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려 천추태후의 일생
천추태후(헌애왕후) 황보씨는 아버지 대종 왕욱(王旭. 성종의 아버지)과 어머니 선의왕후 사이에서 서기 96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대종 왕욱(王旭)은 고려 태조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머니 선의왕후는 고려태조 왕건과 정덕왕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대종 왕욱과 선의왕후는 왕건의 아들과 딸로서 이복 남매 사이였으나 이들이 혼인을 하여 성종과 천추태후(헌애왕후), 헌정왕후 등을 낳았던 것이다. 그런데 딸들은 아버지의 왕씨 성을 따르지 않고, 할머니인 신정왕후 황보씨의 성을 따라 성씨를 황보씨라 하였다.
☆ 고려시대까지도 신라시대의 근친혼 풍습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농경민족의 풍습이 아니라 유목민족의 풍습이다. 신라의 선조가 유목민족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아버지의 성씨를 따르지 않고 할머니의 성씨를 따른다는 것은 특이한 경우라 하겠다.
신정왕후 황보씨 = 태조 왕건 = 정덕왕후 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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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 왕욱 = 대종비 선의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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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 황보씨
천추태후 황보씨는 자라서 사촌 오빠인 5대 경종의 제3비가 됨으로써 헌애왕후 가 되고 또 그녀의 동생도 경종의 제4비가 됨으로써 헌정왕후가 된다.
☆ 경종은 광종과 대목왕후 사이에서 출생했는데, 광종은 태조 왕건과 신명순성왕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대목왕후는 태조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광종과 대목왕후 역시 이복남매 사이에 혼인한 것이고, 대목왕후는 천추태후의 아버지인 대종 왕욱의 여동생이다.
그런데 경종과 헌애왕후 사이에서 낳은 아들 왕송(7대 목종)이 두 살 때 경종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아들이 너무 어려 왕위에 오를 수 없자 헌애왕후의 친오빠인 개령군 치(6대 성종)를 불러 선위하고 981년 7월에 이르러 죽고 만다.
그리하여 당시 16세밖에 되지 않은 헌애왕후는 졸지에 아들 하나 딸린 과부가 되어 천추궁에서 살게 된다.
그런데 너무나 젊었던 경종비 헌애왕후(천추태후)는 욕정을 억누를 수 없었고, 결국 외척인 김치양을 만나 통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문이 나자 오빠인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내 둘 사이를 떼어놓아 버렸고, 또 친정에 나가 살고 있던 경종 비 헌정왕후 역시 안종 왕욱(王郁)과 통정을 하여 임신을 하게되어 성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자 성종은 또 왕욱을 귀양보내게 되고, 992년 7월에 이르러 헌정왕후는 아들 왕순(8대 현종)을 낳고는 바로 죽는데, 이때 태어난 왕순이 후일 우여곡절 끝에 고려 8대 임금이 되는 현종이다.
그리하여 성종은 조카인 왕순을 보모의 손에 맡겨 기르게 했는데, 아이가 자꾸 아버지를 찾자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아버지 안종 왕욱에게 보내 주게 되었는데 몇 년 뒤인 997년에 왕욱이 귀양지에서 죽게된다.
그런데 죽기 전 왕욱은 아들 왕순에게 은밀히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술사에게 주고 나의 시신을 이 고을의 성황당 귀룡동에 장사지내되 반드시 엎어서 묻어다오" 하고는 죽어 유언에 따라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왕욱은 귀룡동이 제왕이 나올 천하명당 임을 미리 알고 그곳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고 하고, 풍수가들의 말을 빌리면 시신을 엎어서 묻으면 발복이 빨리 나타난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믿기 어렵다.
한편 성종은 서기 960년 12월에 태어나 22세의 나이에 어린 조카 개령군 왕송 대신 고려의 6대 왕위에 올라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정치를 새롭게 하였고(지금 전해지는 것은 22조 뿐이다), 경주를 동경으로 고치고, 서경에 수서원을 설치하여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역사서적을 베껴 쓰게 하여 그곳에 간직하게 하였고, 거란 소손녕의 침공을 서희로 하여금 담판하게 하여 강동 6주를 지켰으나 결국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거란과 통호하게 된다.
그리고 개주를 개성부로 고치고, 도를 관내도(29주 82현), 중원도(13주 42현), 하남도(11주 34현), 강남도(9주 43현), 영남도(12주 48현), 영동도(9주 35현), 산남도(10주 37현), 해양도(14주 62현), 삭방도(7주 62현), 패서도(14주 4현 7진)로 나누고는 재위 16년인 997년 10월에 이르러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아들인 개령군 왕송을 불러 왕위를 전하고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 성종 때 고려는 개성부와 10도, 128주, 449현이었는데, 도는 지금의 도, 주는 지금의 시군, 현은 읍면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하여 개령군 왕송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바로 천추태후의 아들 고려 7대 목종이다.
목종은 서기 980년 5월에 태어나 왕위에 오를 때 18세였으므로 어머니인 태후의 섭정을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나 그 어머니인 경종비 헌애왕후가 태후가 되어 섭정을 하자 정사에 뜻을 두지 않았다.
