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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왕검조선의 건국과 멸망시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1. 24. 09:19

윤여동설 - 왕검조선의 건국과 멸망시기 - 최초주장

 

  삼국유사 고조선(왕검조선 조를 보면,        

   "(단군왕검은) 당고(당요) 즉위 50년 경인(당요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조선(朝鮮)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한다)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했다. 그 나라는 1,500년 간 존속했다. 
주 호왕(무왕) 즉위 기묘년(B.C.1122)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阿斯達)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 1,908세까지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임금(제요도당씨)은 기원전 2357년 갑진년에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그런데 일연이 본 "고기(古記)" 라는 기록에는 왕검조선의 건국시기를 요임금 50년 경인년이라고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고기는 요임금의 즉위연도를 기원전 2360년 신축년으로 보고, 왕검조선의 건국시기를 그 50년인 기원전 2311년 경인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자 일연은 고기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는, 요 임금 원년이 무진년 즉 기원전 2333년인데, 그 50년이라면 기원전 2284년 정사년이지 어떻게 경인년이 될 수 있느냐고 이상하다고 주를 달아 놓아 여기에서 일연이 요임금의 즉위연도를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연은 요임금의 즉위연도를 무진년이라고 했으나 사실 요임금의 즉위연도는 기원전 2357년 갑진년이라 하고, 단군왕검의 즉위연도가 요임금 25년인 기원전 2333년 무진년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일연은 요임금의 즉위연도를 무진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기라는 기록은 왕검조선이 1,500년 간 존속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 단군이 1,908세까지 살았다고도 기록하고 있어 매우 혼란스럽다.

 

☆ 지금 우리에게는 왕검조선의 건국시조인 단군왕검으로부터 47대 고열가 단군까지의 왕검조선 47명의 왕대가 전해지고 있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왕검조선이 요 무진년(B.C.2333)으로부터 은 무정 8년 을미년(B.C.1286)까지 1,048년간 존속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후 164년 간의 혼란기를 거쳐 주 무왕 즉위 원년 기묘년인 기원전 1122년에 이르러 후조선(기자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어 삼국유사와는 많이 다르다.   

    

  왕검조선이 기원전 2333년 무진년에 건국되었고 1,500년 간 존속했다면 왕검조선은 기원전 832년까지 존속했다는 말이 되고, 또 단군이 1,908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을 왕검조선의 전체 존속기간으로 본다면 이는 기원전 424년에 이르러서야 왕검조선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고 하는 주 무왕 즉위 원년 기묘년은 기원전 1122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왕검조선이 멸망했다면 왕검조선은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122년까지 1,212년 동안 존속했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이 "왕검조선 1212년 존속설"이다. 
  그런데 고기의 기록대로 "1500년 존속설"을 따를 경우 왕검조선은 1122년에 기자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300년 가까이 더 존속했다는 말이 되고, 
"1908년 존속설"을 따를 경우 기자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무려 700년 가까이 더 존속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왕검조선은 기자조선과는 별개로 상당기간 더 존속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왕검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는 도읍인 왕검성을 은나라 사람 기자에게 내어주고 장당경(당장경이라고도 한다)으로 쫓겨 들어가 조상의 제사나 지내며 수백년 간을 더 존속했을까? 
  그렇다면 장당경(필자주 : 당장경이라고도 한다)은 또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나타나고, 기원전 194년에는 기자의 41세손이라는 준왕이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고 좌우궁인들을 이끌고 급히 도망쳐 남쪽 한(韓)의 땅으로 가서 다시 한왕에 오르게 되고, 북쪽의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에게 멸망당하게 되어 진번군, 임둔군, 낙랑군, 현토군의 소위 한사군이 설치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찾고 보니 역사가 소용돌이 친 실제의 장소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 지역이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 역사적 장소가 한반도인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모든 고대 역사 기록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하고는 역사적 현장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했으니 그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왕검조선의 건국시기는 요 25년 무진년인 기원전 2333년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그렇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멸망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또 기자조선이 그 맥을 잇고, 다시 위만조선이 그 맥을 이었다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것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