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고구려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2. 18. 05:33

윤여동설 - 고구려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고구려와 낙랑의 접촉 기록은 3대 대무신왕 15년(A.D.32) 4월 조에, 낙랑왕 최리가 언급되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면서 시작되는데, 사실은 서기 30년에 이미 낙랑동부도위 땅을 고구려가 빼앗았던 듯하다.  
  그리고 대무신왕 20년(A.D.37) 조에,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다시 27년(A.D.44) 조에, "가을 9월 한나라(후한)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록의 의미를 지금까지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낙랑군과 낙랑국에 대하여,
  낙랑군은 북한 평양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낙랑국은 강원도 춘천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역사와는 관련이 없고, 서기 37년에 멸망한 낙랑은 최리의 낙랑국을 말하는 것으로서 한반도의 평양 부근에 위치했는데 고구려 대무신왕이 바로 그 최리의 낙랑국을 쳐서 빼앗아가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서해(황해)바다를 건너와 살수이남 땅을 되찾아 그곳에 다시 낙랑군을 설치했던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을 압록강 북쪽 환인, 국내성을 집안, 평양성을 북한 평양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남쪽에 위치했었다는 낙랑은 당연히 한반도 평양 부근에 위치했을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한반도에 낙랑은 없었다.

 

☆ 낙랑 유물 몇 점이 한반도 평양 부근에서 출토되었다 하여 평양 부근에 실제 낙랑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어느 사람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전쟁을 피하여 바다건너 일본으로 갔고, 그때 밥그릇, 국그릇으로 쓴다고 조선백자를 몇 점 가지고 갔다고 치자. 그런데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고국이 그리울 때마다 그 조선백자를 보고 또 보고 하다가 그곳에서 죽어 묻히게 되었는데 그 후손들이 그 조선백자를 무덤에 함께 묻어 주었다가 지금에 이르러 그 무덤이 발굴되었고, 조선백자가 출토되었다고 하여 그 무덤 부근이 조선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낙랑군은 한사군의 한 군으로서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설치했으나 기원전 82년에 임둔군을 예가 차지하고 독립하게 되고, 진번군은 맥이 차지하게 되자 그 두 군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한나라에서는 북쪽 국경 방어를 위해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옛 현토군에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었는데, 전한→신→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최리라는 사람이 바로 그 낙랑군 땅과 낙랑동부도위땅을 차지하고 낙랑국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고구려 대무신왕이 서기 30년에 먼저 낙랑동부도위를 쳐서 빼앗고, 서기 37년에 다시 낙랑국 마저 쳐서 빼앗아 최리의 낙랑국을 멸망시키게 되는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는 바로 이때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하여 그 땅은 고구려의 소유가 된다.
  그런데 서기 44년에 이르러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옛 최리의 낙랑국 땅의 일부인 살수이남 땅을 다시 탈환하여 그곳에 낙랑군을 부활시키게 되는데, 필자는 전한 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 그리고 최리의 낙랑국과 구분하기 위하여 이를 후한낙랑군이라 부른다.
  후한낙랑군의 위치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흥륭 부근으로서 그 동북쪽에 위치한 옛 왕검성이며, 전한낙랑군의 치소, 최리의 낙랑국의 왕성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은 고구려가 차지하게 되고 평양성이 된다.
  그리하여 247년 동천왕이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자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북한에 있는 청천강을 살수(薩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그랬을 경우 서기 44년에 광무제가 설치했다는 후한낙랑군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북한 평양은 지금 청천강의 남쪽에 위치해 있고, 그 땅이 후한 낙랑군이 되었다면 동천왕이 후한낙랑군에 위치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역사를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 고구려의 졸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부근이고, 요동성은 북경 부근,  환도성은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이며,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그리고 대륙신라는 요녕성 호로도, 금주 부근에, 대륙백제는 도산 남쪽, 난하 하류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게 후한낙랑군이 설치되자 민중왕 4년인 서기 47년에 잠우락부 사람 1만여 명이 낙랑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인데 그 이후 낙랑과의 접촉기록은 한동안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고구려 동천왕이 서기 246년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이 함락되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옥저까지 쫓긴 적이 있었는데, 고구려 동부사람 뉴유가 거짓말로 항복하겠다고 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적진으로 가서는 음식 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꺼내 위나라 장수를 찔러 죽이고 함께 죽게 된다.
  그리하여 지휘관을 잃은 위나라군은 혼란에 휩싸였고, 고구려군이 그 혼란한 틈을 타서 반격하자 위나라군이 낙랑(樂浪)으로 철수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게 된다.
 

☆ 삼국사기에는 이때 동천왕이 남옥저까지 쫓겼다고 하고, 중국 사서들에는 북옥저까지 쫓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미천왕 14년인 서기 313년에 이르러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라는 기록을 끝으로 고구려와 낙랑과의 전쟁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후한 광무제가 지금의 흥륭 일원에 설치했던 후한낙랑군은 서기 313년에 이르러 우리의 역사 강역에서 완전히 소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낙랑이 소멸하게 되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국경을 직접 맞대게 되었고, 그로부터 삼국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백제 근초고왕이 371년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승리하게 되고,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다시 백제를 침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그 땅을 빼앗게 되는 식이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지속적인 공방전을 펼치게 되는데, 그 틈을 이용하여 신라 진흥왕도 뛰어들어 555년경에 이르러 북한산까지를 차지하게 되고, 611년 수나라가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자 신라의 진평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죽령을 넘어 500리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 북한산이란 지금 서울의 북한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황도시와 승덕시의 경계를 이루는 도산 부근을 말하는 듯 하다.  


 
  그리하여 선덕여왕 11년(A.D.642)에 김춘추가 백제의 침공을 받고 대야성에서 죽은 딸 고타소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군사를 빌리려고 고구려에 가자 보장왕이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다. 네가 만일 죽령 서북쪽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어줄 수 있다"라고 말했던 것인데, 죽령 서북쪽 500리 땅이라는 것은 곧 맥의 땅으로서 지금의 영성, 능원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신라는 요녕성 호로도 금주(錦州)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후한의 광무제가 살수이남에 설치했던 후한낙랑군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죽령이나 북한산을 한반도의 죽령과 북한산이라 하는 것이다.
  그저 우리의 모든 역사 기록을 억지로 한반도로 끌어들여 해석하고자 후한 광무제가 설치했던 낙랑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말 미친 짓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광활한 대륙의 우리 옛 땅을 가져가라고 중국에게 거저 내주고 있는 꼴이다.
  이 후한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고북구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고, 한반도에는 어떠한 형태의 낙랑도 존재한 적이 없다.
  북한 평양이 낙랑군이었다고?
  또 강원도 춘천이 낙랑국이었다고?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이 남대방이었고, 황해도가 북대방이었다고?
  이것은 정말 소가 웃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