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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연운 16주는 우리 고조선의 옛 땅이었다 -최초주장

윤여동 2009. 8. 12. 15:02

윤여동설 - 연운16주는 우리 고조선의 옛 땅이었다 - 최초주장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빼앗아 설치했다는 연5군 지역이 천년 후쯤 후진이 거란에게 할양했던 연운16주와 거의 동일한 지역이라는 것이 드디어 필자에 의해 밝혀졌다.

  이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어디까지였느냐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연운 16주는 후당의 금군장관으로서 하동절도사와 북경유수를 겸하고 있던 석경당이 936년에 거란의 지원을 받아 후진(後晉)을 세운 대가로 거란에 할양한 땅인데, 할양 이후 그 땅을 놓고 동이족과 한족이 세운 나라들 사이에 오랜 세월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곳이다.

 

 ★ 산서성 중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이 장성의 흔적을 진시황 때 모두 새로 쌓은 진장성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필자가 보기에는 진시황 이전인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장성이 쌓아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기 흉노전을 보면, 조 무령왕(B.C.325-299) 때 임호누번을 격파하고 대(代)에서부터 음산과 나란히 고궐(高闕)에 이르기 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했고, 연나라는 진개가 고조선 서쪽 땅 1천여리를 빼앗아 조양(造陽)에서부터 요동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했다.        

 

  그런데 후진의 석경당은 연운 16주가 원래 중국 땅이 아니라 옛날 왕검조선(고조선) 땅이었고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진개가 왕검조선(고조선)을 침공하여 빼앗아 연5군을 설치했던 곳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석경당은 거란에게 자신을 도와 후진을 건국하게 해주면 그 연운 16주를 떼어 주겠노라고 제안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경당의 입장에서는 원래 중국 땅이 아니라 옛 왕검조선(고조선) 땅이었던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떼어 준다고 해도 원래의 중국 땅을 떼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거란의 지원을 받기 위해 그 땅을 미끼로 활용한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왕검조선(고조선)의 후예인 거란의 입장에서는 그 땅이 아주 먼 옛날 춘추전국시대에 왕검조선(고조선)이 연나라의 진개에게 빼앗겼던 지역이었는데, 무려 1천년도 더 지난 때에 이르러 그 옛 고조선 땅을 수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진 석경당의 제의에 쾌재를 부르며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후진의 석경당이 요충지 중의 요충인 그 옛 왕검조선(고조선) 땅이었으며, 춘추전국시대 연5군 지역을 거란에게 떼어 줌으로써 거란은 그 땅을 기반으로 하여 대제국 요(遼)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얼마 후 후진도 결국 이 요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되었으며, 두고두고 중국 세력들에게 화근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왕검조선(고조선)의 후예들이 강성해져 중국을 유린하게 된다.  

  부여의 후예로 보이는 요나라가 중국 땅의 절반을 차지했었고,

  말갈의 후예인 금나라 역시 그랬으며,

  고구려의 후예인 원나라는 중국 전부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이 바로 이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할양한 것이니, 석경당이 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에, 땅을 함부로 떼어준 대가를 톡톡히 치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석경당은 후진을 세우겠다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아주 바보 같은 짓을 했던 것이고, 거란으로서는 바로 이 연운 16주가 거란이 대제국 요나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으니 거란은 결국 꿩도 먹고 알도 먹었던 것이다. 

  제정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아무 쓸모없는 불모지로 잘못 판단하여 그 땅을 헐값에 미국에게 팔고 지금 후회막급인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어떻게 나라 땅을 돈을 받고 팔 생각을 했는지.............참 웃기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후진의 석경당이 거란에게 할양했다고 하는 연운 16주는,

 유주(幽州), 탁주(涿州), 단주(檀州), 계주(薊州), 순주(順州), 영주(營州), 평주(平州), 울주(蔚州), 삭주(朔州), 운주(雲州), 응주(應州), 신주(新州), 규주(嬀州), 유주(儒州), 무주(武州), 환주(寰州: 역주라고 하기도 한다)를 말하는 것인데,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었고, 하물며 요 5경인 상경임황부, 중경대정부, 동경요양부, 남경석진부(연경), 서경대동부의 위치마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 중국에서는 지금 내몽골 적봉시 영성(寧城)을 요나라 때의 중경대정부라 하고, 파림좌기를 상경임황부라 하며, 요녕성 요양을 동경요양부라 하는데 그것은 심히 잘못된 비정이다.

