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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기자조선의 비밀을 풀었다

윤여동 2009. 7. 16. 17:41

윤여동설 -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비밀을 풀었다

 

 

 

 

  

  지금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자조선이 실제로 존재했느냐, 존재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화두 중의 하나로 부각되어 있는데, 요즈음에는 대체로 많은 연구자들이 기자조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자 실존하지 않은 허구의 왕조로 인식하고 있다.

  기자조선이 실존했을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왕검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어 47대 단군 고열가 때 멸망했다면 그 왕검조선의 존속기간을 1천여년쯤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위만조선이 건국된 시기가 기원전 194년이므로 그 사이 기간인 1천여년이 공백으로 남고, 준왕이 기자의 41대 후손이라는 구체적인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 사이 기간을 기자조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삼국유사와 단군세기, 단기고사 그리고 중국 사서들의 기록 중 한 대 이전의 기록을 내세워 왕검조선이 1천5백년 내지 2천여년 존속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기자가 조선으로 온 일이 없으므로 기자조선은 실제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시 기자의 먼 후예라고 기록된 부왕, 준왕 때 이르러 잠깐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고려나 조선시대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자조선이 실존했던 왕조라 여겼고, 어떤 면에서는 은나라의 세 현인 중의 한사람인 기자의 교화를 받은 선진화된 민족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기자의 사당을 지어 철따라 제사를 지내주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기자조선의 실존 여부를 밝혀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 선행왕조인 왕검조선의 존속기간을 세밀하게 검토해보면 기자조선의 실존여부에 대하여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왕검조선 1,000년설과 1,200년설 그리고 1,500년설과 2,000년설

 

    왕검조선은 그 왕조가 과연 몇 년간 존속했던 것일까?

    어느 기록은 왕검조선이 약 1천여년간 존속했다고 하고, 어느 기록은 1천2백여년 또는 1천5백년간 존속했다고 하며 또 어느 기록은 약 2천여년간 존속했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우리 역사 해석에 있어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왕검조선에 관한 기록들이 이렇듯 기록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이다.

   어느 기록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를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전혀 다르게 도출될 수 있는데, 역사의 진실은 오직 하나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기록이 역사적 진실을 기록한 것인지 가려내어야 이후의 우리 역사도 바르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왕검조선 1,000년설

 

   왕검조선 1천년설의 대표적인 기록은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제왕운기는 왕검조선이 요 무진년인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어 은 무정 8년 을미년인 기원전 1,286년에 멸망함으로써 1,048년간(원문에는 1,028년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존속했다고 노래하고 있고, 그 후 164년 만에 어진 사람 나타나서 군신제도를 마련했다고 함으로써 왕검조선이 멸망한 후 164년간 구심점이 없는 상태로 나라가 분열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주 무왕 원년 기묘년인 기원전 1,122년에 은나라 사람 기자가 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승휴는 기자가 조선에 왔고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중국 사서들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 믿고 왕검조선의 맥을 기자조선이 이은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그 논리에 따라 제왕운기를 지었다.

 

  왕검조선 1,200년설

 

  왕검조선 1천2백년설의 대표적인 기록은 북애자의 규원사화(揆園史話)이다.

  규원사화는 왕검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어 고열가 재위 30년인 기원전 1,129년에 통치력을 상실하고 아사달에 들어갔다고 함으로써 1,205년(원문에는 1,195년으로 나오나 역대 단군들의 재위년수를 합하면 1,205년이 된다)간 나라가 존속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건국시조인 단군환검으로부터 47세 단군고열가까지의 왕대가 나타나고, 왕검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남후가 다른 제후들보다 뛰어나 여러 제후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다스렸으나 결국 열국이 되고 말았다”라고 기록함으로서 이때 통치력을 상실한 고열가가 단군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아사달로 들어가버리자 그 공백을 남후가 대신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몇 년 후 은나라도 멸망하게 되고 주나라가 기원전 1,122년에 건국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은나라가 왕검조선의 보호아래 그 왕조를 유지하다가 왕검조선의 보호막이 걷히자 곧 멸망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규원사화는 왕검조선의 뒤를 기자조선이 이었다는 이승휴의 주장과는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필자는 이 규원사화의 왕검조선 1,200년설이 비교적 역사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기록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 규원사화에 의한 왕검조선의 왕대와 재위기간

