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자료 - 미실의 최후 - 58세에 병들어 죽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미실의 어머니는 신라 최고의 미남이었던 위화랑의 외손녀인 묘도이고,
아버지는 신라 최고의 미인이었던 벽화의 외손자 미진부이다.
그런데 신라 최고의 미남이었던 위화랑과 신라 최고의 미녀였던 벽화는 친남매간이었으므로 결국 이들은 자기들의 외손자와 외손녀를 혼인시켜 미실을 낳았던 것인데, 미실 역시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기록된 미실의 출생설화는, 미진부공(삼엽공주와 아시공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어머니인 삼엽공주(법흥왕과 벽화사이에서 출생한 딸)와 항상 궁중에 들어와 입시하고 있었는데, 묘도(옥진궁주와 영실공 사이에서 태어난 딸)와 전각을 사이에 두고 머물렀다고 한다.
그런데 묘도가 미진부를 보고는 사모하여 회랑을 지나가는 미진부공을 끌어들여 상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옥진궁주(위화랑과 오도사이에서 출생한 딸)가 꿈을 꾸었는데, 칠색조가 자신의 품에서 날아 가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일어나 이상하게 생각되어 묘도의 침실로 가 보았더니 이때 마침 묘도와 미진부공이 사랑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옥진궁주는 이에 기뻐서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희 부부는 이제 귀한 딸을 낳을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미실을 낳았다는 것이다.
미실은 서기 549년경 출생했는데, 자라자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으며,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고 백가지 꽃의 영검함을 뭉쳐 진선미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천하절색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옥진은 미실에게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치게 되고, 처음에는 세종전군과 혼인하였는데, 미실이 어찌나 기교에 능한지 세종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어서 지소태후가 미실을 궁밖에 나가 살도록 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사다함과도 통하고, 진흥왕의 큰 아들인 동륜과도 통하게 되고, 또 진흥왕과도 통하게 되는데, 오죽했으면 딸을 낳았는데, 진흥왕의 딸인지 태자 동륜의 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에도 미실은 25대 진지왕, 26대 진평왕 삼대의 왕과 그 외의 왕족들과도 성관계를 맺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떻게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 삼대와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지금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그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극히 일부 사람만이 그러한 성 풍습에 대하여 거부감을 나타냈을 뿐 통상적으로 행하여졌다고 보여진다.
신라에만 있는 “신국의 도(神國之道)” 라고 하면서................
미실은 진평왕의 숙부인 진지왕과 비슷한 연령으로서 진흥왕이 죽자 진흥왕의 왕비였던 사도부인, 금륜(진지왕의 이름)과 결탁하여 금륜을 왕위에 올려주면 왕후로 맞아들여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금륜을 왕위에 올렸으나 막상 금륜이 왕위에 오른 후 왕후에 봉하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반대로 무산되게 된다.
그러자 미실은 다시 사도태후와 함께 진지왕을 폐위 시켜버리고 사도태후의 큰손자인 열세살 짜리 진평왕을 왕위에 올리게 된다.
사도태후의 경우는 자신의 작은 아들을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손자인 진평왕을 다시 왕위에 올렸다는 말이 되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 하겠다.
이렇게 되어 미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고, 이때의 신라는 미실의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미실은 진평왕보다 18세쯤 위였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진평왕 말기에 미실이 난을 일으키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사실 미실은 진평왕 28년인 서기 606년경에 58세쯤의 나이로 이미 죽고, 진평왕은 미실이 죽고 난 후에도 약 26년을 더 재위하다가 서기 632년(재위 54년) 정월에 죽게 되고, 그 뒤를 선덕여왕이 왕위를 잇게 된다.
드라마에서는 선덕공주와 미실을 정적으로 그리고 있으나 이는 재미를 위해 설정한 픽션일 뿐이다.
미실과 선덕공주는 약 38세 정도의 나이차이가 나므로 선덕공주가 20세쯤일 때 미실이 58세의 나이로 죽었던 것이고, 선덕여왕은 45세쯤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일세를 풍미했던 미실의 말년은 어땠을까?
필사본에는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7세 풍월주 설화랑(설원랑) 조에,
“설원은 풍월주의 자리를 문노에게 양위하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로 갔다. 설원은 거느린 낭도를 택하여 미실이 출입하는 것을 호위하며 사신두상(개인비서실장격)이 되었다. 후에 미륵선화라는 이름을 더하였다.
미실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설원이고, 세종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자는 문노였다. 성하고 지극하다.
설원공은 건원14년(A.D.549)에 태어나서 건복 23년(A.D.606) 7월에 죽었다.
그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간호하였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서 슬퍼하면서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지내며 “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 하였다. 그때 미실의 나이 58세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미실은 설원공이 죽은 서기 606년 7월 이후 머지않은 때에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영흥사에서 죽었을 것이다.
미실은 드라마에서와 같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죽는 것이 아니라 말년에 병에 걸려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실이 죽자 그 아들인 보종공은 어머니를 따라 죽지 못한 것을 죄로 여겨 문을 잠그고 홀로 거쳐하며 미실궁주가 쓴 수기(일기) 7백권을 베껴 집에 간직하였고, 또한 미실의 초상을 그려서 걸어 놓고 아침 저녁으로 절을 하였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미실도 이렇듯 죽고 말았으나 어찌되었든 그녀는 많은 남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만은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