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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발해의 마지막 불꽃 흥요국(興遼國)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07. 11. 29. 12:46

윤여동설 - 발해의 마지막 불꽃 흥요국의 위치 - 최초공개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당나라 무후 때에 고구려(속말말갈이라고도 한다) 사람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자 당나라 예종은 그를 발해군왕에 봉했다.
 그리하여 그 후로 발해국이라 부르게 되었고, 부여, 숙신 등 10여 나라를 모두 차지하고 5경 15부 62주를 두었으니 땅이 사방 5천여리의 대제국이 되었다.

 

☆ 발해는 대흥안령산맥 부근이 중심 강역이었고, 5경이란 상경용천부(파림좌기부근), 중경현덕부(파림우기부근), 동경용원부(고륜기부근), 서경압록부(밀운수고 부근), 남경남해부(옹우특기부근)를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압록강 북쪽 만주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모두 만리장성이 시작된 지금의 산해관 북쪽 지역에 위치했다.   

  
    
  그러다가 서기 926년 1월에 이르러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100여 년 후인 1029년에 다시 그 땅에서 나라를 세운 이가 있었으니 건국 시조는 대연림으로서 발해 시조 대조영의 7세손이었고, 국호는 흥요국(興遼國), 연호는 천흥(天興)이었다.
  고려사절요 현종 20년(A.D.1029) 9월 조를 보면,
 

"거란 동경(북경 부근으로서 옛 요동성)의 장군 대연림이 대부승 고길덕을 보내와 나라를 세운 것을 알리고, 아울러 구원해 줄 것을 청했다.


  대연림은 발해 시조 대조영의 7세손인데, 거란(요)을 배반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흥요(興遼)라 하고, 연호를 천흥(天興)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흥요국이 서기 1029년에 거란(요)의 동경요양부(현 북경 부근)를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음을 알게 하고, 흥요국이 거란을 배척하고 새롭게 나라를 세우기는 했으나 아직은 힘이 약해 위태로웠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고려에서는 흥요국의 구원 요청을 받고도 모른 척 한다. 
  그러자 그 해 12월에 다시 사신을 보내 재차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고려사절요 현종 20년 12월 조를 보면,
  "흥요국의 태사 대연정이 동북여진을 이끌고 거란과 서로 싸우면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왕이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니 시중 최사위와 평장사 채충순이 말하기를, '전쟁은 위태한 것이니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이 우리의 이익이 안될 줄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성과 봉수를 수리하고 사태를 관망해야할 것입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이로부터 길이 막혀 거란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고려의 현종은 흥요국을 도와줄 마음이 있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파병할 수 없었다고 보여진다. 

 

# 고려는 당산, 진황도, 승덕, 호로도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북경 부근에 흥요국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내몽골 상도 부근에 거란이 위치했기 때문에 고려에서 거란과 직접 통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한달 뒤인 현종 21년 정월에 흥요국이 다시 사신을 보내와 군사를 청했으나 이때에도 고려는 흥요국을 도와주지 않았고, 7월에도 다시 구원해 주기를 청했으나 역시 고려는 군사를 보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흥요국은 거란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기 1030년 9월에 이르러 결국 멸망하고 만다.
    

☆ 고려사절요를 보면, 현종 21년(A.D.1030) 봄 정월 "흥요국이 수부원외랑 고길덕을 보내 표문을 올려 군사를 청했다"고 하고,
  가을 7월에도 또 "흥요국의 행영도부서 유충정이 영주자사 대경한을 보내 표문을 가지고 와서 구원을 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9월 조에는, "흥요국의 영주자사 이광록이 와서 위급함을 알렸는데, 얼마 후에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 때의 상황을 알 수 있다.

 

  흥요국은 건국한지 약 1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흥요국은 역사에 단 몇 줄의 기록만을 남기고 사라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흥요국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나라였을까?
 
  거란은 원래 부여의 일족으로 추정되는데, 거란이 우리 삼국 역사에 처음 언급되는 시기는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8년(A.D.378)이다.
  이를 보면 서기 346년에 전연 모용황의 침공을 받고 동부여의 5만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연나라로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이 바로 거란족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거란은 곧 동부여와 동족으로서 자신들의 조국인 동부여 땅을 모두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거란은 자신들의 옛 땅인 동부여 땅 모두를 되찾기를 바랬겠으나,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 강력한 고구려 때문에 그 꿈을 이룰 수가 없어 숨 죽이고 살아야 했고, 또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강력한 발해 때문에 옛 땅 회복을 뒤로 미루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거란은 발해가 약화된 틈을 타서 926년 1월 발해를 쳐서 빼앗아 그곳에 동단국(東丹國 : 동거란국)을 세우게 되고, 또 936년 후진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 16주를 할양 받게 되어 대제국으로 성장한 후 동단국을 요양으로 옮기고 남경이라 했다가 후일  동경요양부로 바꾸게 되는데, 지금의 북경 부근이다.     

