입성했고,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후백제군은 왕을 협박해 스스로 자살하게 만들고, 견훤은 비빈들을 강제로 욕보이고, 궁중의 보물들을 약탈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고 철군했다고 하는데, 이때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른 사람이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였다.
 
  견훤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견훤은 후처의 소생인 넷째 아들 금강을 특히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했다.

  그러자 935년 3월에 이르러 전처소생으로서 장자인 신검과 그 동생 양검과 용검이 합세하여 금강을 죽이고, 왕이며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의 절에 유폐시키고 장자인 신검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견훤은 왕위를 잃고 절(금산사라 한다)에 갇힌 몸이 되었다가 4월에 이르러 경비군사들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는 금산의 절에서 도망쳐 고려로 망명해오게 되고,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열 살 위라 하여 견훤을 상부라고 부르며 편안히 살수 있도록 조치한다.
  그러자 견훤은 다음해인 936년에 이르러 자신의 아들인 신검이 왕위에 올라 있는 후백제를 칠 것을 요청하게 되고, 왕건은 그 요청에 따라 신검의 후백제를 쳐서 항복을 받게 되는데, 견훤은 이때 왕건이 신검의 항복을 받아들여 살려주자 신검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 하여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에 있는 절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견훤의 후백제는 건국된 지 45년 만에 자중지란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려의 도읍 개경은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후백제가 한반도의 전라도 지역을 근거로 건국되었다가 멸망한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지만, 사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후백제에 관련된 어떠한 유물도 출토된 적은 없다.
  그리고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은 한반도의 경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이  신라의 천년 도읍 서라벌, 금성이었고, 백제의 강역은 지금 중국  하북성 진황도 도산(필자주 : 북한산이다), 청룡하를 중심으로 하는 난하 중,하류 부근이었다.  
  따라서 옛 백제 땅에서 건국되어 백제의 맥을 잇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건국된 후백제 역시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신라의 서쪽인 지금 중국 하북성 당산(필자주 : 전주이다)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편을 보면,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쳐 없애버리고 그 땅을 평정한 후 전 지역에 9주를 설치할 때, 이전 백제 지역에 3개 주를 설치했는데, 백제의 옛 성 웅진 북쪽을 웅주(熊州)라 하고, 그 다음 서남쪽을 전주(全州)라 하고, 그 다음 남쪽을 무주(武州)라 했다고 하는데, 웅진이란 하북성 노룡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지금의 북경 동쪽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견훤이 처음 나라를 세운 무주 즉 무진주(武珍州)란 지금의 하북성 난하구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전주는 당산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견훤이 그 아들 신검에 의해 감금당했다가 도망쳐 고려 태조 왕건에게로 갔던 금산의 절 또한 한반도 김제의 금산사가 아니라 중국 하북성 당산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후백제가 한반도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견훤이 후백제의 도읍으로 했던 완산이 한반도 전라북도의 전주라고 생각했고, 견훤이 갇혀 있던 금산의 절을 김제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지금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 가면 견훤능이라고 전해진 고총이 있는데, 이를 견훤이 죽어 묻힌 곳이라 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기도 한단다.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황산의 절에서 등창이 나서 죽어 그 부근에 묻혔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황산이 한반도의 충남 논산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웅진이 한반도 공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인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노룡을 말하는 것이고, 무진주가 한반도의 광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북성 난하구 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신라의 서라벌이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부근을 말한다면 후백제를 한반도에서 찾을 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또한 견훤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죽어 황산부근에 장사지냈다면 견훤의 능은 한반도 논산 부근이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고, 그 부근에 계백장군의 무덤도 있을 것이다.

 

   [근세에 이르러 후백제왕 견훤릉이라 새겨 세워 놓은 비석]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 있는 견훤왕릉이라 전해지는 고총]


  지금 충남 논산시 연무읍의 후백제 견훤의 능이라고 하는 고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은진현 총묘 조의

"견훤묘는 은진현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다. 속칭 왕묘라 한다"

라는 기록을 근거로 요즈음 들어 견훤왕릉일 것이라고 지정하여 새롭게 조성한 것이고, 그 후손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 앞에 비석도 세워 놓았단다. 

  필자의 주장대로라면 대륙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을 후백제 견훤왕의 능이 한반도에 있다고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역사는 이렇듯 잘못 전해진(잘못 이해한?) 기록 때문에 발생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아주 많은 것이다.  

  필자는 비록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우리 국민 모두가 지금이라도 역사 인식만 바꾼다면 한반도가 아닌 발해 북쪽 대륙에서 우리의 삼국과 후백제를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인식을 바꾸어 해석만 달리 하면 최소한 지금의 북경(필자주 : 고대의 요동이다)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 되는 것이므로  주저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