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가야산 해인사가 원래는 요녕성 호로도에 있었다 - 최초주장
[가야산 정상 부근에 나타나는 소머리 형상]
가야산 해인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40대 애장왕 3년(A.D.802) 조에 “8월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해인사가 창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200여년 전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한반도 경남 합천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가 바로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가야산 해인사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는 원래 한나라 때의 낙랑 부근에서 건국된 나라였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산 해인사에 관한 기록은 해석을 전혀 다르게 할 수 있게 된다.
즉 원래의 가야산과 해인사는 지금의 발해 북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가야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로 고운 최치원을 꼽을 수 있는데,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나 12세 때인 868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874년에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최치원의 나이 29세 때인 885년 신라 49대 헌강왕 11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런데 최치원이 돌아온 다음 해인 886년에 헌강왕이 죽고, 정강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에 또 정강왕이 죽고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신라는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자 최치원은 894년(진성여왕 8년)에 이르러 국정쇄신안인 시무십여조(時務一十餘條)를 써서 바치게 되고, 그를 읽어본 진성여왕이 최치원의 뜻을 좋게 여겨 받아들이고 치원을 임명하여 아찬으로 삼게 된다.
아마 이때 최치원에게 시무십여조에 따라 나라를 개혁하는 직책이 주어졌을 것이지만 최치원 한사람의 힘만으로는 이미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관리들은 부패했고, 호족들은 사치에 빠져 있었으며, 백성들은 왕실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최치원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신라를 보며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러다가 자신의 유일한 지지자였던 진성여왕도 죽자 최치원은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전을 보면,
최치원은 말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동복형으로서 스님이 된 현준과 스님 정현과 도를 닦는 벗이 되어 은거생활을 함께 하면서 여기에서 여생을 마쳤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최치원이 가야산에서 최후를 맞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치원은 왜 하필 가야산 해인사에 가서 은거생활을 했고, 최후를 그곳에서 맞았던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 2년(A.D.888) 조를 보면, “이해 2월에 위홍이 죽자 그를 혜성대왕에 추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1년(A.D.897) 조에는, “12월 왕이 북궁에서 죽었다. 시호를 진성이라 하고 황산에 장사지냈다”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 초기 사람인 조위의 매계집(梅溪集)에는 헌강왕 11년(A.D.885) 을사년까지 해인사는 수풀이 무성하다하여 “북궁해인수(北宮海印藪)”라고 불리워 오다가 진성여왕 4년 경술년(A.D.890)부터 혜성대왕(위홍) 원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진성여왕의 남편이었던 위홍이 서기 888년에 죽자 진성여왕은 가야산 해인사를 그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로 삼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890년 경술년(대순원년)이후에는 해인사를 혜성대왕 원당이라고도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북궁이란 해인사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진성여왕은 897년 6월에 조카인 효공왕에게 왕위를 선위한 후 위홍의 원당이었던 해인사에 와서 5-6개월을 지내다가 12월에 이르러 그곳에서 죽어 해인사 부근 황산에 묻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와 살다가 최후를 맞은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유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최치원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자신이 건의한 시무십여조에 따라 쓰러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워보려 했던 진성여왕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치원은 만년에 이르러 위홍의 원찰이며, 진성여왕이 머무르다 죽은 해인사가 있고, 진성여왕의 능이 있는 황산과 매우 가까운 가야산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치원이 최후를 맞이한 가야산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원래 신라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錦州)부근에서 건국된 후 동북쪽의 예(동예)와 서남쪽의 가야를 병합하였고, 또 서쪽 백제와 서북쪽 고구려 방향으로 강역을 넓혀 갔으며, 결국 서쪽 진황도, 당산 일원에 위치했던 백제와 서북쪽 승덕시 일원에 위치했던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강역이 매우 넓어졌다.
그런데 가야산은 원래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대쯤에 위치했던 산이었으므로 금관가야의 금관성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요녕성 흥성(興城)과 신라의 도읍 서라벌 금성(金城)으로 비정되는 금주(錦州) 사이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에 위치하고 있는 홍라산(대홍라산과 소홍라산으로 되어 있다)이 삼국사기 기록 속 가야산으로 추정되는 산이고, 진성여왕이 묻힌 황산은 그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합천군 산천 조를 보면, 가야산(伽倻山)을 일명 "우두산(牛頭山)"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전하는 말로는 가야산의 산 정상에 소머리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게도 불렀다고 하는데, 멀리서 보면 지금도 대홍라산 정상부분에 실제로 소머리형상이 나타난다.
이곳 대홍라산이 옛 가야산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로부터 서남쪽으로 100리쯤 떨어져 있고, 그곳에는 지금 천연사(天然寺)라는 절이 있는데, 아마 옛 해인사가 있던 터 부근에 새로 지은 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부근을 찾아보면 옛 가야산 해인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고운 선생의 자취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야산에는 예로부터 십승지지 중 하나인 만수동(萬壽洞)이 있다고 전해온다.
신라의 최치원은 한반도에서 살다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 부근에 위치한 대홍라산에서 살다 죽었던 것이고, 그곳이 곧 신라 땅이었고, 옛 가야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 떠도는 최치원의 전설이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가 짓고 쓴 사산비명들이 한반도에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요녕성 호로도 대홍라산에서 살다 죽었을 최치원이 쓴 사산비명이 왜 한반도에 있는 것일까?
조선 초기에 팔만대장경을 대륙에서 한반도로 옮겨 왔듯이 사산비도 호로도에서 한반도로 옮겨온 것일까?
아니면 조선시대에 누군가가 한반도에 새로이 만들어 세웠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