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칠숙과 비담은 왜 난을 일으켰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진평왕 53년(A.D.631) 조를 보면,
“여름 5월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반역을 도모하는 것을 왕이 알아채고 칠숙을 잡아 동쪽 저자거리에서 목을 베고, 그의 9족을 잡아 죽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까지 갔다가 처자들을 보고 싶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총산까지 돌아와서 나무꾼 한명을 만나 옷을 벗어 바꾸어 입고 나무짐을 지고 몰래 집에까지 왔다가 잡혀서 형벌을 받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진평왕은 칠숙을 매우 혹독한 형벌로 다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벌 중에서도 9족을 멸한다는 것은 왕조를 무너뜨리려 한 대역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로서 일가친척이라고 생긴 사람은 사돈에 팔촌까지도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잡아 죽여 그 씨를 멸종시켜 앞으로 절대 반란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는 최고의 형벌이다.
또 3족을 멸하는 형벌도 있는데, 이는 친가, 외가, 처가를 모두 잡아 죽이는 것으로서 이 형벌 역시 가까운 일가친척은 모두 죽게된다.
따라서 이때 칠숙이 9족을 멸하는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왕위를 찬탈하려 했거나 그에 버금가는 대역죄를 저질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칠숙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진골귀족일 가능성이 많은데, 진평왕이 덕만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그에 반대하고 난을 일으키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14년(A.D.645) 조에,
“겨울 11월 이찬 비담을 임명하여 상대등을 삼았다”라고 하면서 비담이 역사에 등장하여 그로부터 1년 2개월 쯤 지난 선덕여왕 16년(A.D.647) 조에, “봄 정월 비담(毗曇)과 염종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하여 즉시 반역을 도모하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이기지 못했다” 라고 기록함으로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이 비담에 관한 정사 기록의 전부이다.
그리하여 이 비담이라는 인물의 혈통은 역사에 확실히 기록되지 못했으나 그가 상대등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신라왕실과 아주 가까운 진골 귀족이었다는 말이 되고, 이찬이라는 직급은 신라 17관등 중 1등급인 이벌찬이나 2등급인 이척찬이었다는 말이 되므로 비담 역시 진골귀족이었을 것이다.
요즈음 방영되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비담이 등장하여 재미를 더해주고 있는데,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로 그려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비담이 선덕여왕의 편에 서 있고,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데도 공을 세운 것으로 보여지는데, 결국에는 선덕여왕 말기에 이 비담이 난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미실이라는 인물은 오직 화랑세기 필사본에만 나타나는 인물이므로 미실이 실존했던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 아직 확실히 고증할 수 없고, 비담의 혈통 역시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 기이 제1 “도화녀와 비형랑” 조를 보면, 신라 25대 진지왕에 대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라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라고 기록될 정도로 여색을 밝혔고, 정치를 잘 못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고, 또 왕위에 있을 때 사량부에 도화(桃花)라 부르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있자 결혼하여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궁궐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려고 하였으나, 도화가 남편이 살아 있어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그 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거부하게 되어 진지왕은 생전에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민간에서는 왕실과 달리 성 문화가 난잡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진지왕은 얼마 후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고, 나이 어린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 삼국사기는 진지왕이 재위 4년 7월 17일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역시 진지왕이 재위 4년에 왕위에서 폐위되고 바로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죽은 지 2년 후에 진지왕의 영혼이 마침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어있던 사량부 도화녀를 찾아와 그녀와 일주일간 동침한 후 갑자기 사라졌고, 그 후 도화녀는 비형이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진지왕이 왕위에서 쫓겨나서도 상당기간 더 살다가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사량부 도화가 진지왕의 영혼과의 사이에서 “비형(鼻荊)”이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비형(鼻荊)이라는 