 

  이는 고의적으로 기록하지 않았거나 요나라에 대한 사서의 기록들을 많이 없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을 것인데, 혹시 중국 사람들이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할양했던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여, 그 연운 16주에 대하여 기록하거나 언급하는 것을 매우 꺼려 그 흔적 자체를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버리려 노력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지금 치욕의 역사로 생각하는 위만조선이나 한사군, 그리고 일제의 침략을 기억에서 싹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억지로 지우려 한다고 하여 지워지는 것이 아니고, 숨기려 한다고 하여 숨겨지는 것도 아니니 지나간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아 다시는 그러한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요사를 보면,

  남경석진부(南京析津府, 필자주 : 연경이다)에 속한 주로

  순주(順州), 단주(檀州), 탁주(涿州), 역주(易州), 계주(薊州), 평주(平州), 난주(灤州), 영주(營州), 경주(景州)라 하고,

  순주의 영현에 회유현,

  단주의 영현에 밀운현, 행당현,

  탁주의 영현에 범양현, 고안현, 신성현, 귀의현,

  계주의 영현에 어양현, 삼하현, 옥전현,

  평주의 영현에 노룡현, 안희현, 망도현,

  영주의 영현에 광령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부터 하북성 역현 부근까지의 지명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에 속한 주로 홍주(弘州), 덕주(德州), 풍주(豐州), 봉성주(奉聖州), 귀화주(歸化州), 가한주(可汗州), 유주(儒州), 울주(蔚州), 응주(應州), 삭주(朔州), 무주(武州), 고주(高州)라 하고,

  유주(儒州)의 영현에 진산현(縉山縣),

  울주의 영현에 영선현, 정안현, 비호현, 영구현, 광릉현,

  응주의 영현에 금성현, 혼원현, 하음현,

  삭주의 영현에 선양현(鄯陽縣), 영원현, 마읍현,

  무주의 영현에 신무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서경이 지금의 산서성 대동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 연운 16주의 위치비정은 우리 역사 강역의 서쪽 강역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연운 16주가 북경 부근으로부터 하북성 역현 부근, 산서성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연운 16주는 대체로 지금의 양하, 관청수고, 영정하의 서쪽으로서, 하북성 역현 부근으로부터 산서성 중북부를 가로 지르는 옛 장성 사이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연운 16주 중의 일부 주의 지명과 그에 속한 현의 지명이 북경 부근에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청대에 이르러 많은 지명들이 북경 주변으로 이동되었던 듯하다.

  아래 지도인 고금화이구역총요도를 보면 연운 16주에 해당하는 지명들이 대개 장성 바로 남쪽인 산서성 북부지역과 하북성 서부 지역에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옛 요수가 지금의 난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틀린 것으로 생각된다.

  수경에는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東南過房縣西 又東過安市縣西南 入於海 又元菟高句麗縣有遼山 小遼水所出 西南至遼隊縣 入於大遼水也( 대요수는 장성 밖 백평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장성 안으로 들어와 요동 양평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방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안시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또 원토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의 영정하(永定河)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란이 연운 16주를 차지할 때 북경 부근으로부터 그 동쪽에는 어떠한 나라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곳에는 바로 우리의 고려가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과 고려는 많은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결국 고려가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고려의 서희와 거란의 소손녕이 담판했던 강동 6주는 압록강 동쪽 즉 지금의 북경 북쪽을 흐르는 백하 부근을 말하는 것이지 한반도의 압록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고려는 원나라의 침공도 자주 받았는데, 이 역시 지금의 북경(필자주 : 요동으로 비정된다) 동쪽에 고려가 바로 가까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 때의 기록을 보면 고려의 왕들이 원나라의 도읍 대도에 제집 드나들듯 쉽게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원나라의 대도가 지금의 하북성 역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고려의 도읍 개경이 그곳으로부터 약 1500여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북경 부근에 위치했던 대륙의 고구려, 백제, 신라에 관한 역사 기록으로서 그 책을 지은 김부식 역시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닌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대개의 경우 지금의 북경 부근까지와 또 북경의 서쪽인 산서성 북부지역까지를 우리의 선조들이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삼국의 전신인 삼한 역시 한반도에 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난하를 중심으로 방 4천리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   

  필자의 저서 “고려와 조선 역사의 특급비밀(윤여동 밝힘, 이엘씨미디어, 2007) ”을 읽으면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옛 땅은 지금의 요하 동쪽 만이 아니라 서쪽으로 더 나아가 산해관을 넘고, 북경을 지나 태행산맥을 넘어 산서성 북부를 지나 황하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내몽골을 지나 몽골에 닿았으며 이 모두가 우리의 옛 고조선 땅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필자는 지금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반도보다도 훨씬 넓은 대륙의 우리 옛 땅을 언제쯤이나 되어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