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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조선의 준왕이 한(韓)을 세운 진짜 "금마(金馬)"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09. 12. 27. 21:45

윤여동설 - 고조선의 준왕이 한을 세운 진짜 “금마(金馬)”를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지 한 전에 인용된 위략(魏略)의 기록을 보면,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거꾸로 공격하여 주 왕실을 보존해 주려 하였는데, 그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고, 대부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사기 흉노전에는 1천여리라고 했다)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 ; 滿潘汗이라고도 한다)을 경계로 삼아 마침내 조선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 이르렀을 때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정략상 진나라에 복속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부왕)가 죽고 그 아들 준(준왕)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승과 항우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점점 준(준왕)에게 망명하므로 준(준왕)은 이들을 나라(조선)의 서쪽지역에 살게 하였다.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나라는 패수(필자주 : 요수의 오기일 것이다)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치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투항하고는, 조선의 서쪽 변방에 살게 해 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노라고 준왕을 설득하였다.

  준왕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임명하고, 벼슬을 하사하며, 사방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조선의)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보내 속여서 말하기를, “한나라 군대가 열군데 길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하고는 곧바로 창끝을 돌려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위만의 공격을 받고 졸지에 왕검성을 빼앗긴 고조선의 준왕은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도망쳐 바다(큰 호수를 해(海)로 표현한 듯)를 건너 한(韓 : 마한)의 지역으로 와서 다시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하여 국호를 “한(韓)”이라 하고 “한왕(韓王)”에 올랐던 것으로 나타나고, 이때 준왕이 새로 도읍했던 곳이 마한의 월지국(月支國: 目支國이라고도 한다)이었으며, 그곳이 바로 익산 금마(金馬)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準乃移居金馬郡”이라 함으로써 준왕이 옮겨 산 곳이 금마군이라 했고, 권람의 응제시주에도 “箕準避衛滿之亂 浮海而南至金馬郡 開國號馬韓 今益山郡”이라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옮겨와 다시 한을 세우고 도읍한 곳이 익산 금마 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 고대 역사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해, 북한 평양을 왕검성이라 인식하고 있고, 전라북도 익산 금마를 준왕이 한을 세우고 도읍했던 금마군이라 인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역사 해석이었다.

  “금마(金馬)”란 말의 형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지방의 지형이 말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었고, 지금까지 “마한(馬韓)”이라는 나라 이름도 왜 하필 말과 연관시켜 마한이라 했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이 바로 마한의 도읍  월지였고, 금마저였고, 익주였다. 

  지금의 풍윤 환향하공원의 형상이 말의 형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한, 금마 등 말과 관련 있는 지명이 유래한 것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참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익산군 조를 보면,

  “[건치연혁] 

  본래 마한국이다.

  [후조선왕 기준은 기자의 41대손이다.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배를 타고 남쪽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했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이를 병합하고 이후부터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신라의 신문왕이 금마군으로 고치고,

  고려 조에 와서 전주에 부속시켰다.

  충혜왕 뒤 5년에 원 순제의 황후 기씨의 외가라 하여 승격시켜 익주라 하였는데,

  조선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의 준왕이 한을 세웠던 곳이 금마였음을 확인해 볼 수 있고, 금마저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어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에 귀순했던 보덕왕 안승이 살았던 금마저가 바로 금마였음을 알 수 있고, 원나라 기황후의 외가집도 바로 익산 금마였음을 알 수 있다.