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신라의 호공 발해를 헤엄쳐 건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38년(B.C.20) 조를 보면,"봄 2월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더니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 변한은 우리의 속국으로서 근년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니 대국을 섬기는 예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하였다.
호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두 성인(필자주 :혁거세거서간과 알영부인을 말하는 것이다)이 처음으로 임금이 되면서부터 사회가 안정되고, 시절은 좋아서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서로 존경하고 겸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백성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건마는 우리 임금이 겸허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는 것은 지나친 예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몹시 성을 내고, 무력으로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이유입니까?' 하였다.
(마한)왕이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고 하니 측근자들이 그러지 못하게 말려 돌아가도록 놓아주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견디지 못하여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대부분이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더니 이 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여 가므로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이런 책망이 있었던 것이다.
호공이란 인물은 그 민족과 성씨가 자세하지 않으나 본래는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달고 바다를 건너왔었기 때문에 호공이라고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유추해 볼 수 있게 하고 호공이 원래 왜인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탈해이사금 조를 보면, 탈해가 양산 아래에 있는 호공의 집을 바라보고는 좋은 집터라 하여 꾀를 써서 빼앗아 거기서 살았는데, 그곳이 후일 월성이 되었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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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 기이 제1 제4대 탈해왕 조를 보면, 탈해가 토함산 위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이 있는가 찾아보다가 호공의 집터가 좋아 보이자 몰래 숯돌과 숯을 묻어 놓고는 이 집이 원래 자기 조상이 살던 집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여 결국 호공으로부터 그 집을 빼앗아 살았다고 하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지켜본 남해왕이 탈해가 지혜가 있음을 알고 큰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탈해왕은 후일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 호공을 대보로 임명하게 되는데, 이때의 호공은 박을 허리에 매달고 발해를 건너온 호공이 아니라 호공의 아들 또는 손자쯤의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호공이라는 사람은 원래 어디에서 살다가 어느 바다를 건너 신라로 왔던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이 기록을 보고는 호공이 지금의 일본열도 또는 대마도쯤에서 허리에 박을 매달고 대한해협을 건너 경상북도 경주 부근에 위치했을 신라로 오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했으나 그것이 틀린 것임을 이제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후한서 한전을 보면,
"한은 삼종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진(변한)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모두 78국이며 백제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수서 신라전을 보면,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불렀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신라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당나라의 역사서인 신당서에는,
"신라는 변한(필자주 : 북사에는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의 먼 후예이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강역이)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국에 닿았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신라와 당나라는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하기도 했으며, 그 후에는 신라와 당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 백년간 수시로 사신이 오갔기 때문에 신라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었을 리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기록들을 세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하는데, 세밀히 따져보면 우리의 역사 상식과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후한서에 의한 삼한과 주변국의 위치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이 그려볼 수 있는데, 후일에 이르러 마한 땅(진번 땅이라고도 하는데, 백제가 건국될 즈음에는 마한이 차지하고 있었다)에서 백제가 건국되었고, 진한 땅에서 신라가 건국되었으며, 변한(변진) 땅에서 가야가 건국되었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가 알고 있는 우리고대 역사의 상식이다.
[후한서에 의한 삼한과 주변국의 위치]
낙랑 예(예맥)
(후한낙랑군)
마한 진한
변진(변한)
왜
그런데 신당서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고, 신라가 동쪽으로 장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신당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 역시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 경사(지금의 서안)에서 5천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평양성과 신라가 함께 옛날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것은 육지로 접하고 있어, 강을 경계로 했거나 산맥을 경계로 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또 신라의 동쪽에 장인국이 있었고, 신라의 동남쪽에 일본이 있었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었고, 신라의 남쪽에만 바다가 있었다?
이를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 신라가 한반도 경주부근에 위치했다고 해석한다면 장인국이 경주의 동쪽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말이 되지 않고, 억지로라도 장인국의 위치를 비정한다면 동해 가운데 있는 울릉도에 위치했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고, 일본은 지금의 일본열도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었다는 많은 기록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옛 사서 기록 속의 패수를 지금의 난하로 보고 , 낙랑군의 위치를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보고 사서의 기록들을 대입하여 해석해보면 모든 의문이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반도의 경주부근에서 건국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신라는 난하의 동쪽 중국 요녕성 호로도 부근에 위치했었고, 고구려는 난하의 상류에 위치했었으며 그곳이 곧 낙랑군이었고, 백제는 난하의 하류에, 일본은 요동반도 쯤에, 가야는 호로도 흥성 부근에, 삼국의 전신인 마한은 당산, 풍윤 부근에, 진한은 금주 부근에, 변한은 호로도 부근에, 주변국인 예(예맥), 동옥저 역시 호로도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며, 고조선, 부여, 위만조선, 한사군, 진번군, 요동군 등도 모두 난하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 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북경 부근이었다는 말이 되고 북경은 우리의 옛 땅이었다는 말이 된다.[북경 부근은 요동군으로 비정되고, 요수는 영정하로 비정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했던 고대역사는 모두 거짓 해석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신라가 요녕성 호로도 부근에 위치했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 동남쪽에 위치했었다는 왜국과 신라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장인국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다는 말일까?
이는 바로 고대의 왜국은 다름 아닌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고, 신라의 동쪽에 위치했었다는 장인국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위치했었다는 말이다.
[신라와 그 주변국의 위치]
고구려
(하북성승덕시)
백제 신라 장인국
(하북성당산시) (요녕성호로도) (요녕성심양부근)
바다 일본국
(발해) (요동반도)
☆ 신라의 동쪽에 장인국이 위치했다는 말은 통일신라 때 신라가 예와 동옥저 지역을 차지한 때의 기록으로서 요하 동쪽 지역에 키가 큰 사람들이 사는 장인국(長人國)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들이 남겨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신라의 호공은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허리에 박을 매달고 대한해협을 건너 신라로 왔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요동반도 부근에서 허리에 박을 매달고 발해를 건너 호로도 부근의 신라로 왔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호로도 부근에서 건국된 신라를 경주에서 건국되었다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발해를 건너 신라로 왔던 왜국 사람 호공이 대한해협을 건너 왔었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발상을 전환하면 역사가 환히 보이고, 북경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임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그 발상을 전환하기가 왜 그리도 어려운 것인지..................
☆ 많은 사람들은 경주부근에 고총들이 많고, 신라의 유적, 유물들이 많자 경주가 신라의 천년도읍 금성이라 생각하게 되었지만 사실 경주부근의 고총 중에서 신라 어느 왕의 능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발굴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경주부근에서 5세기 이전의 확실한 신라유물이 발굴된 적도 없다. 경주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이 신라의 유물이라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혹시 한반도 경주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나라가 있었고, 그 역사의 유물은 아닐런지......즉
흉노족인 김일제의 후손들이 후한 광무제에게 쫓겨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세운 왕국이랄까, 그리하여 경주, 김해에서 북방 유목민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이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