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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왕후들의 성씨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1. 28. 02:10

윤여동설 - 백제 왕후들의 성씨 - 최초주장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 백제왕후가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라는 명문이 있다]

  

  백제왕들의 성씨가 "부여(扶餘)"씨라는 것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어 우리는 지금 그를 알고 있지만, 그 백제왕들이 과연 어느 성씨의 여인들을 왕후로 맞아들였는지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전북 익산 미륵사지서탑 해체과정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 "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에 이르러 백제(반도백제)왕후 중 한 사람의 성씨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백제(대륙백제) 왕후의 성씨에 대하여 추정해 볼 수 있는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지만 대체적으로 진(眞)씨와 해(解)씨들이 왕후를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보인다.
  시조 온조왕의 왕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고,

  2대 다루왕 10년(A.D.37)에 "우보 흘우를 좌보로 삼고, 북부 진회로 우보를 삼았다"라고 하면서 진씨들이 중앙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어 진씨들이 왕후를 많이 배출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9대 책계왕의 왕비는 대방공주 보과(寶菓)라고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공손(公孫)씨였을 것이고,

   13대 근초고왕 2년(A.D.347) 조를 보면, "진정(眞淨)을 조정좌평으로 삼았는데,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매우 흉악하고 어질지 못하며, 일에 대해서는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았으며, 권세를 믿고 마음대로 하니 백성들이 그를 미워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14대 근구수왕 2년(A.D.376) 조에 "왕의 외삼촌 진고도(眞高道)로 내신좌평을 삼아 정사를 맡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근구수왕의 아버지인 근초고왕의 왕후는 "진(眞)"씨였음에 틀림없고,    15대 침류왕 조를 보면,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장자이다. 어머니는 아이부인(阿 夫人)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근구수왕 때도 진(眞)씨들이 외척으로서 실권을 잡고 있을 때였으므로 아마 근구수왕은 진씨가문의 딸이었던 아이와 혼인했을 것이고, 또 그 아들인 15대 침류왕 역시 진씨가문의 여인과 혼인했던 듯 하다.   이는 17대 아신왕 때 좌장 진무를 시켜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관미성과 북쪽 변경의 여러 성을 되찾으려 했는데, 진무가 왕의 외삼촌이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침류왕의 아들이었던 17대 아신왕은 나이가 어려 그의 숙부였던 16대 진사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되자 그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해(解)"씨 집안의 여인과 혼인한 후  처가인 해씨들과 외가인 진씨들이 힘을 합하여 왕위를 되찾았으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고 무릎꿇고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라고 해야했고, 58개성과 7백개 촌을 빼앗기게 되자 그 땅을 되찾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17대 아신왕은 이번에는 태자인 전지를 왜국에 볼모로 보낸 후 왜국의 군사력을 빌어 잃어버린 땅을 찾으려 시도했던 듯 하다.  그런데 후일 아신왕이 죽게되자 이 아신왕의 외가인 진씨들이 아신왕의 막내동생인 첩례를 왕위에 옹립하려 하자 전지왕을 왕위에 올리려는 해씨들과 충돌하게 되어 사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18대 전지왕 원년 조를 보면,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니 아들 구이신을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전지왕 때 해충(解忠), 해수(解須), 해구(解丘) 등을 요직에 기용하고 있고, 이들이 모두 왕의 친척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전지왕의 외가와 처가는 모두 해씨 집안이었을 것이다.   
   어느 사람은 전지왕이 태자시절 왜국에 볼모로 가 있다가 아신왕이 죽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을 보고는 이 팔수왕후가 왜국 응신천황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팔수왕후가 백제 대성8족의 하나였던 해씨 집안의 딸이 틀림없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는 일본서기 응신천황 25년 조에, "백제의 직지왕(전지왕)이 죽었다. 아들인 구이신이 왕이 되었다. 왕은 나이가 어렸다. 목만치가 국정을 농단하였다. 왕모와 간음하여 무례하게 행하여지는 것이 많았다. 천황이 듣고 불러들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팔수가 정말로 왜국 응신천황의 딸이었다면 자기나라 공주를 욕보이는 이러한 기록을 일본서기에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백제는 대륙백제(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중, 하류 일원이 대륙백제의 중심강역이었다)에서 12대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과 13대 근초고왕 사이에 왕위다툼이 벌어져 패한 무광왕이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다시 세운 나라였다.
   반도백제는 서기 365년경 세워졌고, 무광왕의 후예인 모도왕때 이르러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일하고 모도왕의 손자인 동성왕이 479년에 대륙으로 다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면서 두 백제가 다시 통합을 이루기는 했으나 왕위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로 나누어 각각 왕위가 이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왕대는 대륙백제의 왕들이고,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백제 무광왕과 남제서 등에 나타나는 백제 모도왕(곤지의 아버지이며, 동성왕, 무령왕의 할아버지)은 반도백제의 왕이었다.
   반도백제가 언제까지 유지되었는지는 기록으로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으나 대륙백제가 서기 660년에 멸망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의 기록으로 인하여 해묵은 논쟁거리가 하나 생기게 되었는데, 백제왕후의 성씨가 "사탁(沙 )"씨라는 복성이냐 아니면 "사(沙)"씨의 외자 성이냐 하는 것이다. 
  백제의 성씨에 대해서는 이미 삼국사기 개로왕 21년(A.D.475)의 조의 주에도 목협만치와 조미걸취의 성씨에 대하여 목협(木 )이 목(木)씨와 협( )씨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이들의 성씨가 목협(木 )씨와 조미(祖彌)씨의 복성이냐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고, 또 백제왕실의 성씨가 원래는 "부여(扶餘)"씨인데 대개의 중국 사서들은 "여(餘)" 씨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해묵은 논쟁이라 하는 것이다.
  수서 백제전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의 대성8족은 사(沙), 연(燕), 협( ), 해(解), 정(貞), 국(國), 목(木), 백( )씨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백제전에는 사(沙), 연(燕), 협( ),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묘(苗)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익산 미륵사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기록 속의 백제왕후가 "사탁(沙乇)" 씨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수서와 북사에는 정(貞)씨와 진(眞)씨, 백( )씨와 묘(苗)씨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글자형태가 비슷하여 판각과정에서 잘못 판각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들을 검토하여 다시 정리해 보면, 백제의 대성8족은 사(沙), 연(燕), 협( ),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백( )씨였을 것이다.

