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혁거세거서간 탄생설화와 신라건국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4. 19. 21:19

윤여동설 - 혁거세거서간 탄생설화와 신라건국 - 최초주장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의 혈통이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우물 옆 숲 가운데에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었다. 즉시 가서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를 쪼개니 그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오므로 이를 거두어 길렀다. 그의 나이 10여세가 되니 매우 숙성하여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하므로 떠받들어 높이더니 이 때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혁거세거서간의 출생에 대해 신화적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에는,
  "전한 지절 원년 임자(B.C.69) 3월 초하루에 6부의 조상들은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여 회의를 했다.
  우리들은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방자하게도 제멋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성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으로 추대하고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우물가에 번개 빛처럼 상서로운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끓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그곳에 자주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습이 단정하고 이름다웠다. 모두 놀라고 신기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었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이라 하고 위호를 거슬감이라고도 했다"
라고 역시 신화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사로의 시왕(시조왕)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잉태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부여로부터 도망쳐) 눈수를 지나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도착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때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집에 데려다 길렀다. (혁거세가) 나이 13세가 되자 지혜가 빼어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어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며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이라고도 하고 또는 사로라고도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혁거세의 어머니가 부여공주인 파소라고 기록하고 있고, 혁거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다.

 

☆ 동부여는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한 나라였고, 눈수는 길림성 대안을 지나는 강이며, 동옥저는 내몽골 적봉과 옹우특기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진한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기록 중 과연 어느 기록이 진실일까?
  사람이 새나 병아리가 아닌 바에야 진짜 알에서 태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여자가 남자 없이 아이를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해 생각해 보면  혁거세 탄생설화는 태백일사의 기록이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혁거세가 태어난 때는 기원전 69년이고, 13세 때인 기원전 57년에 신라의 시조가 된다.
  그 어머니인 파소가 18세쯤 혁거세를 낳았다고 보면 파소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86년이 된다.
  기원전 86년은 북부여가 졸본부여에게 멸망당하고, 북부여의 해부루가 멸망한 북부여 유민들을 이끌고 가섭원으로 옮겨 가 동부여를 다시 건국한 해인데, 이 어수선한 해에 파소가 출생하게 된다. 
  그런데 삼국유사 감통 제7 선도성모 수희불사 조를 보면,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裟蘇: 婆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이 솔개 발에 서신을 매달아 보내 말했다.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그리하여 사소(파소)는 서신을 보고 솔개를 날려보내니 선도산으로 날아가서 멈추므로 드디어 그곳에 살아 지선이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혁거세의 어머니 파소(사소)는 동부여 해부루왕의 공주였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조의 논평을 보면 정화연간에 김부식이 사신 일행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우신관에 이르러 한 사당에 선녀의 화상을 걸어놓은 것을 보았는데,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이를 아십니까? 옛날 어떤 제왕의 딸이 남편없이 잉태해 남들로부터 의심을 받을까 하여 곧 바다를 건너가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곧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으며, 제왕의 딸은 지선이 되어 선도산에 있게 되었는데 바로 이 초상입니다"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중국 송나라에도 혁거세의 어머니인 파소의 사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시조 혁거세의 혈통은 성씨를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동부여 해부루왕의 딸인 파소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혁거세의 성씨를 박씨라고 한 것으로 보아 파소는 혁거세 아버지의 원래 성씨가 박씨(朴氏)였음을 알고 있었고 이름이나 신분도 알고 있었을 것이나 끝끝내 밝히지 않고 죽은 것으로 보아 무언가 숨겨야할 말못할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혁거세는 동부여 해부루왕의 외손자로서 북부여 천제 해모수에 혈통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건국시조가 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삼국은 모두 부여에 혈통이 닿아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고구려는 북부여 해모수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였고,
  백제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였으며,
  신라는 동부여 해부루왕의 외손자의 후예들의 나라였다.
  

  그렇다면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후 그 어머니인 태후 파소는 신라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았을까?
  삼국유사에는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서연산)에서 살면서 나라를 진호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후로 항상 삼사(나라에서 지내는 큰 제사)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맨 위에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파소를 매우 중요하게 받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