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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화 - 고구려 22대 안장왕과 백제 처녀 한주의 사랑이야기

윤여동 2009. 6. 21. 10:41

 

윤여동설화 - 고구려 22대 안장왕과 백제 처녀 한주의 사랑이야기

 

                           

 

   삼국사기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 백제 조를 보면,
  "왕봉현[개백이라고도 한다.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만난 곳이라 하여 왕봉으로 불렀다]"
  "달을성현[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올려 안장왕을 맞은 곳이라 하여 후일에 고봉으로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고구려 22대 안장왕과 백제 한씨 미녀의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 삼국 역사의 정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옛날 고구려 문자왕의 아들인 흥안이 태자시절 왕명을 받아 신분을 감추고 장사꾼으로 변복하고 백제의 개백현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적정을 살피다가 백제군에게 발각되어 쫓기게 되었다.

 

☆ 삼국사기 문자왕 7년(A.D.498) 조를 보면, "봄 정월에 왕의 아들 흥안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문자왕 16년(A.D.507) 조에는, "왕이 장군 고로를 보내 말갈과 모의하여 백제의 한성을 치고자 횡악 아래까지 행군하여 주둔했더니 백제가 군사를 출동하여 맞받아 싸우므로 곧 퇴각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문자왕 21년(A.D.512) 조에는, "가을 9월 백제를 침공하여 가불, 원산 두 성을 함락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자 흥안은 510년경 백제의 한산 부근에 정보수집 차 상인으로 변장하고 침투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도망치다가 급한 나머지 어느 큰 저택의 담을 넘어 들어가 숨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한씨 미녀(漢氏美女: 이름이 한주[韓珠]라고도 한다)라는 처녀의 집이었다.
  한씨 미녀는 쫓기는 흥안을 숨겨주었고, 며칠 함께 지내는 사이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며칠 후 흥안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약속하기를,
  "이제 좀 안전해졌으니 나는 내 나라로 돌아가려 하오.
  지금은 위험하여 낭자와 같이 갈 수가 없으니 우선 혼자 돌아갔다가 머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이 땅을 회복한 후 그대와 정혼하겠오. 기다려 준다고 약속해 주시오"  
  "태자님께서 데리러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태자 흥안은 한씨 미녀에게 그렇게 약속하고는 어둠을 틈타 국경을 넘어 고구려로 돌아갔고, 몇 년 후 문자왕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한편,
  백제의 개백현(왕봉현) 태수가 한씨 미녀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는 청혼을 해 왔으나 한씨 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태수는 한씨 미녀를 잡아들여 옥에 가두어 두고는 온갖 협박과 감언이설로 꼬였으나 한씨 미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씨 미녀가 옥에 갇혔다는 소문이 국경을 넘어 고구려 안장왕에게도 전해졌고 그 소식을 들은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만일 개백현을 회복하여 한씨 미녀를 구해오는 자가 있다면 황금 천냥을 주고 만호후에 봉할 것이다" 하였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장군 을밀이 왕의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이 을밀의 신분이 낮다고 반대하여 이에 실망한 을밀이 병이 들었다고 핑계하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황금과 만호후는 필요 없습니다. 신이 한씨 미녀를 구하여 대왕께 올리겠으니 왕의 여동생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여 왕도 허락하였다.
  을밀이 수군 5천을 이끌고 떠나면서 왕에게 말하기를 "신이 먼저 개백현을 쳐서 회복하고 한씨 미녀를 살리겠으니 대왕께서는 대병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오시면 한달 이내에 한씨 미녀를 만나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한수 부근에 군사들을 숨겨 놓고는 결사대 20여명을 뽑아 변장시켜 옷 속에 무기를 숨겨 을밀이 이끌고 개백현에 숨어 들어갔다.    
 
  이때 마침 태수의 생일날이 되자 지방 호족들과 태수의 친구들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여들었고, 흥을 돋우기 위하여 광대들도 불렀다. 
  태수는 한씨 미녀를 불러내 다시 한번 물었다.
  "네가 나의 청혼을 받아들인다면 평생을 호의호식하고 살게 될 것이요, 만약 거절한다면 오늘로 죽게 될 것이다. 어찌하려느냐?"
  그러자 한씨 미녀는,
  "나는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소. 나는 그 분과 장래를 약속했고, 지금은 그 분이 멀리 가 있으나 언젠가 돌아오면 그 분과 혼례를 치룰 것이오"
  "정혼을 했다는 놈이 도대체 어느 놈이냐? 신분을 밝혀라"
  "밝힐 수 없오"
  "무어라 밝힐 수 없다고? 저 년이 토설할 때까지 매우 쳐라"
  "윽! 윽! 윽..................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에이 저런 발칙한...... 당장 죽여 버려라"

 

☆ 단심가를 정몽주가 지은 것이 아니라 원래 백제의 한씨 미녀가 지었고, 정몽주가 그를 인용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이때 사방에서 수십 명의 장사들이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한씨 미녀를 구해주었는데, 고구려 을밀장군 일행이었다.
  을밀은 안장왕의 명을 받고 광대차림으로 한씨 미녀를 구하기 위해 미리 잠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한씨 미녀에게 말했다.
  "지금 빨리 고봉산에 올라 봉화불을 올리시오"
  그리하여 한씨 미녀는 즉시 고봉산 꼭대기에 올라가 봉화불을 올렸다.
  국경에서 봉화불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던 안장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백제를 치고 한씨미녀를 데리고 돌아가 혼인하였고, 한씨 미녀를 왕비로 삼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7년(A.D.529)조에,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빼앗으므로 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기병 3만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2천여 명이 전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안장왕이 한씨 미녀를 구하기 위해 직접 출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안장왕과 한씨 미녀는 안장왕의 태자시절인 510년경 헤어진 후 약 19년 만에 재회했고, 재회한지 2년만인 531년 5월에 안장왕이 죽고 말았다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을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안장왕이 재위 13년 여름 5월에 죽었고, 왕비도 따라 죽어, 도읍인 평양성 부근에 묻히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 사이에는 아들이 없어 다음 왕위는 안장왕의 동생인 안원왕 보연이 오르게 된다.   

  
☆ 춘향전이 바로 이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사랑이야기를 조선시대에 이르러 새롭게 각색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