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 장수왕릉은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수왕분(壽王墳)에 조성되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장자이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하여, “체격이 우람하고 기개가 호탕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수왕은 서기 394년에 출생하여 409년인 16세에 태자로 봉해졌고, 20세인 413년에 황성(평양동황성)에서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중국에는 남쪽에 동진(東晋)이 있었고, 북쪽은 5호 16국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는데, 탁발규의 북위와 선비족이 세운 북연이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수왕은 왕위에 올라 동진에 사신을 보내니 동진의 안제가 그에게 “고구려왕 낙안군공”이란 작위를 보내온다.
그러다가 420년에 이르러 남쪽에는 동진이 유유에게 멸망하고 송나라가 건국되고, 북쪽은 북위가 양자강 이북을 거의 차지하고 북연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자, 장수왕은 재빠르게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고, 427년에 이르러서는 황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유송, 북위, 고구려가 나란히 천하를 삼 등분한 한쪽의 주인으로서 군림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의 강역은 대개 지금 북경의 서쪽을 흐르는 양하, 관청수고, 영정하를 경계로 하는 그 동북쪽이었다.
그런데 이때 북연왕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해 올 뜻을 전해 오고, 위나라는 연나라의 백랑성을 함락시킨다.
☆ 북연의 도읍 화룡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 방산구 유리하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때 장수왕은 장수 갈로맹광에게 군사 수만 명을 주어 연나라의 도읍인 용성 즉 화룡으로 보내 연나라 임금인 풍홍을 호송하여 데려오게 한다.
그러자 위나라에서는 고구려에게 풍홍을 보내달라고 하지만 고구려는 그를 거절하고 풍홍을 평곽에 있게 했다가 다시 북풍으로 옮기면서 시종들을 빼앗아버리고 그 태자인 왕인을 강제로 데려와 볼모로 삼는다.
그리고는 풍홍을 용성왕이라 부르며 마음껏 조롱한다.
이는 풍홍이 나라를 잃고 망명해 와서도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황제인양 거들먹거렸기 때문이었고, 고구려는 연나라에 맺힌 원한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전에 연나라는 고국원왕 때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미천왕의 유골을 파가고, 미천왕비 주씨와 고국원왕의 왕비를 볼모로 잡아가 고구려가 무려 13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당해야 했었다.
장수왕은 증조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연나라에 당한 수모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풍홍으로서는 고구려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 다시 송나라로 망명해 가려고 했고, 송나라에서도 풍홍을 송나라로 보내 달라고 사신을 보내온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은 그러한 송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연나라왕 풍홍과 그 일족들을 아예 죽여버린다.
이때 고구려는 위나라나 송나라와 대등한 관계로서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고구려의 강역 역시 옛 연나라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어 매우 넓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위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나 상호 강국이었으므로 서로를 존중하며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않는데, 다만 후일 중국 남쪽의 송나라가 멸망하고 남제가 서고 고구려가 남제로 사신을 보내자 중간의 북위가 사신이 남제에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북위가 혹시 남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가운데에 위치한 자기 나라를 공격할까 염려한 것일 뿐이다.
이때 세 나라는 솥발같이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고구려의 위상이 어땠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삼국사기 장수왕 72년(A.D.484) 조에 나타나고 있는데,
“겨울 10월 위(북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위나라에서는 우리나라가 한창 강성하다 하여 각 나라 사신들의 사관을 설치하는데 있어 제(남제)나라 사관을 첫째가게 하고, 우리 사신의 사관이 그 다음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북위에서는 강국인 고구려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했음을 알 수 있다.
남제서를 보면, 489년에도 남제와 고구려가 나란히 북위에 사신을 보냈는데, 북위에서 남제의 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나란히 서게 하자 남제에서 불평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보면 북위는 남제와 고구려를 동일한 강국으로 대우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장수왕은 475년 군사 3만을 동원하여 남쪽의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개로왕을 잡아죽이기도 하는데, 이때 고구려는 매우 강성한 나라가 되어 있었고, 백제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로 나누어져 서로를 원수로 여기면서 교류도 없이 1백년도 넘게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륙백제의 21대 근개루왕(개로왕)은 강한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반도백제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두 백제가 힘을 합친다면 고구려의 팽창 정책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두 백제가 모두 장자파와 차자파로 나누어지기 전의 4대 개루왕의 후손으로서 지난날의 원한 관계를 잊어버리고 다시 통합하자고 제안하게 되는데, 개로왕을 근개루왕이라고도 하게 된 이유이다.