  시조 환검(재위 93년 B.C.2333-B.C.2241)

   2대 부루(재위 34년 B.C.2240-B.C.2207)

   3대 가륵(재위 51년 B.C.2206-B.C.2156)

   4대 오사(재위 49년 B.C.2155-B.C.2107)

   5대 구을(재위 35년 B.C.2106-B.C.2072)

   6대 달문(재위 32년 B.C.2071-B.C.2040)

   7대 한율(재위 25년 B.C.2039-B.C.2015)

   8대 우서한(재위 57년 B.C.2014-B.C.1958)

   9대 아술(재위 28년 B.C.1957-B.C.1930)

  10대 노을(재위 23년 B.C.1929-B.C.1907)

  11대 도해(재위 36년 B.C.1906-B.C.1871)

  12대 아한(재위 27년 B.C.1870-B.C.1844)

  13대 흘달(재위 43년 B.C.1843-B.C.1801)

  14대 고불(재위 29년 B.C.1800-B.C.1772)

  15대 벌음(재위 33년 B.C.1771-B.C.1739)

  16대 위나(재위 18년 B.C.1738-B.C.1721)

  17대 여을(재위 63년 B.C.1720-B.C.1658)

  18대 동엄(재위 20년 B.C.1657-B.C.1638)

  19대 구모소(재위 25년 B.C.1637-B.C.1613)

  20대 고홀(재위 11년 B.C.1612-B.C.1602)

  21대 소태(재위 33년 B.C.1601-B.C.1569)

  22대 색불루(재위 17년 B.C.1568- B.C.1552)

  23대 아홀(재위 19년 B.C.1551-B.C.1533)

  24대 연나(재위 13년 B.C.1532-B.C.1520)

  25대 솔나(재위 16년 B.C.1519-B.C.1504)

  26대 추로(재위 9년 B.C.1503-B.C.1495)

  27대 두밀(재위 45년 B.C.1494-B.C.1450)

  28대 해모(재위 22년 B.C.1449-B.C.1428)

  29대 마휴(재위 9년 B.C.1427-B.C.1419)

  30대 나휴(재위 53년 B.C.1418-B.C.1366)

  31대 등올(재위 6년 B.C.1365-B.C.1360)

  32대 추밀(재위 8년 B.C.1359-B.C.1352)

  33대 감물(재위 9년 B.C.1351-B.C.1343)

  34대 오루문(재위 20년 B.C.1342-B.C.1323)

  35대 사벌(재위 11년 B.C.1322-B.C.1312)

  36대 매륵(재위 18년 B.C.1311-B.C.1294)

  37대 마물(재위 8년 B.C.1293-B.C.1286)

  38대 다물(재위 19년 B.C.1285-B.C.1267)

  39대 두홀(재위 28년 B.C.1266-B.C.1239)

  40대 달음(재위 14년 B.C.1238-B.C.1225)

  41대 음차(재위 19년 B.C.1224-B.C.1206)

  42대 을지우(재위 9년 B.C.1205-B.C.1197)

  43대 물리(재위 15년 B.C.1196-B.C.1182)

  44대 구홀(재위 7년 B.C.1181-B.C.1175)

  45대 여루(재위 5년 B.C.1174-B.C.1170)

  46대 보을(재위 11년 B.C.1169-B.C.1159)

  47대 고열가(재위 30년 B.C.1158-B.C.1129)   [역년 총 1,205년]     

 

 왕검조선 1,500년설

 

  왕검조선 1천5백년설의 대표적인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이 요 50년에 나라를 세워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주 무왕 원년인 기묘년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도읍을 당장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들어가 숨어살다가 산신이 되었는데, 단군의 나이가 1,908세였다고 약간 헷갈리게 기록하고 있다.

