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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일연이 본 "위서(魏書)"는 어느 시대 쓰여진 위서였을까?

윤여동 2008. 11. 20. 08:28

윤여동설 - 일연이 본 "위서(魏書)"는 춘추전국시대 전국칠웅 중의 하나였던 위나라의 역사서인 위서(魏書) 였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했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했는데 백주에 있다고 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했는데, 고(요임금)와 같은 시대였다"

 

  위 기록 속에서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이라는 기록 속의 "지금"은 어느 시대를 말하는 것일까?
  주장에 따라서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하던 때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일연이 인용한 "위서(魏書)"가 쓰여진 시기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필자는 후자의 주장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연은 이 고조선 왕검조선 조의 글을 쓸 때 자신의 생각이 아닌 위서의 기록을 인용했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위서 기록 속의 "지금"이란 위서가 쓰여진 시기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연은 과연 어느 시대 쓰여진 위서를 보았다는 말일까? 
  어느 사람은 위촉오 삼국시대 위나라의 역사서인 진수가 지은 "삼국지 중의 위서(위지라고도 부른다)"를 말하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위수가 지은 "북위와 동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를 말하는 것이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전해지는 그 위서들에는 단군왕검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지 않자 일연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연은 분명히 위서의 기록을 인용했다고 출전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연이 보았던 위서에 그러한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만약 일연이 처음부터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위서에 이르기를"이라고 위서를 들먹거릴 필요없이 "옛부터 전해오기를" 또는 "노인들이 말하기를"이라고 하면서 출전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글을 시작해도 별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일연은 자신이 인용한 책의 제목을 정확히 "위서"라고 밝히고 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는 일반적으로 반고씨, 삼황(천황씨, 지황씨, 인황씨), 오제(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황제헌원씨, 전욱고양씨, 제곡고신씨), 제요도당씨(요임금), 제순유우씨(순임금)를 지나 하·은·주·춘추전국시대·진(秦)·한(漢)으로 나누는데, 중국에 "위(魏)"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가 처음 등장한 때는 춘추전국시대쯤으로 보이고, 지금의 중국 산서성 부근이 그 중심강역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왕검조선의 건국시기를 요 25년 무진년인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는데, 그로부터 2천년 후라면 기원전 300년경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위서의 찬자는 기원전 300년경 위서를 쓰면서 그때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했고, 일연은 기원전 300년경에 쓰여진 바로 그 위서의 기록을 보고 그 내용 중에 단군왕검에 관한 기록이 들어 있자 그를 삼국유사에 그대로 옮겨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300년대라면 이는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에 해당하는 때이고, 전국시대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전국 칠웅으로 불리우던 진(晉)·초(楚)·연(燕)·제(齊)·조(趙)·한(韓)·위(魏)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렇다면 일연은 바로 이 전국 칠웅 중의 하나였던 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를 보았음에 틀림없을 것이고, 그 위서에 단군왕검과 조선(고조선)의 건국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고, 왕검조선의 건국시기가 요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 일연이 보았을 전국시대의 그 위서는 전하지 않고 있으나, 일연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 쓰여진 위서에서 단군왕검에 관한 기록을 찾아내 그 기록을 삼국유사에 인용했던 것인데, 후세에 쓰여진 위서에 그러한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고 하여 지금 사람들이 스스로 오해를 하고는 일연을 거짓말장이로 매도하는 못된 짓을 했으니 그러한 말을 한 사람들은 일연의 영혼에게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속세를 떠나 성불을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스님 일연이, 그것도 국존의 반열에까지 올라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고승 일연이 스스로 개망신을 당하고 싶어 환장하지 않는 한,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하고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필자 혼자 만의 생각인 걸까?    
  다만,
  아사달을 설명하면서, "경에는 무엽산이라 했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했는데 백주에 있다고 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이다" 라는 주가 달려 있는데, 이 주는 백악궁이 지어진 이후인 고려 말 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삼국유사를 다시 간행할 때 누군가가 그 위치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임의로 주를 달아 놓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개성 동쪽의 백악궁이라는 주는 잘못된 설명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왕검조선의 첫도읍 아사달은 태백산 동남쪽 우수하지원에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고대의 태백산(백두산,장백산)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칠로도산 산맥 중의 최고봉인 대광정자산(해발 2,067m)을 말하는 것이고, 아사달은 지금의 내몽골 영성쯤으로 비정되기 때문이고, 후일 왕검조선의 세번째 도읍이었다는 "백악산아사달"도 있는데, 이곳은 지금의 북경(필자주 : 옛 요동이다) 동북쪽에 위치한 무령산 부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연은 우수하지원의 아사달과 백악산아사달이 각각의 장소였음을 알지 못하고는 백악산아사달이 원래의 아사달이었던 것으로 착각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