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포상8국은 어디에 위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포상8국(浦上八國)"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10대 나해이사금 14년(A.D.209)년 조에, "가을 7월에 포상8국이 공모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왕자가 구원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 주도록 하였는데, 8국 장군들을 격살하고 포로 6천여 명을 잡아 돌아왔다"라고 하면서 나타나는데,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에는,
신라 10대 나해이사금 때 "8포상국이 공모하여 아라국(阿羅國: 아라가야)을 치니 아라에서 사신을 보내 구원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이사금이 왕의 손자 나음을 시켜 부근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 주도록 하였는데, 곧 8국의 병사들이 패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본기와는 인물의 이름이 다르나 포상8국이 가야를 침공했다는 기본 내용은 동일하고, 골포(骨浦)·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가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피은 제8 물계자 조를 보면, "제 10대 나해왕 즉위 17년(임진: A.D.212)에 보라국(保羅國)·고자국(古自國: 지금의 固城)·사물국(史勿國:지금의 泗州)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하여 변경을 침범해 왔다. 왕이 태자 나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니 여덟나라가 모두 항복했는데, 이때 물계자의 군공이 제일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포상8국의 일부 나라이름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이때는 포상8국이 가야가 아닌 신라의 변경을 침공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포상8국이 209년에 난을 일으켜 아라가야를 쳤고, 212년에는 신라를 침공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 다리가 없던 시절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을 나루라 하고 그러한 곳에 "진(津)" 자를 붙여 지명으로 삼았는데, 광진, 노량진, 양화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포(浦)는 포구라는 의미로서 바닷가에 위치한 항구를 뜻하는데, 제물포, 목포, 구룡포, 서귀포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이 포상8국(浦上八國)은 바닷가 포구 부근에 위치했던 여덟 나라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신라가 한반도의 경주를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고, 가야가 경상남도에 존재했던 나라였다고 인식함으로써 이 포상8국 역시 경상남도 남해안에 위치했을 것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신라 초기에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위치하고 있었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의 동쪽에는 낙랑, 북쪽에는 말갈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당나라의 역사서인 신당서에는, "신라는 변한의 먼 후예이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땅의 크기가)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국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당서의 기록에 따라 각 나라들의 위치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이 그려볼 수 있다.
고구려
↑
요동 ← 백제 ← 신라 → 장인국 ↓
↘
바다 일본
☆ 그렇다면 백제의 서쪽에 대해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송서를 보면,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와 밀접했던 양나라의 역사서인 양서에도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백제의 서쪽은 요동으로서 바다가 아닌 육지였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요동, 백제, 신라, 장인국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은 한반도일 수가 없다.
신당서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을 차지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고, 신라의 동쪽에 장인국(長人國)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 상식으로 보면 신라는 한반도의 경주에서 건국되었고, 그곳이 곧 옛 진한 땅이었다.
그러다가 후일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 땅과 고구려의 남쪽 일부를 차지했으나 한나라 때의 낙랑이었다는 북한 평양까지는 차지한 적이 없었다.
또한 한반도 경주의 동쪽은 동해바다인데, 신라의 동쪽에 장인국이 위치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장인국이 동해 바다 가운데 위치했었다는 말이니 신당서의 기록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눈치 빠른 분이라면
"어? 그렇다면 우리의 신라와 가야가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단 말이잖아?"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당서에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살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신당서가 신라의 위치도 제대로 모르고 적었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신라와 당나라는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전쟁도 했으며, 오랜 세월동안 사신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가야는 어디에 위치했었다는 말일까?
신라는 저 멀리 발해건너 만리장성이 시작된 진황도 산해관 부근(사실은 요녕성 금주시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가야는 그곳으로부터 수천리 떨어진 한반도의 경상남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위치했다고 기록할 수 있었을까?
이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신라가 만리장성이 시작된 지금의 진황도 산해관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가야 역시 그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고, 가야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진황도 산해관부근에 위치했다면 그 가야를 침공한 포상8국 역시 한반도의 남해안이 아닌 발해 바닷가 부근에 위치한 나라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를 알지 못하고, 가야를 침공했던 포상8국을 한반도 남해안에서 찾으려 했으니 그 포상8국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고, 설만 무성할 뿐이었다.
포상8국은 발해 해변가 지금의 진황도 근처에서 찾아야 한다.
발상의 전환을 이루지 못하고 한반도만을 고집하는 한 우리의 고대 역사를 바로 해석하기 어려울 것이다.
빨리 눈을 돌려 발해 건너 하북성 당산, 진황도를 보아야 백제를 찾을 수 있고, 진황도, 호로도, 금주시(錦州市)를 보아야 신라와 가야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 북쪽 승덕시를 보아야 고구려를 찾을 수 있고, 내몽골 적봉, 옹우특기, 고륜기를 보아야 옥저와 동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요하가 옛 요수이고, 요수 동쪽이 요동이라꼬?
바보들이나 그러한 주장을 할 뿐 고수라면 북경 부근에서 요수와 요동을 찾을 것이다.
숙신이 연해주에 있었다고?
멍청이들이나 그러한 주장을 할 뿐 내공을 쌓은 사람이라면 대흥안령산맥에서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을 찾을 것이다.
신라가 양자강 부근에서 건국되었다고?
헷가닥 된 사람들이나 그러한 주장을 할 뿐 한 수 깨우친 사람이라면 난하와 장성을 주목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진실을 찾으려면 "윤여동설"을 주목해야 한다.
"윤여동설" 속에 우리 역사가 반짝 반짝 모두 밝혀져 있으니까.....^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