 

☆ 연운 16주란 유(幽), 탁( ), 단(檀) 계( ), 순(順), 영(營), 평(平), 울(蔚), 삭(朔), 운(雲)  응(應), 신(新), 규( ), 유(儒), 무(武), 환( ) 주를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산서성 북부, 하북성 서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나라는 5경을 두게 되는데, 상경임황부, 중경대정부, 동경요양부, 서경대동부, 남경석진부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지금 압록강 북쪽, 요하의 동쪽에 요양이라는 곳이 있으므로 그곳이 요나라의  동경인 동경요양부였을 것이라고 하고, 서경은 산서성 대동, 남경은 북경, 중경은 내몽고자치구 영성, 상경은 내몽고자치구 파림좌기 정도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한다.

 

☆ 요양에 세워진 탑과 같은 형식의 탑들이 조양, 영성 등 내몽고자치구 옛 발해의 강역이었던 곳에 여러 군데 세워져 있는데, 이 탑들은 요나라가 세운 것이 아니라 발해가 세운 탑들일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도읍 개경이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이 아닌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 부근이라면 역사 해석이 많이 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려가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압록강까지 북쪽으로  철령까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대흥안령 산맥 부근인 발해의 중심강역을 거란의 중심 강역으로 생각하고 역사를 해석했으므로 발해와 거란의 위치를 서쪽으로 많이 이동시켜 새로 비정해야 한다.

 
  삼국사기 지리 고구려 편에 김부식과 고려의 학자들이 요 동경의 위치를 설명한 대목이 있는데 그를  보면,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라는 곳이 아마 한나라 현토군의 경내이며, 대요국(요나라) 동경의 서쪽인 듯하니 한서지에서 소위 현토군의 속현으로서의 고구려가 바로 그곳인가 한다.
  옛날 대요가 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의 임금이 연경(지금의 하북성 역현 부근)에 있었는데, 우리의 입조 사신들이 (요) 동경(지금의 북경 부근)을 통과하고 요수(현 영정하)를 건너 하루이틀 사이에 의주(현 방산 부근)에 당도하여 연경, 계주로 향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의 도읍 개경이 지금 난하  반가구수고 동북쪽의 관성현이었으므로, 요나라로 가는 고려의 사신들은 관성[개경]을 출발해 서쪽으로 향하여 지금의 북경[요 동경]을 지나고 영정하[요수]를 건너 서남쪽으로 향하여 연경[하북성 역현 부근]으로 향했다는 말이다. 

   
  거란은 처음에 옛 요동성이었던 지금의 북경 부근을  남경이라 했다가 후일 천현 13년(A.D.938)에 남경을 동경요양부라 하게 된다.
  따라서 요의 동경요양부는 지금 요녕성의 요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경 부근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요국은 요 동경의 장군이었던 대연림이 흥요국을 세웠다고 했으므로 흥요국은 요나라 동경요양부였던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건국되었던 나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요사지리지를 보면, "흥요현(興遼縣)이 본래 한나라의 평곽현(平郭縣) 땅이었는데, 발해가 장령현(長寧縣)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평곽은 옛날 장수왕이 북연왕 풍홍이 망명해 오자 처음에 요동군의 속현이었던 평곽에 배치했다가 북풍으로 옮겨 죽여버린 역사가 있는 장소로서 연나라와 고구려의 접경에 가까운 곳이었다.  

  따라서

대연림은 거란과 고려의 중간 지역을 차지하고 흥요국을 세웠다가 바로 소멸했다고 보여진다. 
  바로 앞서 정안국을 세웠다가 요나라에게 멸망했던 곳과 흥요국은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흥요국은 옛 정안국을 이어 일어난 나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정안국은 발해의 서경압록부를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로서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대연림의 흥요국 역시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에 자리잡고 나라를 세웠으나 요나라에게 바로 제압당해 또 한번의 발해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 이후에도 1115년에 고욕이 요주에서 거병하였다가 실패하였고, 1116년에 고영창이 동경요양부를 거점으로 대발해를 세웠다가 실패한 후 발해의 부흥운동은 소멸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인데, 거란도 우리와 혈통을 같이 하고, 발해도 우리와 혈통을 같이 하는 동이족이니 결국 지금 우리가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남의 나라 역사처럼 알고 있는 요, 금, 원, 청의 역사가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라는 것을 안다면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산서성 북부와 그 북쪽의 내몽골, 몽골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는데, 정작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발상을 전환하면 우리 고대 역사 전부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데, 반도사관에 찌들어 좀처럼 한반도 밖을 바라보지 못하니 언제쯤이나 되어야 우리 역사의 진실이 모두 밝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