그러자 반도백제에서도 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당시 반도백제의 태자였던 곤지가 대륙백제로 건너가 통합에 관한 사항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당시 대륙백제의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외척인 해씨들은 두 백제의 통합에 반대했다. 그러는 와중에 대륙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고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앞서 장수왕이 중 도림을 선발하여 개로왕에게 보냈을 때 그에게 주어진 임무가 사실은 두 백제가 다시 통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장수왕은 대륙백제의 국론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는 기회를 틈타 대륙백제를 침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백제의 개로왕이 아주 무능했던 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약해진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썼던 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개로왕이 죽자 그 동복동생인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웅진(하북성 노룡)으로 도읍을 옮겨 두 백제의 통합을 추진하면서 반도백제에서 건너간 곤지를 왕명을 출납하는 내신좌평에 임명하자 해씨들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해씨들은 급기야 곤지와 문주왕을 죽여 버리고 나이 어린 삼근왕을 왕위에 올리게 된다.
그러자 당시 곤지의 아버지로서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던 모도왕은 대륙백제의 해씨 타도를 명령했고, 그 명을 받은 진씨 등이 해씨들을 타도해 버리고 삼근왕 마저 제거해 버린다.
그리고 나자 반도백제의 모도왕은 죽은 곤지왕자의 둘째 아들 모대(모태라고도 한다)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이가 바로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강역을 차지한 동성왕이다.
[이때 반도백제의 모도왕이 죽은 곤지의 장자이며 자신의 장손자를 대륙으로 보내지 않고, 둘째를 보낸 것은 곤지가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큰손자는 태손으로 삼아 왕위를 전해주기 위함이었을 것인데, 필자는 동경(청동거울)의 명문에 나타나는 남제왕이라는 왕이 바로 모도왕의 장손자였고, 동성왕의 바로 위 형이었으며,무령왕의 이복형이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로써 서기 365년경 장자파에게 패하여 왕위를 빼앗기고 대륙을 떠나 한반도의 지모밀지로 도망쳐와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새롭게 반도백제를 세워야만 했던 무광왕의 후손인 차자파들은 100년도 더 지나서야 대륙의 땅을 되찾아 돌아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이후 대륙백제의 왕위는 모두 반도백제의 후손으로 이어지게 된다.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로서 처음 대륙으로 건너가 왕위에 오른 사람은 동성왕으로서 479년 11월이었다.
이때 고구려의 장수왕은 86세였는데, 나이가 많았던 탓인지 그리 활동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동성왕에게 서안평을 다시 빼앗기게 되고 옛 근초고왕이 차지했던 요서 진평현까지도 다시 백제에게 내 주게 된다.
그러자 북위와 백제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결국 북위가 백제를 침공하지만 두 백제의 통합된 힘을 모아 동성왕은 그를 물리쳐 버린다.
그렇게 장수왕은 491년 섣달 그믐날 9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는데, 장수왕은 옛날 사람들의 평균수명에 비해 약 두 배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어, 아들은 일찍 죽고 손자(필자주 : 증손자일 가능성도 있다)인 문자왕 나운이 왕위를 잇게된다.
장수왕의 아들이며 문자왕의 아버지였던 조다는 일찍 죽었기 때문에 문자왕은 할아버지인 장수왕의 손에 의하여 궁중에서 길러져 왕위를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장수왕의 능이 어디에 조성되었을까 하는 것은 지금까지 의문이었다.
사람들은 호태왕 비가 발견된 집안에서 장수왕의 능을 찾으려 하였다.
그 아버지인 광개토대왕과 같은 곳에 능을 조성하지 않았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집안의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추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수왕은 도읍을 황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고 평양성에서 죽었다.
☆ 16대 고국원왕은 백제 근초고왕의 침공을 받고, 평양성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백제군이 쏜 화살을 맞고 얼마후 죽었다고 하는데,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 황성이었기 때문에 황성이나 평양성 부근에 묻혔을 것이다. 지금의 북경 동북쪽 하북성 승덕시 부근인데, 이곳이 곧 고구려의 황성(평양동황성), 평양성, 장안성이 위치했던 곳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장수왕은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를 침공하여 한성(현 난하부근의 도산남쪽)을 빼앗았고 평양성(현 승덕시 부근)에서 죽었으므로 장수왕의 능은 평양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장수왕의 능은 지금의 집안이나 북한의 평양이 아닌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승덕시와 흥륭현의 중간 지점에는 "수왕분(壽王墳)"이라는 시골 면소재지 정도의 곳이 있는데, 지명의 유래가 옛날 아주 오래 살았던 왕(수왕)의 능이 있었다하여 수왕분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그곳 노인들은 전한다.
수왕(壽王)의 무덤이라?
아주 오래 살다가 죽은 왕?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라?
그렇다면 그곳 수왕분은 황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쪽의 백제를 쳐서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잡아죽인 고구려 장수왕릉이 조성되었던 곳으로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상 필자가 최초로 주장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북성 흥륭현 수왕분(壽王墳)에서 장수왕릉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북경 동북쪽 흥륭의 수왕분진을 뒤져 고구려 장수왕릉을 찾아보자.
☆ 수왕분진의 정확한 행정구역은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응수영자광구 수왕분진" 으로 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