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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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훈요십조 속의 진짜 차현(車峴)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09. 11. 17. 00:23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훈요십조 속의 진짜 차현을 찾았다 - 최초공개

 

 

[찾고보니 차현이라는 의미는 수레(마차)가 넘어갈 수 있는 고개라는 의미였다. 급경사가 아니고,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고개였지만 마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도로가 만들어져 있었던 듯 하다] 

 

  천여년전 고려 태조 왕건이 죽으면서 남긴 훈요10조 제8조에서 말한 차현(車峴)을 최초로 공개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차현이 어디를 말하는지 몰라 많은 오해와 불신을 불러 일으켰다.

  찾고보니 차현은 한반도 공주 북쪽을 지나는 차령산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고, 차현이남은 한반도의 전라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려의 시조 왕건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던지 서기 943년 4월에 대광인 박술희를 불러 자기가 이루어 놓은 고려를 후손들이 그르칠까봐 걱정되니 자신의 후예들이 아침 저녁으로 펴보고 귀감으로 삼게 하라 하면서 자신이 직접 지은 "훈요10조"를 주고, 5월에 이르러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훈요10조 중 유독 제8조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 논란의 중심에 "차현과 공주강"이 자리하고 있다. 

 

  훈요10조 제8조의 전체적 내용은,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의 산 모양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국가를 혼란하게 하고, 백제가 통합 당한 원한을 가지고 왕을 범하는 죄를 저지르고 난을 일으킬 것이다. 한낱 관청의 노비이거나 진, 역, 잡척에 속한 무리라 할지라도 권세 있는 사람에게 붙어 신역을 면하거나, 왕후, 궁원에 붙어 간사하고 교묘한 말로서 권력을 농단하고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선량한 사람으로 보이더라도 벼슬을 주어 권세를 부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라는 것으로서 한 마디로 차현 이남, 공주강 밖 사람은 고려에 대하여 배역할 것이니 절대 관리로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차현과 공주강이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찾게 되었고, 조선 시대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은 고려가 한반도의 개성을 도읍으로 했다고 생각하고는 이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해석하려 했다. 즉 차현이라는 곳은 지금의 차령산맥을 말하는 것일테고, 공주강은 지금의 금강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는 산형과 지세가 배역하다는 것을 금강이 개성을 향해서 활시위를 당기는 것 같은 반궁수 형국으로 흐르고 있어서 왕건이 그러한 유언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고, 어느 사람은 훈요십조 제8조가 변조되었을 것이라고도 했고, 그렇지 않다고도 했다. 

  내용이 변조되었을 것으로 보는 이유는, 고려 초기에 훈요10조가 난리 통에 행방불명되었다가, 80여 년 후인 10대 정종 때에 경상도 출신인 최제안이 최항이라는 사람의 서고에서 훈요10조를 발견하여 다시 왕실로 되돌아오게 되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따라서 훈요10조가 민간으로 유출되어 있을 때 내용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고려시대 때에도 신라의 후예들과 백제의 후예들 간에 갈등이 있었고, 그리하여 신라의 후예들이 백제 후예들의 출사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하여 태조 왕건이 지어 전한 훈요10조의 내용 중에 제8조의 내용을 조작하여 변조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른 문서도 아닌 훈요10조를 변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서 현재 원본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훈요10조의 내용 만은 원래 훈요10조의 내용 그대로 임에 틀림없을 것이며 왕건이 말한 "차현이남 공주강외(차현남쪽 공주강밖)"라는 것은 전라도 지역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보는 필자의 마음은 매우 안타깝다.     

  왜냐하면 고려가 등주, 내주, 빈주, 체주와 정확히 마주보는 위치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을 이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으며, 태조 왕건의 두 번째 왕비는 장화왕후 오씨로서 전라도 나주 사람이었고 그녀가 낳은 아들이 후일 왕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혜종인데, "차현이남(車峴以南) 공주강외(公州江外)" 를 지금의 충남 공주 이남으로 본다면 왕건 스스로가 전라도 나주 여인을 왕후로 맞아들였고 또 그녀가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정해 놓고 금강이남 사람이 배역할 것이니 그 지방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유서를 작성하여 전하면서 그 아들에게 꼭 지키라고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건이 말한 훈요10조 제8조의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대로 한반도의 차령산맥과 금강의 남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의 건국지는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이 아니라 옛 한사군의 진번군과 낙랑군의 사이 지역으로서 고려의 도읍 개경은 바로 중국 하북성 승덕시의 동남쪽에 있는 관성현(寬城縣, 관성만족자치현)이었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왕건은 이 훈요10조를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에서 작성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현에서 작성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한반도에 와보지도 않았을 왕건이 한반도의 금강이남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했을 리도 없고, 왕건은 대륙에 있는 "차현이남 공주강 밖"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의 남쪽인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지역이 왕건이 말한 차현이남, 공주강외인 것이다. 

  바로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를 말하는 것으로서 고려 태조 왕건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고, 실제로 고려 내내 사비사람은 고려 조정에 중용되지 않았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역사의 중심강역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었는데, 우리는 엉뚱하게도 옛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에 그 모든 기록을 비정하여 해석함으로써 아무 쓸모없는 감정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대륙의 옛 땅을 찾아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날 우리의 동서갈등이 자연히 사라질 것이지만 그 이전이라도 우리의 역사가 잘못 해석되고 있다는 것 만이라도 모든 국민들이 이해하는 날 우리는 화합된 국민으로서 서로 돕고 웃으며 미래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