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위만조선은 72개(또는 78개) 소국으로 이루어졌었다 - 최초주장
삼국유사 칠십이국(七十二國) 조를 보면,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조선의 유민(遺民)은 모두 70여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땅이 사방 백리이다" 라고 했고,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서한(西漢 : 전한)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으로 네 군(郡)을 두었다가 뒤에 두 부를 두었다. 법령이 차츰 번거로워지자 이것을 78개의 나라로 나누니, 이들은 각각 만호(萬戶)였다"고 했다.
(마한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조그만 읍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나라라고 불렀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개의 작은 읍을 차지했는데 모두 나라라고 했다. 변한은 남쪽에 있어 역시 12개의 작은 읍을 차지했는데 이들도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삼국지 한전(三國志 韓傳)을 보면,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했고, 남쪽은 왜(倭)와 접했는데, 땅이 방 4천리이다.
삼종(三種)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고,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 씨뿌려 가꾸고, 양잠을 하여 비단과 베를 짤 줄 안다.
각각 장수(長帥: 渠帥)가 있어, 나라가 크면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사는데, 성곽이 없다.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소석색국(小石索國)·대석색국(大石索國)·우휴모탁국(優休牟 國)·신분고국(臣 沽國)·백제국(伯濟國:百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일화국(日華國)·고탄자국(古誕者國)·고리국(古離國)·노람국(怒藍國)·월지국(月支國:目支國)·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소위건국(素謂乾國)·고원국(古爰國)·막로국(莫盧國)·비리국(卑離國)·점리비국(占離卑國)·신흔국(臣 國)·지침국(支侵國)·구로국(狗盧國)·비미국(卑彌國)·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고포국(古蒲國)·치리국국(致利鞠國)·염로국( 路國)·아림국(兒林國)·사로국(駟盧國)·내비리국(內卑離國)·감해국(感奚國)·만로국(萬盧國)·벽비리국( 卑離國)·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일리국(一離國)·불미국(不彌國)·지반국(支半國)·구소국(狗素國)·첩로국(捷盧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신소도국(新蘇塗國)·점랍국(占臘國)·임소반국(臨素半國)·신운신국(臣雲新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일난국(一難國)·구해국(狗奚國)·불운국(不雲國)·불사분사국(不斯 邪國)·원지국(爰池國)·건마국(乾馬國)·초리국(楚離國) 등 모두 50여국이 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여만 호이다.
진왕의 치소는 월지국(月支國)이다. 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사숙지(安邪 支), 분신리아불예( 臣離兒不例), 구사진지염(狗邪秦支廉)의 호칭을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위솔선(魏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이 있다.
(조선)후 준이 왕을 참칭하다가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그의 좌우 근신과 궁인들을 이끌고 도망하여 바다를 건너 한(韓)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그 후 그의 후손은 멸절 되었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있다.
한(漢) 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하였다.
(후한)환제와 영제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 들어가자 건안(A.D.196∼220)중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 남쪽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보내 유민을 불러모으고, 군대를 일으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점점 돌아왔고 그 후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A.D.237∼239) 중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을 주었다.
풍속은 의책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군에 가서 조알할 적에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자신의 인수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었다는 이유로 진한의 여덟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에 편입시키려 하였는데, 그때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잘못 전하여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화가 나서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궁준)은 전사했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망시켰다.
그 풍속은 기강이 없는데, 비록 여러 나라의 도읍에 주수(主帥)가 있으나 읍락에 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
궤배( 拜)하는 예 또한 없다.
거처는 토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 같으며, 출입문은 위로 나 있다.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 함께 살며 장유와 남녀의 분별이 없다.
그들의 장례에는 관은 있으나 곽은 사용하지 않는다.
소나 말을 탈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사용해 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는데, 금·은이나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들어내는데, 마치 예리한 무기와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그 나라에서 집을 짓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은 모두 가죽끈을 몸에 묶고, 밧줄로 한발쯤 되는 큰 나무를 매달고 하루 종일 소리를 치며 일을 하는데,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장하며 또 이를 건장하다고 여긴다.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무리 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는데, 밤낮을 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일어났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탁무(鐸舞)와 비슷하다. 10월에 추수를 한 다음에도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그 지역으로 들어온 사람은 누구라도 잡아가지 못하므로 도둑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와 같다고 할 수 있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 나라 북방의 군에 가까운 여러 나라는 예절과 풍속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노비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진기한 보물은 산출되지 않고, 동물과 초목은 대략 중국과 동일하다.
큰 밤이 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다.
또 세미계(細尾 )가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5자 남짓 된다.
그 지방 남자들은 간혹 문신을 한 사람도 있다. 또 주호(州胡)가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옷을 상의만 입고, 하의는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이 대대로 전해오는 말이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진(秦)나라 사람들이 고역을 피하여 한국으로 도망하여 오자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분할하여 주었다" 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서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 하며, 도둑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를 부를 때는 도(徒)라 하는 것이 진나라 사람들과 비슷하니 연나라·제나라의 말은 아니다.
낙랑 사람들을 아잔(阿殘)이라고도 한다.