의미는 코가 우둘두둘하다는 의미로서 코가 마치 딸기처럼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별명으로 딸기코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자 진평왕이 그 소문을 듣고 비형을 데려다 궁중에서 기르게 되는데, 이는 진평왕이 비형을 숙부인 진지왕의 아들로 인정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비형은 밤만 되면 월성을 날아 넘어가 월성 서쪽 황천언덕에 가서 도깨비들을 데리고 놀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진평왕은 어느 날 비형을 불러 도깨비들을 데리고 냇물에 큰 다리를 놓으라고 했더니 하룻밤 사이에 완성하자 귀교(鬼橋: 도깨비다리)라고 명명했고, 또 진평왕이 비형에게 궁중에서 데리고 쓸 만한 도깨비가 있으면 추천하라고 하자 길달이라는 도깨비를 추천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길달이 나중에 여우로 변하여 도망치자 비형이 도깨비 무리를 시켜 길달을 잡아 죽이자 도깨비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달아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신라 사람들은 대문에 “이곳은 왕의 영혼이 낳은 아들 비형의 집이니 모든 악귀들은 이곳으로 들어오지 말라” 라는 글을 써 붙여 악귀의 침입을 막았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는 비담이라는 사람이 바로 이 삼국유사에 언급되고 있는 진지왕의 딸기코 아들 비형과 동일인물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정리해보면, 진지왕은 왕비였던 지도부인과의 사이에서 용수와 용춘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고, 폐위 후에 다시 과부인 도화와의 사이에서 비형을 낳았다는 말이 되므로 비형은 582년경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비형의 이복형인 김용춘은 578년생으로서 비형보다 네 살쯤 위였고, 선덕여왕은 586년경 태어났고, 김유신은 595년생이며, 김용춘의 형인 용수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김춘추는 603년생이었다.
만약 비담이 진지왕의 딸기코 아들인 비형과 동일 인물임이 확실하다면,
비담이 상대등에 오른 645년에 그의 나이는 63세 정도였고, 난을 일으킨 647년에 65세의 나이였으며, 이때 선덕여왕은 환갑쯤의 나이였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을 끝으로 신라에 성골 남자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고, 후일 신라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진골 최초의 왕이었음을 감안하면 진지왕의 아들인 비형 역시 진골이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비담이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신분 역시 진골귀족이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비담과 진지왕의 딸기코 아들 비형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비형과 비담을 동일 인물로 보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데, 비담은 왜 선덕여왕 말기에 이르러 난을 일으켰던 것이고, 김춘추와 김유신은 왜 그 비담의 난을 제압했던 것일까?
비담은 자신의 아버지인 진지왕이 왕위에서 폐위된 후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골품을 인정받기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그가 비록 진지왕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하더라도 왕궁에서 왕족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왕궁 밖에 사는 천민이나 일반 백성들과 어울렸던 듯하다.
삼국유사에서 비형이 왕궁 밖의 도깨비들과 어울렸다는 말이 바로 그러한 상황을 말한 것이 아닌가 싶고, 비형이 도깨비들을 동원하여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는 것도 비형이 이끄는 일반백성들이 합심하여 큰 다리를 놓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그를 일반 백성들은 많이 따랐으나 신라 왕족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나 진평왕은 그가 숙부인 진지왕의 혈통을 이어 받았으므로 그에게 벼슬을 주고 정치에 참여시키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열심히 일했을 것이고, 결국 골품과 능력을 인정받아 선덕여왕 말기에 이르러서는 신라 최고 관직인 상대등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등에 오른 비담은 다음 왕위는 자신이 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선덕여왕 말기에는 이미 신라 왕실에 성골 남자는 없었다고 하기 때문에 다음 왕위는 진골에서 이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당시 자신이 진골로서는 최고의 위치인 상대등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고, 자신이 진지왕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후계자로 상대등인 비담을 지명하지 않고, 성골인 자신의 사촌여동생 승만(후일의 진덕여왕)을 지명하려 했을 것이다.
비담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왕위가 날아갈 판이었다.
그리하여 비담은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난을 일으키게 되지만 결국 김유신 등에게 제압당하고 실패하게 되어 역사에서 반역자 비담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되고, 선덕여왕이 죽자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결과를 놓고 보면, 칠숙과 비담 등은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 화를 자초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