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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후한낙랑군의 치소는 북경 동북쪽 하북성 흥륭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2. 12. 00:45

 

윤여동설 -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후한낙랑군의 치소는 북경 동북쪽 하북성 흥륭 부근 - 최초주장
 

 

 

  미우나 고우나 우리 역사는 낙랑군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전개된다. 
  따라서 우리 역사를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낙랑군의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삼국사기에 낙랑에 대한 기록은 서기 313년까지 나타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한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낙랑군이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무려 421년 간 쭉 이어졌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 대무신왕 27년(A.D.44) 조를 보면,
 "한(漢)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이남이 한(漢)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우리는 이 기록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후한의 광무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왜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빼앗아 설치했던 낙랑을 공격하느냐 하는 것이고, 또 서기 44년에 광무제가 낙랑을 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낙랑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어떻게 앞선 시기인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의 기록이 틀렸을 것이라느니, 한 무제가 설치한 전한낙랑군이 이때 후한에 반기를 들고 칭왕을 했을 것이라느니 온갖 추측성 주장들이 나오게 되었다.

 

☆ 지금 일부 사학자들과 재야 연구자들 중 삼국사기에 최리를 낙랑왕이라 기록한 것을 가지고 낙랑군의 일부세력이 낙랑군 지역을 떠나 한반도 평양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이 낙랑국을 세우고 칭왕을 했을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낙랑군과 낙랑국을 나누어 해석해 낙랑군은 지금 갈석산이 있는 중국 하북성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전한→왕망의 신→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기를 틈타 최리라는 사람이 원래의 전한낙랑군 지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칭왕을 했다가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을 받고 멸망함으로써 그 땅이 일단 고구려의 수중으로 들어온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낙랑의 기본 강역에는 변동이 없었다. 즉 전한낙랑군과 낙랑국은 모두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낙랑동부도위는 칠로도산 동쪽 내몽골 적봉, 객라심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전한 때 설치했던 낙랑동부도위를 서기 30년에, 낙랑군(최리의 낙랑국)을 서기 37년에 고구려가 빼앗아가자 후한의 광무제가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서기 44년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옛 전한낙랑군 지역을 쳐 살수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환하여 그곳에 후한낙랑군을 다시 설치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모든 상황이 간단하게 설명된다.
  후한 광무제의 입장에서는 전한의 무제가 설치하여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7년까지(물론 중간에 잠깐동안 최리가 그 땅을 차지하고 낙랑국을 세워 스스로 칭왕을 하기도 했지만) 무려 145년간이나 전한으로부터 후한으로 이어져 통치했던 그 땅을 고구려 대무신왕이 빼앗아가자 후한의 광무제가 옛 전한낙랑군 지역을 되찾으려고 했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무제가 낙랑을 쳐 그 땅을 빼앗아 살수이남 땅을 한(漢)나라의 군현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바로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전한낙랑군 땅을 모두 탈환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를 전부 회복하지는 못하고 그 일부인 살수이남 땅 만을 탈환한 후 그곳에 후한낙랑군을 새로 설치했던 기록인 것이다. 
  후한의 광무제가 왜 낙랑을 쳤다고 기록되어 있는지 이제야 그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후한의 광무제가 살수이남 땅에 설치한 후한낙랑군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설치되었던 것일까?

 

☆ 후한서 지제23 군국5에는 樂浪郡 武帝置 낙陽東北 五千里 十八城 戶六萬一千四百九十二 口二十五萬七千五十(낙랑군은 무제가 설치했는데, 낙양 동북쪽 5천리에 있다. 18성으로서 61,492호이고, 인구는 257,050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낙랑군이 한반도의 평양일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기록을 해석하면서 한반도의 청천강을 살수(薩水)로 보고 청천강 이남에 후한낙랑군이 설치되었을 것이라 하기도 하고, 또는 살수가 대동강 보다 남쪽에 위치한 다른 강을 말하는 것이라 하기도 했다.
  살수가 청천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청천강을 살수로 볼 경우 전한 낙랑군이 소멸한 313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동천왕 21년(A.D.247) 조의 기록에 "왕이 환도성은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다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집이다. 혹은 왕이 도읍했다 하여 왕검이라고도 한다" 라는 기록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 평양은 대동강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청천강은 대동강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동천왕 때 청천강(살수로 볼 경우) 이남이 후한낙랑 땅이었다면 고구려가 동천왕 때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길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기록이 틀린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옛 고조선의 왕검성, 전한낙랑군의 치소, 고구려의 평양성을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하고, 후한낙랑군의 치소를 하북성 흥륭현 일원으로 보고 역사 기록들을 해석하면 너무도 명쾌하여 한치의 의문도 있을 수가 없다.

 

[고북구로 흘러드는 조하인데, 지금의 조하(潮河)를 옛 사람들이 살수(薩水)라고 불렀던 것은 강물이 심하게 구불구불하게 흐르면서 형성된 지형이 마치 스님들의 머리모양과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살수(薩水)는 한반도에 있는 강일 수 없고, 지금의 중국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조하(潮河)를 살수로 비정할 수 있다.
  이 조하는 지금 하북성 승덕시 풍녕 북쪽 황기진(黃旗鎭)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토성진(土城鎭)을 지나고, 풍녕(豊寧)을 지난 후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호마영(胡麻營), 흑산취진(黑山嘴鎭), 천교진(天橋鎭), 호십합진(虎什哈鎭)을 지나 연산산맥(燕山山脈)을 구불구불 가로질러 고북구(古北口)를 통과하여 물길을 서쪽으로 돌려 밀운수고(密雲水庫)로 들어가는 강인데, 고구려와 중국 세력들은 상호 공수의 요충인 바로 이 만리장성의 고북구에서 수많은 전투를 했고, 상호 셀 수 없을 만큼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고북구는 밀운수고의 동북쪽에 위치하는데, 지금도 북경에서 하북성 승덕시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이고 협곡인데, 당시 평양성(지금의 승덕시 부근)에 도읍했던 고구려는 이 고북구를 통과해 밀운, 순의를 지나야 지금 북경 부근의 평원으로 나아갈 수 있고, 중국 세력들은 반드시 이 고북구를 통과해야만 북쪽의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다.

 

☆ 옛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지금의 태행산맥을 기준으로 그 동쪽은 산동이라 하고, 그 서쪽을 산서라 했으며, 지금의 영정하 동쪽은 요동, 그 서쪽은  요서로 구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구려의 졸본은 지금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부근이고, 국내위나암(국내성)은 연경현 영녕진 부근으로 비정된다.

      

  역사 기록들에 살수라고 기록되고 있는 곳은 거의 이 고북구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후한낙랑군은 지금 고북구의 남쪽 흥륭현 일원에 설치되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지금의 북경 동북쪽 하북성 흥륭현 일원이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에 빼앗겼던 옛 전한낙랑군의 일부분을 되찾아 설치했던 후한낙랑군인 것이고, 그 동쪽은 백제였고, 그 북쪽은 고구려였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전한, 후한낙랑군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후한 낙랑군은 동쪽의 맥(능원부근)과 동북쪽의 동예(고륜기부근) 그리고 북쪽의 동옥저(적봉부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건국이후 400여년 간 두 나라간에 전쟁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고구려가 후한낙랑군 땅을 완전하게 빼앗아 차지한 313년 이후인 고구려 고국원왕 24년(A.D.369)에 이르러서야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게 되고, 371년에는 백제가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이는 사태에 이르게 되어 두 나라는 철천지원수 사이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