  일연은 왕검조선이 기원전 2,333년이 아닌 기원전 2,294 정사년에 건국되어 1,500년간 존속한 후 기자세력에 밀려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기게 되었고, 다시 아사달로 들어갔다고 기록함으로써 이때 왕검조선이 통치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나라가 멸망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런데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고 하는 주 무왕 원년인 기묘년이 기원전 1,122년이므로 왕검조선은 기원전 2,294년에 건국되어 기원전 1,122년경에 멸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따져보면 이때는 왕검조선이 건국된 지 1,173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렇다면 일연은 왜 왕검조선이 1,500년간 존속했다고 기록했던 것이며, 단군이1,908세까지 살았다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혹시 왕검조선이 1,122년경 통치력을 상실한 후에도 명목상이나마 왕검조선의 왕실만은 유지하고 있었고, 단군의 직계후예들은 아사달에서 조상의 제사를 지내면서 수백년간 은둔생활을 하다가 결국 절손되어 그 맥이 끊어져 버렸던 것일까?   

  

 왕검조선 2,000년설

 

  왕검조선 2천년설의 대표적인 기록은 고려 때 이암이 썼다는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발해 초기 대야발이 지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이다.

  단군세기는 단군왕검이 기원전 2,370년에 태어나 무진년 제요도당(요임금) 때인 기원전 2,333년에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아사달에서 단군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고, 47세 단군 고열가 때인 기원전 238년에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함으로써 왕검조선이 2,096년간 존속했고, 북부여가 왕검조선의 맥을 이었고, 북부여의 맥을 고구려가 이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기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는 고려 사람인 이암이 고려가 고구려, 북부여, 왕검조선의 맥을 이은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 단군세기를 썼다고 볼 수 있다.

 

 ★ 고구려의 경우 705년 동안 28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평균재위기간이 약 25년씩이고, 백제의 경우는 678년 동안 31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평균재위기간이 약 22년씩이며, 신라의 경우에는 992년 동안 56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평균재위기간이 약 18년씩에 지나지 않는다.

  고려의 경우도 475년 동안 34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평균재위기간이 약 14년씩이었으며, 조선의 경우 518년 동안 27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평균재위기간이 약 19년씩이었다.

  그런데 왕검조선은 평균재위기간이 약 45년에 이른다.

  다른 시대 왕들의 평균재위기간보다 두 배도 넘는다.

  어떻게 다른 시대 왕들에 비하여 왕검조선의 단군들은 그렇게 오래 재위할 수 있었는지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다.

 

  단기고사는 왕검조선을 전단군조선과 후단군조선으로 나누고 있고 기자조선(奇子朝鮮)이 기록되어 있는데, 전단군조선은 단군왕검으로부터 25세 솔나 39년인 기원전 1,112년까지 역년이 1,222년이라 하고, 이때 기자가 평양왕검성에서 왕위에 오르자 전단군조선의 솔나가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그 이후를 후단군조선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때 단군조선이 후단군조선과 기자조선으로 쪼개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단군조선은 1세 솔나로부터 23세 고열가 58년인 기원전 238년까지 역년이 875년이라 기록하고 있고, 후단군조선의 뒤를 북부여가 이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전〮후단군조선의 기간을 합하면 2,096년이 되어 이암의 단군세기와 동일하고, 왕대의 명칭 일부만 약간 다를 뿐 47명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기자조선(奇子朝鮮)은 기원전 1,112년에 전단군조선의 19세 단제 종년의 아우인 청아왕 종선의 증손자가 평양왕검성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로 기록하고 있다. 

  기자(箕子)가 아닌 기자(奇子)로 표기하고 있으며, 기자는 태양의 아들이며 황손이라는 의미라고 설명되어 있다. 

  은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으로 가자 주 무왕이 조선에 봉했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기자(箕子)가 아니라 단군조선의 후예인 기자(奇子)가 세운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 것일까?