 

  부여에서 출토된 사택지적비편에서는 "사택지적(砂宅智積)" 이라는 사람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 황극천황 원년인 642년 2월 조를 보면, 서명천황이 죽자 백제에서 왜국에 조문사절을 보냈는데, 그 사신을 따라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난해 11월 대좌평 지적(智積)이 죽었다" 고 말했다고 하고, 또 7월 조를 보면, "백제의 사신 대좌평 지적(智積) 등에게 조정에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혹본에는 사신 대좌평 지적 및 그 아들 달솔○○, 은솔 선군이라 했다]" 라고도 기록되어 있어 사택지적비 속의 사택지적과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대좌평 지적을 연관시켜 볼 수는 있겠으나, 다만 일본서기는 471년 11월에 죽었다는 지적이 472년 7월에 살아 있었고 왜국에 사신으로 오자 잔치를 베풀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실제 사택지적과 그 아들들인 달솔○○와 은솔 선군이 왜국에 사신으로 왔던 때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 실제 백제 대좌평 지적과 그 아들들이 왜국에 사신으로 왔다간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왜국 관리들이 앞서 왜국에 사신으로 왔다간 대좌평 지적의 안부를 뒤에 온 백제조문 사절단에게 묻자 백제 조문사절단을 따라왔던 종자들이 대좌평 지적이 3개월 전인 지난해 11월에 죽었다고 말해 주었다고 생각된다.

  

 

  어느 사람은 사택지적비편 속의 사택지적(砂宅智積)과 사리봉안기의 사탁적덕(沙乇積德) 그리고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져 있는 대당평백제국비명에 나타나는 대좌평 사타천복(沙 千福 : 일본서기에는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이라 기록되어 있다)을 동일 집안일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택(砂宅)과 사탁(沙乇) 그리고 사타(沙 )의 글자형태가 달라 이들을 단순하게 동일 성씨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성씨가 원래는 대성8족의 하나인 "사(沙)"씨였으나 분파가 되면서 사택(砂宅), 사탁(沙乇), 사타(沙 ), 사택(沙宅)씨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면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탁적덕의 딸 백제왕후의 원래 성씨는 "사(沙)"씨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혹시 사(沙)씨와 사탁(沙乇)씨, 사택(砂宅)씨, 사타(沙 )씨, 사택(沙宅)씨가 전혀 별개의 성일지도 모르지만 백제의 대성8족에 사씨가 기록되어 있고, 사탁씨가 왕후를 배출하는 가문임을 감안해보면 사씨와 사탁씨는 동일 성씨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사(沙)"씨의 등장은 아신왕 7년(A.D.398) 2월 조에 "진무로 병관좌평을 삼고, 사두(沙豆)로 좌장을 삼았다" 동성왕 6년(A.D.484) 7월 조에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을 하려 했는데, 약사가 서해해상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가지 못했다" 라고 하면서부터 나타나게 되고, 일본서기에는, 흠명천황 4년(A.D.543) 12월 조에 백제의 상좌평 사택기루(沙宅己婁)라는 인물의 이름이 나타난다.   백제 말기 사택씨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바로 이 반도백제 땅에 세워진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사리봉안기가 출토되었고, 그 기록에 백제왕후가 좌평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딸이고, 바로 이 왕후가 미륵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를 보면 당시 사탁씨는 반도백제의 왕후를 배출할 수 있는 대호족이었고, 대단한 권력과 함께 부를 가졌던 듯하다.
  그런데 그로부터 1,500여년이 지난 지금 사(沙)씨, "사탁(沙乇)"씨라는 성씨는 한반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고, 백제왕후가 살았고 호화로웠을 왕궁의 흔적은 땅속에 묻혀버렸고, 백제왕후가 세웠다는 대가람도 뎅그라니 주춧돌만 남아 있고, 탑도 무너져 버렸으니 영화라는 것도 바람 따라 흘러가 흩어져 버리는 한 점 뜬구름일 뿐일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