태후는 천추궁에 머무르며 자신을 태후(太后)라 부르도록 하여 사람들은 그 후 그녀를 천추궁에 사는 태후라는 의미로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태후는 황제의 어머니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그녀는 아들을 왕이 아닌 황제로 만든 것이고, 자신은 태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추태후는 섭정을 하게되자 가장 먼저 귀양가 있던 정부인 김치양을 다시 궁중으로 불러 들여 우복야겸 삼사사에 임명하고 많은 권력을 주게 되어 모든 권력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에게로 넘어가게 되자 목종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동성애를 즐기게 되고, 천추태후는 김치양의 자식을 낳게 된다.
물론 목종 치세에 서경을 호경(鎬京)으로 고치고, 동여진이 침범해 오자 그를 쫓아버리며, 6위군영을 설치하기도 하고, 덕주성을 쌓고, 가주성, 위화성, 광화성을 수리하기도 하고, 과거법을 고쳐 인재를 선발하기도 하고 6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에게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업적이지 목종 자신의 업적이라 할 수 없다.
이를 보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비록 윤리적으로 보면 문란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고려를 강국으로 만들어보려고 애썼던 것도 사실인 듯하다.
그렇지만 중원부 장연현의 논 3결이 꺼져 깊은 연못이 되기도 하고, 탐라산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5일 동안이나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 또 왕궁의 천성전에 벼락이 떨어지기도 했으며, 기름창고에 불이나 천추전으로 옮겨 붙어 불타는 천재지변이 잇따르고 목종도 병석에 눕게 되자 병약한 목종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목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릴 음모를 꾸미게 되고, 자신의 친여동생이었던 헌정왕후 황보씨가 낳은 태조왕건의 손자 대량원군 왕순이 걸림돌이 되자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게 된다.
앞서 헌정왕후 황보씨는 경종이 죽고 나서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궁을 떠나 왕륜사 남쪽에 위치한 친정 집에 머물렀는데, 친정집 근처에 안종 왕욱의 집도 있었다.
안종 왕욱은 태조의 제5비였던 신성왕후 김씨의 소생이었는데, 신성왕후는 바로 신라 경순왕의 백부였던 김억렴의 딸로서 왕건이 신라를 통합하고 혼인함으로써 태조 왕건의 제 5비가 된 여인이다.
따라서 헌정왕후와 안종 왕욱은 삼촌과 조카 사이였고, 헌정왕후는 경종과 혼인했던 왕후였음에도, 불륜을 저질러 992년에 대량원군 왕순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목종이 왕위에 오른 997년에 왕순은 겨우 6세였고, 1003년에 대량원군으로 봉해졌다. 목종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이대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을 경우 왕위는 당연히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 왕순이 이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으로서는 대량원군 왕순을 어떻게 하든 제거해야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추태후는 대량원군 왕순의 머리를 깎아 개성의 숭교사로 출가시켜 중으로 만들었는데, 숭교사 중의 꿈에 큰 별이 절 뜰에 떨어져 용으로 변했다가 또 사람으로 변하니 곧 왕순이었다고 하고, 또 천추태후는 다시 왕순을 양주의 삼각산 신혈사로 보냈는데, 꿈에 닭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듣고 술사에게 물으니 "닭의 울음소리는 고귀위와 비슷하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이니 왕위에 오를 징조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신혈사의 중은 왕순이 왕위에 오를 고귀한 인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천추태후가 자객을 보내 자꾸 왕순을 죽이려고 시도하자 신혈사의 노승이 방바닥에 굴을 파서 왕순을 숨겨 생명을 보전하게 되는데, 목종이 병으로 자리에 눕게되자 천추태후는 더욱 왕순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왕순은 수차에 걸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목종에게 알리기 위하여 글을 보냈으나 그 글이 왕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하다가 간신히 그 글이 목종에게 전달하게 되어 왕도 사태가 위급함을 알게 된다.
그 글에는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 둘러싸고 핍박하면서 술과 밥을 주었는데, 신은 독약이 들었는가 의심하여 먹지 않고 까마귀를 주었더니 까마귀가 죽었습니다. 음모의 위급함이 이와 같으니 성상께서는 신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십시요"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왕은 충주부사 채충순을 은밀히 불러 "짐의 병이 점차 위독해지니 머지 않아 죽게 될 것인데, 태조의 손자는 오직 대량원군 뿐이다. 경과 최항은 평소 충의를 다하고 있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대량원군을 보좌하여 사직이 다른 성씨에게 옮겨가지 않도록 하라" 하고는 신혈사에 있는 왕순을 궁궐로 데려오도록 조치하고, 서북면 순검사 강조에게 서울로 들어와 호위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도중에 일이 잘못되어 강조가 정변을 일으킨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강조는 내친 김에 그대로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접수하고 목종을 폐해 양국공으로 삼고, 대량원군 왕순을 모셔와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이가 8대 현종이다.
그리고는 군사를 보내 왕위를 찬탈하려한 김치양 부자를 죽여버리게 되고 태후의 측근들은 귀양보내 버린다.
그러자 모든 것을 포기한 목종은 초야에 묻혀 조용히 여생을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며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향하여 가다가 적성현에 이르러 시해 당하게 되고, 천추태후는 황주로 돌아가서 21년을 더 살다가 1029년에 66세의 나이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