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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삼국사기 기록 속 "완산주(完山州)"의 비밀이 풀렸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09. 6. 23. 09:31

윤여동설 - 신라 진흥왕 때의 완산주와 신문왕 때의 완산주는 다른 곳이다 - 최초공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창녕현 조의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비사벌이라고도 한다]이다.

진흥왕 16년(A.D.555)에 하주를 설치했다가 21년(A.D.560)에 (주를) 폐했다.

경덕왕이 화왕군이라 고쳤다.

고려 태조가 지금의 이름(창녕현)으로 고쳤고, 현종이 밀성군에 속하게 했다.

(本新羅比自火郡[一云 比斯伐] 眞興王十六年置下州 二十一年罷 景德王改火王郡 高麗太祖改今名 顯宗屬密城郡)”라고 기록되어 있고,

 

전라도 전주부의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백제의 완산[비사벌이라고도 하고 비자화라고도 한다]이다.

신라 진흥왕 16년(A.D.555)에 완산주를 설치했다가 26년(A.D.565)에 주를 폐지하였다.[필자주 : 오기로 보이는 기록]

신문왕이 다시 완산주를 설치했다.

경덕왕 15년에 지금의 이름(전주부)으로 바꾸어 아홉주를 완비하였다.

효공왕 때 견훤이 이곳에 도읍하고 후백제라 하였다.

(本百濟完山[一云比斯伐 一云比自火] 新羅眞興王十六年置完山州 二十六年州廢 神文王復置完山州 景德王十五年改今名以備九州 孝恭王時甄萱建都於此稱後百濟)”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대로라면 창녕과 전주의 옛 이름이 비사벌 또는 비자화로 같았다는 말이 되고, 창녕은 본래 신라 땅이었다 하고, 완산(전주)은 본래 백제 땅이었다 하니 신라에도 비자화(또는 비사벌)란 지명이 있었고, 백제에도 비사벌(또는 비자화)이라는 지명이 동시에 존재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 이해할 수없는 것은 신라 진흥왕 16년에 완산주를 설치했다가 26년에 폐지했다는 기록인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6년(A.D.555) 조를 보면,

  “봄 정월에 완산주(完山州)를 비사벌에 설치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진흥왕 26년(A.D.565) 조에도,

  “9월 완산주(完山州)를 폐지하고, 대야주(大耶州 : 대가야주)를 설치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때는 삼국통일 이전이므로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 땅에 완산주를 설치할 수는 없는 일인데도 정사인 삼국사기에 신라의 진흥왕이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했다가 폐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9년(A.D.650) 조를 보면,

  “여름 6월에 반룡사에 있던 승려 보덕이 나라에서 도교를 숭상하면서 불교를 믿지 않는다 하여 남쪽에 있는 완산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 5년(A.D.685) 조를 보면,

  “봄에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으로 총관을 삼았다.

  거열주를 승격시켜 청주(菁州)를 설치하니 비로소 아홉주가 갖추어져서 대아찬 복세로 총관을 삼았다.

  3월 남원소경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는 삼국이 통일된 시점으로서 신라가 백제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신문왕은 완산주와 남원소경을 옛 백제 지역에 설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735년 성덕왕 34년에 당나라로부터 패강 이남 땅의 관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자 경덕왕 때 이르러 대대적으로 전국의 지명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경덕왕 16년(A.D.757) 조를 보면,

  “겨울 12월 사벌주를 상주(尙州)로 고쳐 주1, 군10, 현30을 관할하게 하고,

    삽량주를 양주(良州 또는 梁州)로 고쳐 주1, 소경1, 군12, 현34를 관할하게 하고,   

    청주를 강주(康州)로 고쳐 주1, 군11, 현27을 관할하게 하고,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고쳐 주1, 소경1, 군27, 현46을 관할하게 하고,