 

★ 단군세기에 의한 왕검조선 단군들의 왕대와 재위기간

  시조 왕검(재위 93년)                  26대 추로(재위 65년)

   2대 부루(재위 58년)                  27대 두밀(재위 26년)

   3대 가륵(재위 45년)                  28대 해모(재위 28년)

   4대 오사구(재위 38년)                29대 마휴(재위 34년)

   5대 구을(재위 16년)                  30대 나휴(재위 35년)

   6대 달문(재위 36년)                  31대 등올(재위 25년)

   7대 한율(재위 54년)                  32대 추밀(재위 30년)

   8대 우서한(혹은 오사함)(재위 8년)    33대 감물(재위 24년)

   9대 아술(재위 35년)                  34대 오루문(재위 23년)

  10대 노을(재위 59년)                  35대 사벌(재위 68년)  

  11대 도해(재위 57년)                  36대 매륵(재위 58년)

  12대 아한(재위 52년)                  37대 마물(재위 56년)

  13대 흘달(혹은 대음달)(재위 61년)     38대 다물(재위 45년)

  14대 고불(재위 60년)                  39대 두홀(재위 36년)

  15대 대음(혹은 후흘달)(재위 51년)     40대 달음(재위 18년)

  16대 위나(재위 58년)                  41대 음차(재위 20년)

  17대 여을(재위 68년)                  42대 을우지(재위 10년)

  18대 동엄(재위 49년)                  43대 물리(재위 36년)

  19대 구모소(재위 55년)                44대 구물(재위 29년)  

  20대 고홀(재위 43년)                  45대 여루(재위 55년)

  21대 소태(재위 52년)                  46대 보을(재위 46년)

  22대 색불루(재위 48년)                47대 고열가(재위 58년)

  23대 아홀(재위 76년)

  24대 연나(재위 11년)

  25대 솔나(재위 88년)                 [역년 총 2,096년]

  

 기자조선설

 

  은(殷)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에게는 숙부인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그리고 주왕의 이복 형제인 미자(微子)가 있었다.

  주왕이 폭정을 하자 어느 날 미자가 숙부인 비간과 기자를 찾아와 나라의 장래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의논을 하자 비간과 기자는 우선 다른 곳으로 가서 당분간 피신해 있도록 권고하게 된다. 

  그런 뒤 비간은 주왕 앞에 나아가 간언을 하다가 죽게 되는데, 주왕은 비간의 간언을 듣더니 “내가 들으니 성인은 심장에 구멍이 일곱 개라고 하던데 과연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아야겠다”하고는 비간을 죽여서 그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이 말을 전해들은 기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고 종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주왕이 기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어버린다.

  그런데 이렇듯 포학했던 은 주왕도 주 무왕(武王)에게 잡혀 불에 타 죽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옥에 갇혔던 기자는 주 무왕에 의해 풀려나게 된다.           

  기원전 1,122년 기묘년에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하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자 기자는 주 무왕을 받들 수 없다 하고는 그 땅을 떠나 조선(고조선)으로 가 버리자 주 무왕은 기자를 그대로 조선에 봉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한서 예전을 보면,

  “옛날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팔조지교(필자주 : 팔조금법 또는 범금팔조라고도 하며, 백성들이 범해서는 안 되는 여덟가지 일을 말한다)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게 되어 문을 닫지 않게 되었고, 부인들은 정조를 지키게 되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를 사용한다. 그 후 40여대를 지나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느닷없이 기자가 등장하고 중간의 40여대를 뚝 띄었다가 조선후 준을 등장시킴으로써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손들로 대대손손 왕위가 이어져 준왕에 이르렀다고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다.

 

 ★ 중국 사서들에는 기자가 고죽국으로 갔다고도 기록하고 있는데, 원래 고죽국은 기자와 동시대 사람인 백이와 숙제가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둘이 함께 그곳을 떠나자 그 왕위를 어쩔 수 없이 셋째가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고,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을 떠나 주나라로 갔는데 마침 주 무왕이 은나라를 치려고 하자 말고삐를 잡고 은나라를 치면 안된다고 간하다가 무왕이 기어이 은나라를 쳐 멸망시키자 실망하고 그곳을 떠나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고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이숙제의 동생이 왕위에 올라있었을 고죽국에 어떻게 기자가 가서 또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 중국 사람들은 고죽국의 위치를 진황도 노룡 부근이라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고, 원래 고죽국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 방산 유리하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다. 고죽국은 중국과 고조선의 접경지역에 위치했던 나라였고, 기자가 고죽국으로 갔다면 그는 지금의 영정하 부근으로 갔다는 말이다. 

