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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첨성대는 죽은 자의 환생을 염원하던 곳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9. 10. 06:42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 죽은 자의 환생을 염원하던 곳이었다?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경주에 있는 첨성대가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자랑한다.

  이는 삼국유사 기이 제1 선덕여왕 지기삼사 조의 맨 끝에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에 관한 기록은 일체 보이지 않고,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신라 첨성대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지금 경주에 있는 첨성대는 사각 기단 위에 원형으로 돌을 돌려 쌓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도록 쌓고, 맨 위에는 직선의 돌을 우물정자(井) 형태로 조립해 놓아 안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첨성대의 중간에는 출입구로 보이는 사각형 형태의 구멍을 뚫어 놓았고, 속은 출입구 이하는 자갈돌로 채워져 있고, 그 위는 비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이것이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세워졌고, 신라의 일관들이 나무 사다리를 딛고 일단 중앙의 사각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다시 내부에도 사다리를 놓고 정자석 위로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며 천문을 관측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은 올라 다녀야 했을 천문대의 출입로를 그렇게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천문관측대인 창경궁의 간의대인데,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그것이 실제 천문대였다면 외부에서 직접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면 될 일을 왜 중간에 사각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곳으로 올라간 후 다시 그 좁은 정상부의 구멍을 통해 정자석까지 올라가 천문을 관측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상단의 정자석 내부의 공간은 바닥을 만든다고 해도 사방 약 2m정도의 공간 밖에 확보되지 않고, 출입 통로를 빼면 사방 1m 남짓의 공간 밖에 남지 않는데, 그 좁은 공간에 천문 관측 기구를 몇 가지나 설치할 수 있었을까?

  설령 모든 천문관측을 육안으로 했다고 해도 그 좁은 공간에 사람이 올라가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천문을 관측하다가 어지러워 발이라도 헛디뎌 추락하는 날에는 중상 아니면 사망이다.    

  따라서 경주의 첨성대는 규모나 구조 그리고 위치로 볼 때 천문대로 볼 수가 없고, 선덕여왕 때에 지어진 건축물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 신라가 대륙에서 건국되고, 그곳에서 멸망했다는 것은 중국의 정사인 수서, 당서, 북사 등에 한결같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사서들에는 갈석산이 있고,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 낙랑군 수성현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건축물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지금까지 그 용도에 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었지만 필자는 지금 경주 첨성대의 위치가 경주 고분들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즉 죽은 자를 위해 지어진 건축물일 것이라는 말이다. 

  추측해 보면,

  옛날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바로 매장하지 않고, 육탈 과정을 거쳤는데, 그곳이 바로 시신을 육탈시키는 장소이며, 환생을 염원하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로서, 치마 입은 어머니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가운데의 구멍은 어머니의 배꼽 부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죽은 자를 그곳을 통해 다시 어머니 배속에 넣어 환생하게 한다는 의미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지금 경주 첨성대는 사각구멍 아래까지만 다듬지 않은 자갈돌로 꽉 채워져 있는데, 필자는 그 위에 시신을 올려놓았다가 육탈이 완료된 후에 뼈를 간추려 매장 하는 절차를 거쳤을 것으로 본다. 

  다만 이것이 당시 최고 권력자였을 어느 특정한 한 사람 만을 위해 세워진 것인지 아니면 계속하여 활용되었는지 기록으로 확인해 볼 수는 없겠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 한반도 경주 부근의 최고 권력자를 위한 건축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반도 경주에도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왕국[필자주 : 흉노족들이 한반도 경주에 도읍하고 세운 흉노족왕국)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의 선덕여왕은 한반도에서 왕위에 올랐던 것이 아니라 대륙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서 왕위에 올랐다가 죽어 그 부근의 낭산에 묻혔다. 금주시(錦州市) 부근이 천년 왕국 신라의 중심지 서라벌(금성)이었다.

  따라서 지금 경주에는 삼국사기 기록 속 신라 왕릉은 하나도 없는 것이고, 필자가 추측하기로는 경주에 있는 고분들은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세운 왕국의 왕릉으로 보인다.

  경주의 고분들을 발굴해 봐도 신라 어느 왕의 왕릉이라는 것을 밝혀 줄 증거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은 대륙신라의 왕들이 한반도 경주 부근에 묻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국사기 기록 속 신라의 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해석해야 하고, 경주 첨성대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 보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