    수약주를 삭주(朔州)로 고쳐 주1, 소경1, 군11, 현27을 관할하게 하고,

    웅천주를 웅주(熊州)로 고쳐 주1, 소경1, 군13, 현29를 관할하게 하고,

    하서주를 명주(溟州)로 고쳐 주1, 군9, 현25를 관할하게 하고,    

    완산주를 전주(全州)로 고쳐 주1, 소경1, 군10, 현31을 관할하게 하고,

    무진주를 무주(武州)로 고쳐 주1, 군14, 현44를 관할하게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구체적인 위치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1을 보면,

  “처음에는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지역이 개의 이빨과 같이 엇갈리어 때로는 서로 화친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침략을 하기도 하였는데, 후일에 당나라와 함께 두 나라를 침공하여 없애버리고 그 영토를 평정한 다음 전 지역에 아홉 개 주를 설치하였다.

  본국(신라) 내에 3개주를 설치하였는데, 

  왕성(금성) 동북쪽의 당은포 부근을 상주(尙州)라 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 : 梁州)라 하고,

  서쪽을 강주(康州)라 하였다.

  이전 백제 지역에 3개 주를 설치하였는데,

  백제의 옛 성(사비성) 북쪽 웅진구를 웅주(熊州)라 하고,  

  다음 서남쪽을 전주(全州)라 하고,

  다음 남쪽을 무주(武州)라 하였다.

  이전 고구려 남쪽 지역에 3개 주를 설치하였는데,

  서쪽으로부터 첫 번째를 한주(漢州)라 하고,

  그 다음 동쪽을 삭주(朔州)라 하고,

  또 그 다음 동쪽을 명주(溟州)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각 주들의 대강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신라는 원래의 신라 땅을 나누어 3개주를 설치하였고, 옛 백제 땅에 3개주, 옛 고구려 땅에 3개주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삼국통일 후인 경덕왕 때의 신라 9주 위치]

 

                                  평양성

                            (고구려 옛 도읍)                 

                                                                                                   명주

                                                                                              (옛 하서주)

 

 

                                                                  삭주
                                                            (옛 수약주)             

 

                                              한주                                                      상주

                                         (옛 한산주)                                           (옛 사벌주)                                                                                                                                                                                                                                                                                                                                                                            서라벌

 

                                           웅주                                              양주 

                                      (옛 웅천주)                                   (옛 삽량주)

 

                                  사비성                                                

                          (백제의 옛 도읍)                             강주       

                                                                              (옛 청주)

 

                 전주                      무주                                   

            (옛 완산주)          (옛 무진주)                                            

 

 

 

   그런데 경덕왕이 완산주(完山州)에서 이름을 바꾼 전주(全州)의 위치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성의 북쪽에 설치한 웅주의 서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신라의 신문왕은 옛날 진흥왕이 비사벌에 설치했다가 폐지하였던 완산주라는 지명이 좋았던지 그 지명을 따서 다시 옛 백제 땅에 완산주를 설치함으로써 지명의 이동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경덕왕이 다시 그 완산주를 전주(全州)로 바꾸었으며, 원래 비사벌의 옛 완산주였던 비자화의 옛 하주지역은 화왕군이라 명명했고, 후일 고려 태조가 이 화왕군을 다시 창녕(昌寧)이라 명명하는 것이다.

 

  즉 진흥왕 때의 완산주는 옛 대가야 지역이었던 창녕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신문왕 이후의 완산주는 옛 백제 지역이었던 전주를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통일 이전의 기록에 나타나는 완산주(完山州)는 창녕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고,

  삼국통일 이후의 완산주나 전주(全州)는 창녕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별개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 진흥왕이 설치했던 비사벌 완산주와 신문왕이 백제 땅에 설치한 완산주는 지명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지역인데도 후대 누군가가 동일한 지역으로 착각하여 완산주(전주)의 연혁을 진흥왕이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한 때로부터 거슬러 기록해 놓아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이다.  

 

  이로써 역사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문의 기록으로 여겨졌던 삼국사기 기록 속 완산주 설치 기록의 비밀이 풀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