이는 동방 사람들이 자기를 아(阿)라고 하는데, 낙랑 사람들 중에 본래 그 곳에 남아 있던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지금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여섯 나라였으나, 점점 열 두 나라로 나뉘어졌다.
☆ 진한 12국 : 이저국·불사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염해국·군미국·여담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사로국·우유국
변진도 열두 나라이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각각 거수가 있다.
세력이 큰 사람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을 험측(險側)이라 하며, 그 다음을 번예(樊濊), 다음을 살해(殺奚),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
이저국(已 國)·불사국(不斯國)·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근기국(勤耆國)·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염해국( 奚國)·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군미국(軍彌國)·변진미오사마국(弁辰彌烏邪馬國)·여담국(如湛國)·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호로국(戶路國)·주선국(州鮮國)·마연국(馬延國)·변진구사국(弁辰狗邪國)·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변진안사국(弁辰安邪國)·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사로국(斯盧國)·우유국(優由國)이 있는데, 변한과 진한을 합하여 24국이다.
큰 나라는 4∼5천가이고, 작은 나라는 6∼7백가로서 총 4∼5만 호이다.
열두 나라가 진왕(辰王)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 변한 12국 : 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변진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변진반로국·변진낙노국·변진미오사마국·변진감로국·변진구사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사국·변진독로국
진한의 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세워주어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한이 자립하여 스스로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양잠을 하여 비단과 베를 짤 줄 알고,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장사를 지낼 때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이다.
그 나라에서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쇠)로 이루어지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또 두 군(낙랑군과 대방군을 말함)에도 공급하였다.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비파가 있는데, 그 모양이 축과 비슷하고 연주하는 음곡도 있다.
어린애를 낳으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기 때문에 지금 진한 사람들의 머리는 납작하다.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문신을 한 남녀가 있기도 한다.
보병전을 잘하며,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그들의 풍속에는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길을 양보한다.
변진은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며 성곽도 있다.
의복과 주택은 진한과 같다.
언어와 습속이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방식은 달라서 문의 서쪽에 모두 귀신을 모신다.
그 중 독로국(瀆盧國)은 왜(倭)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열두 나라에 왕이 있으며, 체구는 모두 장대하다.
의복은 청결하며, 장발로 다닌다.
또 광폭의 가는 베를 짜기도 한다.
법규와 풍속은 특히 준엄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대강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이 한(韓)은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왕검성(현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졸지에 빼앗기고 남쪽의 마한 월지국(목지국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 부근)으로 도망쳐 다시 세운 나라로서 위만조선과는 왕래도 하지 않을 정도로 원수지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준왕의 입장으로서는 위만을 사람 같지도 않은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준왕은 기원전 195년에 위만이 오갈 데가 없어 조선으로 망명해오자 그를 받아주고 박사로 임명하고, 나라 서쪽에 사방 백리 땅을 주어 살게 해 주는 등 온갖 호의를 베풀어주었으나 위만이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로부터 흘러 온 사람들을 포섭하여 세력이 커지자 한나라군이 열 군데 길로 쳐들어오니 왕검성으로 가서 왕을 호위하겠다고 한 뒤 왕검성에 도착하자마자 왕검성을 공격하여 그를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졸지에 왕검성을 빼앗긴 준왕은 근신과 궁인들만을 이끌고 급히 남쪽으로 도망쳐 한의 마한 땅에 이르러 월지국에 새로이 도읍을 정하고 나머지 반쪽의 땅인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하여 한이라 하고 다시 한왕에 올라야 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기 때문에 준왕은 위만을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한이 대대로 위만조선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던 것은 당연했고 위만조선과는 어떠한 이유로든 상대하려 하지 않고 위만조선이 멸망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따라서 위만조선과 한은 비록 국경을 접하고 있었지만 접촉이 전혀 없는 별개의 나라였다.
그리고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곳은 위만조선 땅이었고,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고 현토군과 낙랑군으로 두 부를 만들었던 땅도 역시 위만조선 땅이었지 한의 땅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통전에서,
"조선의 유민(遺民)은 모두 70여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땅이 사방 백리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70여국과 후한서에 "서한(西漢 : 전한)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으로 네 군(郡)을 두었다가 뒤에 두 부를 두었다. 법령이 차츰 번거로워지자 이것을 78개의 나라로 나누니, 이들은 각각 만호(萬戶)였다"고 한 78개국에 대한 기록은 한을 그렇게 나누었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켰을 때 위만조선이 70여개(72개국 또는 78개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한(韓)이 78개 소국(마한 54개 소국, 진한 12개 소국, 변한 12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위만조선도 72개(또는 78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자 이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이 기록을 한(韓)에 대한 기록으로 오해하고는,
"마한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조그만 읍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나라라고 불렀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개의 작은 읍을 차지했는데 모두 나라라고 했다.
변한은 남쪽에 있어 역시 12개의 작은 읍을 차지했는데 이들도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라는 주를 달아 놓아 후세 사람들도 혼동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삼국유사에서 언급된 72국이라는 의미는 원래의 위만조선이 72개(혹은 78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그 72개(혹은 78개)소국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전한서 지리지에 기록되어 전하는 낙랑군 25개 현 등의 이름이 원래 위만조선의 72개(혹은 78개) 소국 중의 일부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