 

  또 삼국지 한전을 보면 위략의 기록을 인용하여 기자의 먼 후예라는 부왕과 준왕의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기록을 보면,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를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공하여 주 왕실을 보존해 주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 조선후가 실제 옛 은나라 기자의 먼 후예였다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주나라가 쇠약해져 멸망하든 말든 내버려 두고 오히려 빨리 망하라고 고사라도 지내야할 판에 조선후는 속도 없이 왜 원수의 나라인 주왕실을 보존해주기 위하여 연나라와 전쟁까지 하려고 했을까?

  이는 조선후가 기자의 후예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보내 (조선의 ) 서쪽지방을 침공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을 때 조선은 부(否)가 왕위에 있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상 진나라에 복속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올랐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조선)후 준이 왕을 참칭하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그의 좌우 근신과 궁인들을 이끌고 도망하여 바다를 건너 한(韓)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기자의 먼 후손인 부왕과 준왕이 조선의 왕위에 올랐다가 준왕 때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의 한으로 와서 다시 한왕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준왕이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긴 때는 기원전 194년이었고, 위만조선은 위만왕과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그 아들 대를 지나 손자 우거왕 때인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전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그 땅에 한사군이 설치되는데, 왕검성이라는 곳은 원래 단군왕검이 도읍한 이래 계속 고조선의 도읍이었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중심지나 다름없다.

   그런데 기자의 먼 후예라는 준왕이 왕검성에서 왕위에 올라 있었다는 것은 그곳이 바로 기자조선의 중심지였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기록대로라면 기자조선은 실존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조선의 준왕이 정말로 기자의 41대 후손이고, 기자조선이 기원전 1,122년에 건국되었다면 기자조선은 기원전 1,122년부터 기원전 194년까지 무려 929년간 존속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역사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왕검조선 47명의 왕대는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122년까지의 역사로 볼 수 있고,

  기자조선 41명의 왕대는 기원전 1,122년부터 기자의 먼 후예라는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원전 194년까지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은 47명의 단군들이 1,212년 동안 나라를 통치했었다는 말이 되어 1인당 평균재위기간이 약 26년씩이 되고, 기자조선은 41명(필자주 : 준왕이 기자의 41대손이라고 하여 꼭 기자조선에 41명의 왕들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편의상 41명의 왕들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의 왕들이 929년 동안 대를 이어 나라를 통치했었다는 말이 되어 1인당 평균재위기간이 약 23년이 되어 다른 왕조의 평균재위기간과 비교하여도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역사를 왕검조선부터 기자조선이 실존했다고 보고 도표로 간단하게 그려보면 아래와 같이 그려볼 수 있다. 

 

                                   →부여→고구려→발해→요금원청

                               ‖

왕검조선→기자조선  ‖ →위만조선→한사군     

                               ‖

                                   →한(삼한)→ 신라백제가야→고려→조선 

 

