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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지금의 북경은 옛 연경, 옛 북평이 아니라 고대의 요동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9. 22. 07:27

윤여동설 - 지금의 북경은 옛 연경, 옛 북평이 아니라 고대의 요동이었다 - 최초주장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북경과 연경을 동일한 장소로 이해하지만 사실 그것은 틀린 것이다.

  북평은 옛날 중국 세력들이 서안이나 낙양 등에 도읍하고 있을 때 그 동북쪽인 하북성 평원 지역을 일컫던 이름이었는데, 춘추전국시대부터 선비족인 연나라가 차지하고 도읍을 하게 되어 연경(燕京)이라고 불리웠던 곳이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북방세력들이 흥기하여 남하한 후 연경을 차지하고  도읍을 건설했는데, 요나라는 남경석진부라 했고, 금나라는 중도대흥부라 했으며, 원나라는 대도라 했고, 후일 명나라의 영락제가 북경을 건설하고 “북경순천부”라 명명하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연경”이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연경은 전설 속의 도읍처럼 전해지게 되었다. 

       

   상경회령부에서 건국된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남하하여 요나라의 중경대정부에 북경대정부를 설치하게 된다.

  금나라 때는 지금의 하북성 탁주시 부근에 중도대흥부를 설치하게 되는데 이곳 탁주시 부근이 바로 연경이고, 송나라의 개봉을 탈환한 후에는 개봉에 남경개봉부를 설치하게 된다.

  요나라보다 금나라의 강역이 더 넓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금나라가 멸망한 후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하북성 탁주시 부근에 중도(中都)를 건설했다가 후일에 이르러 이름을  대도(大都)로 바꾸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연경(燕京)이었다.

 

 그런데 청나라 때 요동에 지금의 북경이 건설되자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북경이 옛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도읍 연경이요, 요나라의 남경석진부 연경이요, 금나라의 중도대흥부 연경이요, 원나라의 대도 연경이요, 명나라의 북경 연경이라고 인식하게 되었으나 사실 명나라로부터 그 이전의 연경과 청나라 이후의 연경은 그 위치가 다르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의 성은 주(朱)씨요, 이름은 체(棣)이다.

  서기 1360년에 남경에서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어머니가 고려여인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명 태조 주원장 자체도 옛 백제인의 후예였다는 설도 있으니 명나라 황실도 우리 민족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주원장은 1368년에 명나라를 세우고, 남경에 도읍하고, 연호를 홍무라 하고,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낸 후 1370년에 열 살짜리 넷째아들 주체를 연왕(燕王)에 봉하게 된다.

  그리하여 연왕 주체는 성장한 영락 13년(1380)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영지인 북평(北平: 원 대도요 연경인 현 하북성 역현)으로 가게 되고, 바로 위 형인 진왕(晉王)과 힘을 합쳐 몽골의 잔여 세력을 축출하는 등 북쪽 국경을 안정시키고, 피폐해졌던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나타낸다.

  그런데 1392년에 이르러 황태자 주표가 죽는 일이 발생하게 되자 명 태조 주원장은 고심 끝에 다시 황태자의 아들인 15세짜리 황태손 주윤문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되고, 1395년에는 또 명 태조의 둘째아들 진왕(秦王) 주상이 죽게 되고, 1398년에는 셋째 아들 진왕(晉王) 주강이 또 죽게 된다.

  그리고 명 태조 홍무제가 1398년 여름에 죽게 되고, 황태손 주윤문이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에 등극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명나라 2대 건문제이다.

  이때 연왕 주체는 명황실의 사실상 최고 어른이었으나 새로운 황제에 오른 조카 건문제는 유학자 출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번왕을 폐함으로써 숙부들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려 시도하게 된다. 

  그러자 연왕 주체는 1399년 8월에 이르러 미욱한 황제를 구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난을 일으키게 되고, 산동성 서부지역과 하북성 회하(淮河) 북부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 남경에 있던 건문제가 연왕 주체의 세력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자 1402년 초 연왕 주체가 이끄는 군대는 화북지방을 통과하고, 대운하를 따라 빠르게 남하하여 양자강에 진을 치고 있던 수군의 항복을 받아내게 되고, 1402년 7월에 이르러 드디어 남경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연왕 주체와 내통한 환관들이 남경의 성문을 열어 주게 되어 연왕 주체가 남경성에 입성하게 되고, 연왕 주체는 명나라 황제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곧 명나라 3대 영락제이다.

  그런데 2대 건문제는 남경성 전투 중에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지금까지도 그 행방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고 한다.

 

★ 명나라 건문제는 불에 타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고 하기도 하며, 멀리 다른 나라로 망명해 갔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지금 명나라 2대 황제 건문제의 능은 없다. 

 

  영락제 주체는 비록 조카로부터 제위를 찬탈하였지만 황제에 올라 명나라의 기반을 확실하게 다지게 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를 조선의 세조와 비교하기도 한다.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했고, 건국 초기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한 것 등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황제에 오른 영락제는 건문제의 측근들을 잡아들여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하고, 번왕들의 권한을 축소시켜 황제의 권한을 대폭강화하게 된다.

  이 시절에 영락제에 맞설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빠른 기간에 국내가 안정되자 영락제는 몇 년 후 수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던 옛 도읍 남경을 떠나 북평으로 옮겨 거처하게 되는데, 지금의 하북성 탁주시 부근이다.

  그리고 영락제는 거마하가 흐르는 탁주시 부근에 새로운 도읍 북경을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원나라의 대도를 복사하듯 그대로 본 떠 건설했다고 한다.    

  1420년에 이르러 자금성이 완공되자 영락제는 공식적으로 남경(남경응천부)으로부터 북평(하북성 탁주시 부근)으로 천도하게 되고, 그곳을 북경순천부(北京順天府)라 명명하게 된다.

 

  지금 중국에서는 지금의 북경이 옛날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도읍 연경이었다고 하면서 그후에도 각 왕조들이 도읍했던 연경이라고 선전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지금의 북경은 옛 요동군으로서 동경요양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