  윤여동의 치우조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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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실존을 부정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주 무왕이 은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으로 갔다는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사기에 梁國蒙縣有箕子塚(양국 몽현에 기자총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수경주의 기성(箕城)조에도 “城內有成湯塚其西有箕子塚(성안에 성탕총이 있고, 그 서쪽에는 기자총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양국 몽현이나 기성이란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를 말하는 것인데, 은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으로 갔고, 주 무왕이 조선의 왕으로 봉했었다는 기자의 무덤이  은나라를 건국한 탕왕의 능 서쪽에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자가 애초에 조선으로 오지 않았거나 한때 조선으로 왔었다고 하더라도 그 후 다시 돌아가 지금의 하남성 상구에서 살다가 죽어 그곳에 묻혔다는 말이 되므로 역사적으로 기자조선이 실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규원사화의 기록에 따르면 왕검조선의 존속기간은 1,205년이고, 47명의  단군들의 평균재위기간은 약 26년이 되어 다른 왕조들의 평균재위기간과 거의 유사해 진다. 따라서 왕검조선이 1,200여년간 존속했고, 왕대가 누락된 것이 아니며, 기자가 고조선의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다면, 발상을 전환하여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우리 역사를 해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주 무왕이 멸망한 은나라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은나라 왕가 사람인 기자에게 명예직 정도인 조선후의 작위를 주었다고 보면 기자로부터 그 후예들은 실제 고조선의 왕위에 올랐던 것이 아닐 것이고,

  또 규원사화에서 왕검조선 마지막 단군으로 기록되고 있는 고열가 조의, 고열가가 왕검조선이 건국된 지 1,200여년이 지난 기원전 1,129년에 통치력을 잃고 아사달로 들어가자 “남후가 다른 제후들보다 뛰어나서 여러 제후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렸다”는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왕검조선이 멸망한 후 남후가 단군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했을 것으로 볼 수 있고, 남후의 후예들로 왕위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부왕이나 준왕이 기자의 먼 후예가 아니라 사실은 남후의 먼 후예였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남후란 왕검조선의 제후국이었던 남국의 통치자를 말하는 것인데, 남국은 왕검조선의 서남쪽에 위치했었다고 하고, 치우천왕의 후예들에게 주어진 땅이었다고 하며 중국의 침략을 방어하는 방패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후일의 요동, 마한지역이다.

 

★ 규원사화 단군왕검 조에는 “이때 단군의 교화가 사방에 두루 미치게 되어 북쪽으로는 대황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알유를 거느리고, 남쪽으로는 해대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창해에 닿았다.

  임금의 위엄과 가르침은 더욱 높고 커져 천하의 땅을 나누어 공적에 따라 땅을 나누어 주었다. 

  치우씨의 후손들에게는 남서쪽의 땅을 주었는데, 들이 넓고 바다와 하늘이 푸르러 남국(藍國)이라 하고 치소를 엄려홀로 정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을 주었는데, 산하가 웅장하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 오진국 또는 숙신이라 하니 치소를 숙신홀에 정하고,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동남쪽의 땅을 봉하니 산하가 아름답고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이라 하고 치소를 낙랑홀로 정하고,  

  주인씨의 후손에게는 개마국을 주고, 여수기는 예의 임금을 삼았다. 

  부소, 부우와 막내 부여에게는 모두 서쪽 땅을 주었는데, 이들이 고구려, 진번, 부여 등의 여러 나라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치우의 후손들이 살던 남국이 왕검성의 서남쪽에 위치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자에 관한 기록이 들어 있는 후한서 예전의 기록을 보면, “옛날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팔조지교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게 되어 문을 닫지 않게 되었고, 부인들은 정조를 지키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원삭 원년(B.C.128)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으로 내속하였으므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원봉 3년(B.C.108)에 이르러 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으로 나누었다”라는 기록이 이어진다.

  이를 보면 한 무제 때 발생한 창해군 사건과 위만조선 침공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예국이 원래 기자의 영향을 받은 곳이고, 고조선의 준왕이 기자의 먼 후예라고 함으로써 한 무제가 예의 땅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과 위만조선을 쳐 멸망시키고 그 땅을 빼앗아 한사군을 설치한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를 펴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옛 은나라의 현인이었던 기자가 세우고 그 후예들이 세습하여 왕위에 오르던 나라인 기자조선을 건방지게도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빼앗아 왕위에 올랐고, 지금 그 손자인 우거가 왕위에 올라 백성들을 핍박하고 있어 한 무제가 정의의 칼을 빼들어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그 땅을 다시 되찾았고, 사군을 설치한 것뿐이라는 침공의 당위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그때 전설 속의 인물인 기자와 이미 죽어버린 조선의 준왕이 기자의 41대손이라고 사서의 기록을 조작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기록을 보면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고 도망쳐 한의 월지국으로 와서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하여 한이라 하고 다시 한왕에 올랐던 준왕에게 후사가 없어 그의 후손은 절손되어 버렸으나 세월이 흘렀는데도 준왕의 제사를 지내주는 사람이 가끔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준왕이 기자의 먼 후예가 아니라 사실은 치우천왕의 아주 먼 후손이라고 발 벗고 밝혀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한 무제는 마음 놓고 역사를 왜곡할 수 있었고, 그것이 역사적 사실처럼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누가 처음 그러한 아이디어를 냈는지 알 수 없지만 비상하다 하겠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 할 때 호태왕 비문 속 영락 6년 병신년 조 신묘년 기사 속의 게으를 “권(倦)”자를 교묘하게 “왜(倭)”자로 변조하여 백제와 신라가 옛날 왜국의 식민지였었다고 선전함으로써 한반도 침략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또 임나일본부설을 퍼뜨려 한반도 침략을 합리화 하려던 것과 어쩌면 그리도 똑 같은지.................... 

  또한 선진(先秦)시대의 문헌인 죽서기년(竹書紀年)이나 상서, 논어 등에 처음으로 기자에 관한 기사가 나타나지만 기자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폭정을 간하다가 감옥에 갇혔으며 주 무왕(武王)에 의해 풀려났다는 점과 기자의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다는 점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동쪽 조선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는 구절은 전혀 보이지 않고,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내용은 한대(漢代) 이후의 자료인 복생의 상서대전(尙書大典)에 주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난 기자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 무왕을 섬기지 못하겠다 하고 동쪽의 조선 땅으로 망명했으며 이를 전해들은 무왕이 기자를 그대로 조선에 봉했다는 기사가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한 무제 때에 기자에 대한 기록이 조작되어 전해졌고, 후대 사람들은 그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194년에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이 위만에게 속아 왕검성을 졸지에 빼앗기고 근신들과 좌우궁인들을 이끌고 급히 도망쳐 간 곳은 바로 옛 남국이었던 한의 월지국(목지국이라고도 한다)이었고, 그곳을 새로이 도읍으로 정하고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하여 국호를 한(韓)이라 하고, 다시 한왕에 오르는데, 그 위급한 상황에 준왕은 한의 월지국으로 갔다.  

  아마 한의 월지국이 준왕의 선조들이 대를 이어 살던 고향이었을 것이므로 그곳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만약 준왕이 정말로 기자의 먼 후예였고,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처음 왕위에 오른 곳이 고죽국이었다면 위급상황이 되었을 때 준왕은 당연히 고향인 고죽국으로 향했어야 옳다. 그곳은 자신의 고향이므로 다른 곳에 비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줄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준왕은 원래 기자의 먼 후예가 아니라 치우천왕의 먼 후예로서 왕검조선이 멸망하자 단군을 대신하여 정치를 했던 남후의 41대손이었을 것이다.

 

★ 남국은 후일 한(韓)으로 국호를 바꾸어  이때부터 치우의 후예들은 성씨를 한씨(韓氏)라 했던 듯하다. 이는 준왕의 성씨가 한씨이기 때문이다. 만약 준왕이 은나라의 현인이었던 기자의 후손이었다면 성씨를 한씨라 하지 않고 기씨(箕氏)라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씨들은 옛 기자의 후손들이 아니라 치우천왕의 후손들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기자조선이라고 생각했던 시대는 “치우조선”이라 불러야 마땅하고, 은나라 사람이 와서 고조선의 왕위에 올라 천년간이나 다스렸다는 조작된 엉터리 기록 때문에 마음 상할 일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고조선이 왕검조선→치우조선→위만조선,부여,한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어 아래와 같이 그려볼 수 있다.  

 

                                   →부여→고구려→발해→요금원청

                               ‖

왕검조선→치우조선  ‖ →위만조선→한사군     

                               ‖

                                  →한(삼한)→ 신라백제가야→고려→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